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
질 네레 지음, 정진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내가 살바도르 달리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아마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나눠주던 "탐구생활" 부록에 딸린 그림을 통해서였을 거다. 혹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달리의 1940년작 "사라지는 볼테르의 흉상이 있는 노예시장"은 시각적 환각을 통한 이중 이미지를 통해 우동이 제작한 볼테르의 흉상이 사람들의 모습을 변한다. 당시 "탐구생활"에는 M.C.에셔의 드로잉 작품들과 함께 이렇듯 시각적 환각 현상의 사례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당시엔 이것이 M.C.에셔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란 사실을 몰랐다. 에셔의 이름을 언제 처음 각인하게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살바도르 달리의 이름이 내게 깊이 각인된 것은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을 통해서였다.
허영만의 "오! 한강"은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에게 이념의 허망함을 계몽해달라는 안기부의 작품이었다. 당시 허영만은 작품 내용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고, 그는 일제 말부터 해방 이후 현대사에 이르는 시기를 담은 대하 서사적인 작품을 완성해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었다. 이 때 살바도르 달리의 1936년 작품 "내란의 조짐 - 삶은 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물"이 "오! 한강"의 중요 대목 가운데 하나인 거제도 포로수용소 장면에 삽입되어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다. 그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었던 그의 동료가 밤사이 살해당해 강토의 손에 죽은 동료의 손목만 잘린 채 남아있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해방전후의 시기에 살바도르 달리의 화집이 이강토라는 변방의 화가 지망생에게 보여질 수 있었을까 하는 논리적 의구는 뒤로 해도 좋을 만큼 그의 그림은 강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천안 공단에 머무는 동안 나는 틈틈이 시내 역전에 있는 서점에 들르곤 했는데 그 때 작은 문고본으로 다시 살바도르 달리의 화집을 구입해 한동안 매우 열심히 보았다. 질 네레가 쓰고, 정진아가 옮긴 "살바도르 달리" 책은 올해(2005년) 6월에 나왔으니 아직 따끈따끈한 책이다. 예전에 언젠가 이야기한 바도 있지만 이 책은 세계 3대 미술전문출판사 중 하나인 독일 타쉔(Taschen) 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마로니에북스란 신진출판사가 기획시리즈물로 내고 있는 것이다. M.C.에셔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의 화집을 이 출판사의 영역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늘 이 시리즈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길 기대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에 접하게 되어 기대가 크다. 타쉔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는 국내 대형서점의 외국서적전문 코너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고전에 속하는 예술가들 건축의 가우디, 르코르뷔지에를 비롯해서 사조별로 팝아트, 미니멀아트, 그리고 모차르트까지 포함해서 현재 100여권의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10여개 국가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이번에 국내판 1차분엔 고흐, 카라바조를 비롯해 그간 아는 이들만 알고 있던 에드워드 호퍼도 포함되어 있다.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어로 "엘 살바도르(El Salvador)"는 "구세주"란 뜻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격언 아닌 격언이 있다. 아마도 그 말은 많이 알고, 익숙해지면 할수록 좋지 않은 측면들을 많이 접하게 되어 실망하게 될 것이란 예측을 담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게 되면 알수록 별로 정이 안가거나 좋아하기 어려운 측면들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살바도르 달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라고 말했던 사람, 어려서부터 스스로 천재가 되고 싶었던 사람, 결국 어느날 스스로 그 비법을 깨우치고 "오, 살바도르, 진실을 알았구나! 바로 천재인 척 행동하면 천재가 된다는 것을!"이라고 외쳤다는 사람을 쉽게 좋아하기란 어렵다.
스페인 사람들 가운데 카탈루냐 사람들은 스스로를 스페인인이기 이전에 먼저 카탈루냐 사람으로 인식한다. 달리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평생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카탈루냐 사람들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카탈루냐 헤로스 지방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 아버지의 아들로 1904년 5월 11일에 태어났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보였고, 1918년엔 피게라스 시립극장에서 열린 그룹 전시회를 통해 평론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1921년 2월 어머니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같은 해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해 이곳에서 그와 평생을 두고 우정을 나눌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루이스 부뉴엘 등과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교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해 동안 정학을 맞은 뒤 결국 1926년 퇴학당하고 만다.
달리가 트리스탄 차라와 폴 엘뤼아르의 눈에 띄게 된 것은 우습게도 그의 회화작품이 아니라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스스로를 초현실주의의 구세주로 자부했다. 하긴 달리에겐 동향 출신의 선배 화가 피카소조차도 우스운 존재라고 여겼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직 그가 도달할 수 없는 먼거리에 있었기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지만. 192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이론가이자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초상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달리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 엘뤼아르의 아내는 갈라였으나 그림이 완성된 뒤에 갈라는 더이상 엘뤼아르의 아내가 아니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유혹했고, 아니 이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그런 류의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불꽃이 튀었고, 갈라에겐 절대적 경배자가 필요했고, 달리에겐 어머니가 필요했다.
비록 살바도르 달리의 아버지는 이런 사태에 직면한 뒤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자식과 의절해버리지만 달리에겐 갈라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모두가 갈라라고 불렀던 "엘레나 디미트로브나 디아코노바"와 잠시 해변의 절벽 위를 산책하던 중 달리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그녀의 발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달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진지한 사랑을 고백하고자 했으나 미친듯이 터져나오는 웃음 탓에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다. 대신 갈라가 말했다.
"내 작은 꼬마! 우리 영원히 헤어지지 말아요."
갈라는 살바도르 달리가 평생을 두고 획득한, 얻어내려 했던 모든 속물적인 명예, 돈에 대한 집착, 세속적인 성공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것들을 그에게 주었다. 물론 갈라 역시 달리 못지 않게 이것들을 얻고자 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질 네레의 이 책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한 권을 통해 우리가 이 복잡하기 그지 없는 한 명의 예술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좀더 많은 자료들을 접해야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걸음을 시작하는데 이 책은 나름대로 좋은 선택이다. 미리 알려드릴 것은 이 책은 살바도르 달리란 한 예술가의 전기이거나 평전의 성격보다는 그의 생애를 적당히 삽입한 작품론에 가깝다는 점이다. 가격이 12,000원으로 올컬러 화집치고는 저렴한 편이고, 판형도 적당한 편이다(가로 185㎜, 세로 230㎜ 규격에 96쪽 분량). 다만 삽입된 도판의 크기가 충분히 크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특히 개인적으로 달리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 그의 1966~67년 작인 "참치잡이"는 펼친 페이지를 이용해 좀 더 큰 도판을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그것이 저렴한 화집 시리즈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닐을 뜯어볼 수도 없게 포장된 큰 화집을 구입할까말까 망설이는 분들이라면 단연 이 책을 먼저 권해드리고 싶다. 크게 성공할 가능성도 적지만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