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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ch 부자의 탄생 - 포브스가 25년간 추적한 400대 부자 보고서
피터 번스타인, 애널린 스완 지음, 김고명 외 옮김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08년 9월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11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富)라는 것이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비록 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집편지사(執鞭之士)란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당시에는 가장 천한 직업 중 하나였다. 높은 사람이 수레를 타고 이동할 때 그 앞에서 길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시대, 부(富)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리가 되어 녹읍을 받는 것이었으므로 공자의 이 말은 자신이 품은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관직을 얻어 세상에 나가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겠노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 말은 누구나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부자가 된다는 것이 본인이 원하기만 해서 되는 것이라면(富而可求也) 뉘라서 그것을 마다할 것인가란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부자 되기란, 그것도 자신(공자)이 좋아하는 바(道)를 추구하면서도 부자가 되는 길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열망하는 것이 바로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책에 수록된 것처럼 엄청난 부자가 되길 바라기보다 자신의 노후가 너무 빈궁하지 않고,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에 나가 살아가는 동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의 부(富)를 남겨주고 싶어 한다. ‘부자 되기’ 열풍이 지닌 파급력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대개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소망은 매우 소박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것이 우리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된 결과, 정작 인간으로서 우리가 추구할 만 한 것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그 이상이 사회의 공공선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조차 하찮은 존재로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가는 것이 문제이다.
미국의 3대 경제전문 잡지로 <비즈니스 위클리>, <포춘> 그리고 <포브스>를 꼽는다. 이 셋 중에 <포브스>는 <중앙일보>에서 한국어판을 내고 있기도 하다. 각 매체마다 나름의 특장점이 있지만 격주로 발행되는 <포브스>는 심층보도 분야가 강점이다. <포브스>를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 이들이 해마다 선정하는 각종 설문 및 조사 결과로 발표하는 지표들이다. 그 중 하나가 전 세계 부자들의 재산변동 상황을 점검해 발표하는 <400대 부자>인데, 이 책 『The Rich 부자의 탄생』은 <포브스>가 지난 25년간 조사해온 400대 부자에 대한 종합 보고서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각종 주간지들이 해마다 이런저런 지표들을 발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포브스>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심층조사를 할 만한 여유와 의지가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를 축적해 재구성하고 종합해낼 능력 있는(저널리즘적인 감각을 갖춘) 중간 필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포브스>가 해마다 발표하는 ‘포브스 400’이 지난 25년간 계속되는 동안, 이 리스트는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이자, 사회변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생생한 보고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지표로써만 축적되어 있었다면 통계학자들에겐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일반 대중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언론인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수상한 피터 번스타인과 애널린 스완은 관록 있는 언론인이자 편집자들로서 자칫 흥미 위주로 격하될 수도 있는 부자들의 이야기를 품격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몇몇의 사례는 여전히 흥미를 자극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82년에 발표된 포브스 400명단에는 재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부호가 13명에 불과했으며, 재산이 7,500만 달러 이상이면 명단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최소 10억 달러의 재산이 있어야 명단에 낄 수 있다. 1982년에는 400명 전체의 재산이 미국 GDP의 2.8%였지만, 2006년에는 이 수치가 9.5%로 뛰었다(인터넷 열기가 뜨거웠던 2000년에는 12.2%에 달했다). 2005년에는 상위 1%의 미국인들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28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부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보면 도금시대와 1920년대를 빼고는 지난 25년에 필적할 시대가 없었다.”
위의 글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사실 지난 25년의 전반기에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다)을 이룩했고, 그 결과 미국의 부자들, CEO들은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같은 시기, 미국 못지않은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일본의 CEO들의 임금이 평균 4.4배 오르는 동안 미국의 CEO들은 평균 22배의 임금상승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전체적인 부가 증진되었을지 몰라도 그 부의 대부분은 가진 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지는 않을 지라도 일반인들의 부가 증대되는 것보다 몇 십 배 더 많은 재화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경제의 기형적인 측면,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잘 드러내주는 지표다. 불과 400명의 부자들이 3억이나 하는 인구를 가진 세계 최강대국의 연간 총수입 중 10분지 1을 차지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냐는 의문을 우리는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브스>와 이 책의 저자들은 이 책을 읽는 제3세계의 가난한 독자 중 한 사람인 ‘나’처럼 논쟁적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논쟁적인 부분에선 슬그머니 한 발을 뺀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교묘하게 언급하고 지나갈 정도로 노련하다. 25년간 축적된 ‘포브스400’ 명단을 살펴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진실을 보여준다.
첫째. 부자 되는 산업의 변화다. 지난 25년간 부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 가진 기업의 주력 산업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지난 25년간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제조업 및 석유산업 분야에서 배출되던 부자들이 점점 더 첨단기술과 금융업 분야에서 더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한 눈에 보인다. 실리콘 밸리가 과거의 월스트리트, 텍사스 유전지대 못지않은 미국의 금맥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둘째. 여자는 부자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25년간 미국의 이민자들 중에 ‘포브스 400’에 이름을 올린 이민자는 97명이나 되지만 여성은 202명이다. 얼핏 보면 많은 것 같지만 지난 25년간 여성의 사회진출이 널리 늘어난데 비해 여성 부호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며 그나마 이중에서 자신이 일해서 그 위치에 올라간 사람은 ‘오프라 윈프리, 마사 스튜어트’ 등 단 13명뿐이고, 나머지는 유산상속에 의한 것이다.
셋째.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노력하여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비록 가장 부유한 사람 중에 MS의 빌 게이츠, 오라클의 래리 앨리슨 같은 이들이 대학을 중퇴한 인물이긴 하지만 지난 25년간 ‘포브스 400’ 명단을 차지한 인물들 가운데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은 10% 내외에 불과하다.
『The Rich 부자의 탄생』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부자,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항목으로 예를 들어 ‘부자들을 많이 배출한 대학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1위 MIT, 2위 하버드대학의 순으로 부자 순위를 매긴다. 대부분은 사립대학이고, 주립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한 워렌 버핏을 포함해 7명뿐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또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만 한 질문, 상속형 부자 vs. 자수성가형 부자를 대비시켜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자수성가형 부자가 많은 것이 미국 부자들의 특징이지만 상속형 부자 역시 전체 30%를 차지하고 있다. 제2부는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나’를 살피고 있다.
우선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인 블루칼라 산업을 살피고, 뒤이어 실리콘 밸리로 상징되는 미국의 첨단산업이 집결해 있는 서부의 부호들, 그중에서 단연 으뜸인 빌 게이츠가 부를 축적한 과정을 중심으로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들도 함께 보여 준다. 제3부는 이렇게 번 돈을 그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베블런 이래 계속 비판받고 있는 과시적 소비를 위해 흥청망청하는 이들과 앤드류 카네기 이래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기부활동에 대해서도 지면을 충분히 할애해 양측의 균형을 맞추려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묻는다.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부와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끝에, 절망적인 가난에서 벗어나 중산층이 될 때까지 부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그 이후에는 행복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해에 5만 달러를 버는 미국인은 1만 달러를 버는 미국인보다 행복하다. 하지만 한 해에 500만 달러를 버는 미국인이 느끼는 행복은 10만 달러를 버는 미국인이 느끼는 행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들은 부자가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동서양의 오래된 명언은 맞는 말이라고 증언한다. ‘포브스 400’에 명단을 올렸던 부자 가문은 여러 가지 이유로 25년간 부자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무능한 후손이 사업에 쫄딱 망해서 명단에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부호에서 여러 차례 부의 대물림 과정을 통해 유산을 상속받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난 결과다. 부자들은 대개 어떻게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할 수 있는지 자녀들에게 충분히 교육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되지 않아도 누구나 충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재산이 증식되는 것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돈 버는 일 자체가 성취동기를 자극하는 큰 즐거움이란 사실을 이들은 간과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일에 성공하는 1%의 사람들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는 나머지 99%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질 기회도 없으며 장차 행복해질 기회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공자가 어차피 부자가 못 될 바엔 나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겠노라고 말한 것이 단지 그가 현명한 성인군자이기 때문이었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가 붐을 이루지만 사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명심보감'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들이다.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경영컨설턴트(구루)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금과옥조 같은 '혁신'이니 '창조'니 하는 말들, '경영컨설팅' 서적들이 하는 역할은 현대의 '무당'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결론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실천한다고 해서 누구나 똑같이 성공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결과론적인 사례를 들어 말한다. 새로운 담론이라도 되는 양,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들일수록 내용은 낯익고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엔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도 저널리스트의 글다운 격을 유지한다. 경제전문인 <포브스>니까 국내의 경제신문들이나 잡지들처럼 드러내놓고 '비즈니스 프렌들리'일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기 쉽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사람조차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균형을 유지한다. 그것이 이 책에 별 다섯을 주는 이유다. 책 값이 아깝지 않은 책이며 국내 저서로 이런 책이 나오기 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궁금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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