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문화:스타일의 의미
딕 헵디지 지음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1998년 11월
전문출판사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리는 출판사들이 있다. 최근엔 출판사들이 자사 브랜드를 만들어 종합출판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자신들만의 전문 분야를 만들어 그 방면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들 만큼 소중한 존재도 드물다. 문학분야의 전문출판사들이 비교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편인데 반해 비문학분야의 출판사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예를 들어 서광사의 경우엔 자타가 공인하는 철학분야의 전문출판사이고, 혜안의 경우엔 역사분야의, 출판된 종수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긴 하지만 공연예술 분야와 문화 분야에 괜찮은 책들을 내고 있는 곳으로 현대미학사 같은 출판사도 전문출판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전문출판사라면 한나래, 커뮤니케이션북스, 현실문화연구 등을 꼽을 수 있을 텐데, 그중에서 "현실문화연구"는 출판사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현대의 대중문화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이론서들을 다수 출판하고 있다.
얼마전 논문 주제를 이야기하다가 "하위문화"란 명칭 때문에 몇몇 분들에게 힐난 비슷한 어투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하위문화의 개념을 상위문화 보다 저급한 수준낮은 문화로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웃지못할 에피소드인 셈이다. 출판평론을 하는 분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하위문화(subculture)"란 개념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대중이 즐기는 문화를 일컬어 사람들은 대중문화라고 말한다. 수십억 인류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 속에서 다함께 즐기지만 다른 한 편에선 TV를 바보상자, 영화는 오페라나 클래식 공연에 비해 못한 부류의 예술로 폄하되기 일쑤다. 같은 의미에서 지역의 문화예술회관이 개최하는 공연들은 초대권을 남발해도 객석이 텅비는데도 이명박 전 서울시장 같은 이는 노들섬에 오페라 극장을 짓겠다고 하는데도 이것을 예산 낭비로 지적했다가는 문화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평가될까 눈치를 봐야 한다.
세종문화회관의 위압적인 외관이 주는 느낌에 주눅들어 본 사람은 그 입구부터 슬금슬금 자기 옷매무새를 살피게 된다. 예술의 전당에 가려면 어쩐지 고급 승용차를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예술의 전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에서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가용이 있어야 하고,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찾아오지 안 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곳이 예술의 전당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하철타고, 버스타고 오가는 뚜벅이들이 힘들게 가야만 하는 그곳에 예술의 전당이 서 있어야 할 턱이 없다.
물론 어떤 예술이든 감상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대중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고매한 예술이 되거나 대중적인 수준의 예술이라고 해서 천해지는 것은 아니다. 즉,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이듯, 고급문화의 반대말이 대중문화는 아니란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우아하게 듣고 있는 클래식 공연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상류사회 귀족들의 하품나는 사교만남을 위해 배경음악으로 연주되던 것들이거나 교회의 찬송가에 불과(?)하다. 수십억 인류가 즐기는 대중문화에 대해 연구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겠다는 건, 고도의 사기일 수밖에 없다.
하위문화란 저자 자신이 밝히고 있듯 "지배문화/피지배문화, 자본주의 문화/사회주의 문화, 부르주아 문화/프롤레타리아 문화, 전통문화/ 대중문화" 등과 같은 전통적인 문화구분의 사이에 노정되어 있는 다른 갈래의 문화를 의미한다. 하위문화라는 범주 개념의 설정 자체가 기존의 이분법적 구분들이 지닌 대립항적인 문화문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문화연구 자체가 영국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자들과 연구의 주요대상이 영국 사회의 것일 때가 많은데, 하위문화의 출현 혹은 하위문화라는 개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영국은 전통적인 문화 가치가 붕괴되면서 미국의 대중문화들이 수입되고,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문화적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한다. 노동계급이라는 같은 계급성을 지녔음에도 부모문화가 지녔던 것과 다른 청년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청년하위문화는 부르주아 지배문화에 반발하고,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착취와 문화적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면서 동시에 부모문화에도 저항한다. 이들은 세대의식과 계급의식에 대해 갈등과 순응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위문화에 이분법적인 대립항을 굳이 설정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상위문화, 고급문화의 개념이 아니라 주류문화, 지배문화, 부모문화라고 할 수 있다. 유하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고 말한 시대 이후 우리 사회는 해마다 수많은 부족들이 출현한다. 오렌지족, 낑깡족, 보보스족, 딩크족 등등이 그것인데, 이와 같은 수많은 부족의 출현은 사회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의미겠지만(물론, 우리 사회에서 대개의 부족들은 일정한 소비트렌드를 중심으로 한 소비주체로서만 존재한다. 이것 역시 중요한 문화적 흐름이다), 하위문화적 개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딕 헵디지의 "하위문화"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문제는 "현실문화연구"가 펴낸 이전의 많은 책들이 전문출판사라는 명칭이 무색할 만큼 수많은 오탈자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출간되고 있는 책들은 그런 문제점들이 거의 해소되었지만 예전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몇몇은 정말 읽어주기 힘들만큼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책의 수정판이 나와야 할 듯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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