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 - 독일, 서유럽, 미국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은이), 정대성 (옮긴이) | 들녘(코기토)
어떤 시대이건 지배이념은 그 지배계급, 즉 사회의 물질적 지배세력이면서 동시에 지적 지배세력을 구성하는 계급의 이념이다. - 칼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비판서론』
나는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20세기가 아닌 역사적인 시간으로서의 20세기는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해서 소련 연방의 해체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러시아 10월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기도 했으므로 한 편으론 러시아 혁명을 한 세기의 역사적 시작으로 놓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구분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어찌되었건 마르크스가 저와 같은 글을 쓴 이후 인류가 경험한 두 차례의 대규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막대한 손실을 물질적인 손실은 물론 정신세계에까지 끼쳤다.
특히 미국을 제외한 유럽 각국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여력을 회복하기 까지는 막대한 시간이 걸렸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의 현대역사학 교수인 잉그리트 길혀-홀타이가 분석하고 있는 『68운동』은 유럽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기력을 회복하는 시점에 벌어진 대규모 반자본주의(및 신좌파) 문화운동(혹은 혁명)이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저자 서문에서 독일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시 “어떤 것이 우리 앞에 있는 듯이 보였다./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어떤 것이…….”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되어 있는 엔첸스베르거의 시는 68운동의 모호함과 새로움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무언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합의에 도달할 주체조차 흐릿했고, 주체를 생산해내지도 못했다. 68운동이 혁명이라 불리지만 결과적으로 혁명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68운동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함의들
68운동은 몇 가지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첫 번째는 이 운동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지식, 이론의 생산기지로서의 힘을 상실했던 유럽의 지식 사회가 부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경제적 헤게모니를 상실했던 유럽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운동이 ‘빛은 동방에서’라는 낡은 구호를 되살려 자본주의도, 그렇다고 스탈린식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중국의 마오이즘(특히, 문화혁명)에서 찾으려 했었다는 것이다. 68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구좌파의 방식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는 제2차 인터내셔널 붕괴 이후 국제연대의 구호 아래 뭉친 - 실제로는 국제주의 연대운동이라 할 수 없겠지만 - 사실상 마지막 청년운동이었다. 네 번째는 계급이 아닌 새로운 문화주체의 창안으로 나아가려한 최초의 운동이었다는 점인데, 바로 이와 같은 네 가지 측면이 각국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사건, 각기 다른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기 때문에 68운동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관점에서 잉그리트 길혀-홀타이의 『68운동』을 읽어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8운동은 ‘미리 결정된 역사 발전 과정에 대한 신뢰(구좌파적 역사관)가 아니라, 역사는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며 의식을 창출하는 행동으로 기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관점의 차이는 당시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던 민족해방투쟁을 바라보는 구좌파(동구사회주의국가 및 소련)의 ‘혁명이 일어나도록 돕는’다는 시각과 차별화되었다. 68운동의 아이콘 중 하나가 ‘체 게바라’였던 이유는 그가 바로 이러한 시각, ‘혁명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만드는’ 혁명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저 이미지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68운동이 지닌 총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였다.
신좌파 지식인들 - 68운동은 혁명인가? 혹은 혁명으로 가지 못한 이유
신좌파 지식인들은 복지국가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에서의 공산주의 왜곡을 똑같이 비판하며, 전통적인 좌파 정당이 현실정치에 사로잡혀 정치 ․ 사회적으로 현 상황을 극복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다.
첫째. 맑스주의 이론의 새로운 해석이다. 신좌파는 맑스의 초기 저작을 재수용해 일차적으로 착취가 아닌 소외의 측면을 강조하고, 맑스주의와 실존주의 또는 맑스주의와 심리분석을 연결해 이론적 해석의 개방성을 추구함으로써 맑스주의의 경직화된 이해 및 제도화된 맑스주의와의 동일시에서 탈피하려고 한다.
둘째. 사회주의 사회질서의 새로운 구상이다. 신좌파의 확신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정치․사회적 혁명, 즉 권력 획득과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국한될 수 없고 생활세계, 즉 개개인의 자유시간과 가족, 그리고 성적인 관계 및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소외를 제거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이행 전략이다. 개인이 집단의 종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문화적인 부분의 변화가 사회․정치적인 전환에 선행해야 하고, 새로운 문화적 모범의 창출 및 그것의 하부문화로의 이전 또는 기존 제도 안에서의 ‘대항권력’이라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의사소통 형태와 삶의 형태가 미리, 그리고 실험적으로 펼쳐져야 한다.
넷째, 새로운 조직의 구상이다. 조직이 아니라 행동이 그 구상의 모토다. 신좌파는 스스로를 정당이 아닌 운동으로 이해한다. 운동으로서의 신좌파는 모든 면에서 직접행동의 전략을 따른다. 신좌파는 행동으로 통찰력을 키우고 도발로 여론을 일깨우는 동시에, 행동 속에서 그리고 행동을 통해 행동 주체를 변화시키려 한다.
다섯 째, 사회변혁 주체의 새로운 규정이다.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만을 사회․문화적 변혁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신좌파는 새로운 집단이 사회 전환의 동인을 제공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즉 새로운 (전문직) 노동자계급, 젊은 지식인, 사회 주변부 집단이 그들이다. <본문 26~27쪽>
68운동은 과연 혁명인가?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68혁명’이라 호명하는 과정에서조차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게 되는 의문이다. 최근 출간된 『혁명의 탄생』(교양인, 2009)에서는 근대 유럽을 만든 좌우익 혁명들을 고르게 다루는 편이지만 그곳의 어느 장에서도 ‘68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파커는 ‘혁명이란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혁명의 궁극적인 결과는 구질서가 정치적으로 파괴되고 권력의 소재가 혁명적으로 이동했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8운동은 결코 혁명이 될 수 없다. 서구의 근대 역사에서 혁명에 버금가는 정치적 운동은 상당히 여러 차례 출현하고 있는데,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 군주제를 붕괴시켰으나 보수파의 신속한 대응으로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권위주의적 체제가 회복되기도 했다. 앞선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존 브루이는 이것을 ‘실패한 혁명’이라는 다소 역설적인 개념으로 불렀다.
동원이 지속되지 않으면 사회집단의 저항은 에피소드나 소요, 반란에 머무르고 만다. 그러나 지속적인 동원은 허약하게 조직된 집단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동원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목표에 맞춰 일정 기간 이상 개개인을 참여시키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본문 41쪽>
68운동의 형성과정에서 동원의 주체는 신좌파 학생 집단이었다. 미국의 버클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등으로 번져나갔다. 이들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젊은이들로 계몽을 통한 인식의 각성을 통해 과거(구체제)와의 구체적인 대결을 선택했다. 개인은 권위와 권위주의 지배구조를 거역하는 행동 속에서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 변화해야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기존의 제도에 담겨진 권위, 억압의 잠재력을 폭로하고자 했다.
사회운동은 독자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사회운동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동맹 상대, 즉 자립적이지만 서로 수렴하는 정치세력(정당, 이해단체, 관련 사회집단, 유사한 운동)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동맹이 허약할 경우 사회운동은 종종 실패하는 반면, 공조활동은 운동을 성공적으로 동원하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동맹은 사회운동이 전개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에 속한다. <본문 95쪽>
그러나 68운동은 결정적인 동맹을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스에선 공산주의 성향의 노동총동맹(CGT)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합을 저하기 위해 투쟁했다. 노동총동맹은 이미 전체 경제활동의 마비를 가져온 혁명적 상황을 분출할지도 모를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모든 조직력을 가동했다. 노동총동맹의 노력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기층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 동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책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은 운동의 중심그룹들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기존의 체제 앞에서 신좌파와 구좌파는 서로 다른 노선과 이념으로 분열되었고, 결국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정권 교체는 실현되지 못했다. 신좌파들은 이 같은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스탈린주의에 사로잡힌 구좌파에게서 찾았다. 어찌되었건 분명한 것은 이들이 연대하고, 동맹을 맺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68세대의 일원으로 한국에 오랫동안 머물러왔던 다니엘 쿠란트(Daniel Courant, 필명)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창당과정을 지켜보며 <레디앙>에 이것이 “재앙이 아니라 큰 희망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유럽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통 좌파가 있다고 말한다.
유럽의 세 가지 전통 좌파
첫 번째는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배반하고 우경화한 집단이다. 이들은 사회연대의 파괴와 자본가들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능동적으로 기여하며 자족하는 집단이다. 프랑스와 유럽 전체의 사회당들,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와 독일의 녹색당 등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는 이제 그 이름뿐이고, ‘좌파’는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두 번째 그룹은 여전히 약간은 좌파의 냄새를 풍기나, 종종 우파와 연합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로 아직도 스탈린주의의 정신과 습성을 버리지 못한 공산당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완전히 정치적 신망을 잃었고, 당원들은 거의 떠났으며, 그들에게는 가상의 존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는 완전히 그 이름을 바꿔 버리고, 자본주의를 위해 역동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유럽은 미친 걸까? 아니, 미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세계 전체다.
한국에는 이처럼 거추장스러운 좌파의 유산이 없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잠깐만, 동지. 이제 곧 이야기할 테니. 유럽의 전통좌파에서 세 번째 그룹이 남아 있다. 공산당 밖의 전통적인 극좌그룹이 있다. 68이 잠시 그들에게 젊음을 불어 넣기도 했으나, 이들은 두 세계대전 사이의 상황의 계승자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과 트로츠키 등으로 분화된 노선 투쟁)로 여전히 머물러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무관한 이론투쟁에 파묻혀 있고, 대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물며 지금의 새로운 세대와 현상에 걸맞는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하기에는 더욱 역부족인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다니엘 쿠란트는 한국의 진보정당과 진보운동의 위기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한 편으론 그를 포함한 68세대가 경험한 운동의 실패와 몰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좌파 지식인들이 스스로 신좌파운동이라고 이해했던 68운동의 딜레마는 구좌파의 조직은 물론 신좌파 조직 내부에서의 분열, 주로 급진적인 해결방식(폭력)을 둘러싼 이견과 대립이었다. 행동의 급진화가 도리어 진영 내부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지난 2008년 촛불시위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두고두고 나타날 현상이다.
하버마스는 저항운동이 자기만족적인 목표만 추구하지 않으려면 현실을 지향하는 전술을 펼쳐야 한다고 밝힌다. 저항운동은 자신의 행동반경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특권적인 영향력을 가진 집단의 뒷받침 없이는 대중매체의 지배를 받는 광범위한 여론을 움직이지 못한다. 아울러 ‘정치파업’이라는 수단도 노동조합의 지원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173쪽>
저항운동이 현실조건과 합치되는 - 일종의 개량적인 - 전술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저항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전술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딜레마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위르겐 하버마스와 클라우스 오페가 결별하게 된 것도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술의 현실 지향은 ‘개량적인 범주’에 대한 굴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를 따르는 일은 “부르주아 법치국가의 권위주의적인 변형”에 맞서는 ‘저항의 잠재력’을 포기함을 뜻한다. 물론 당장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점치기는 힘들어도, 가능성과 현실성이 일으키는 모순은 성장하는 ‘전문지식인’의 항변을 통해 쟁점화된다.
클라우스 오페는 강화된 정치적 통제가 사회계몽의 조건을 변화시켰다고 보며, 실제적인 계몽 과정에 속도를 붙이고 ‘저항의 잠재력’을 유지하는 일을 행동을 통한 자기계몽의 역할로 돌린다. 저항의 잠재력을 낳는 것은 “사회적인 삶의 모든 영역과 자유의 기회를 모조리 구속하는 퇴행적인 과정에 대한” 통찰력이고, “낡은 사회구조와 그 구조 속에 응집되는 억압에 대한 집단적인 경험”이다. 그가 볼 때 저항운동의 목표는 혁명적인 정책의 한 수단에 불과한 여론의 정치화가 아니라, “정치․경제․언론․문화적인 억압 제도의 해체”다. <본문 173쪽>
68운동이 남긴 유산과 과제
68운동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보다 구좌파와 신좌파의 거의 완벽한 결별이었다. 두 진영은 마치 내전을 치른 우파와 좌파처럼 도저히 뒤섞일 수 없는 상대라는 확신을 얻었다. 다시 앞서 다니엘 쿠란트의 글로 돌아 가보자.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유산은 매우 다르며, 따라서 전망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좌파는 한국사회에 가해져 왔던 네 가지의 주된 억압에 의해 ‘강력하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럴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적대적인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곧 이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남한 정부의 자본주의 독재, 해방 직후 북한에서 뿐 아니라, 남한사회에서도 좌파 활동가들과 지도자들을 말살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맡았던 김일성의 붉은 파시즘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커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어쩌면 이 거대한 공백의 덕에, 너무 많은 좌파의 흔적들을 가진 유럽의 경우와 정반대로 (PD와 NL이 한 지붕 아래 사는-편집자)민주노동당이라는 공개적인 좌파의 단일한 연합체는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합적이며 동시에 개방적인 정신 덕에, 민주노동당은 대중들에게 그토록 큰 희망과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한국에선 이런 개방성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었지만, 좌파의 흔적이 많은 유럽에서라면 전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엔 좌파로 가장한 지독히 반동적인 세력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사실, 굳이 ‘가장’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은 단지 명칭을 좌파로 차용할 뿐, 그들의 사상이나 반동적 사고는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상적 불량배들과의 동거가 끝났다. 한국에는 붉은 주사 파시스트들이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어리석게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 의해 침범당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가장 크게 위협한다고 여기는 것을 파괴하는 일에 특히 능한 자들이다. 이들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좌파이다.
68운동이 유럽에 남긴 것은 좌파 내부의 분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역설적인 표현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른바 ‘제도화된 대항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68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동(실천) 속에서 의식의 변화를 통한 자기해방’이었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을 상실한 이상 그것을 사회 안에 뿌리내리게 할 제도의 투쟁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구상은 반권위주의적 대안학교, 대안작업장, 도시구역 프로젝트, 자치공동체의 실험이나 대안언론의 창출로 나타났다. 운동보다 저항정보를 담은 매체들이 더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나 대중으로부터 지식인 사회로의 후퇴는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잉그리트 길혀 홀타이는 “사회는 주소가 없다. 사회에 대한 요구는 조직으로 보내야 한다.”는 니콜라스 루만의 말을 인용하여 68운동이 남긴 교훈에 대해 말한다. 다른 사회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켜 낼 조직이란 것이다. 그것이 비록 68운동이 극도로 혐오했던 것일지라도 조직 없는 개인은 그저 개인일 뿐이다. 68운동은 조직(관료주의 혹은 권위주의)에 대한 혐오를 조직하거나 혹은 조직적인(?) 혐오를 통해 기존 체제의 바깥을 상상하고 ‘다른’ 사회의 건설에 있어 필요한 구조적 전제조건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강조한 것은 개개인의 ‘자기 결정’이었다. 잉그리트 길혀 홀타이는 마치 게바라의 말처럼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었던 자기 결정의 딜레마 속에 좌충우돌하다 실패로 끝나버린 68운동의 여러 국면들을 차분하게 짚어간다. 역사학의 범주에서 68운동, 68혁명은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리얼리스트들에겐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