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태인에게 천사는 '샬롬'이라고 말하지, '팍스'라는 로마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총독이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보병군단의 군기를 치켜들 때, 그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지 않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를 봅니다. 그는 그 도시에 법과 질서를 부과합니다. '샬롬'과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같은 장소, 같은 때에 존재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아무 것도 공통적인 것이 없습니다. - 이반 일리치(Ivan Illich),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 <녹색평론>, 2002년 1-2월, 통권 제62호
토다 키요시의 『환경학과 평화학』은 지난 2003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평화는 공통의 요소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라는 의문과 더불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환경학과 평화학이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었다. 환경학과 평화학을 하나로 연결해줄 수 있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다 읽은 뒤에야 나는 환경학과 평화학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직접적으로는 '폭력'이며, 구조적으로는 '자본주의'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경학과 평화학』은 모두 5장에 걸쳐 국가와 기업의 구조적 폭력, 전문가 지배나 젠더의 문제를 포함한 구조적 폭력에 관한 문제 등을 ‘폭력과 평화’란 문제의식으로 치환해서 분석하고 있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토다 키요시는 폭력은 인류의 본능이 아니라 문명(생산력의 발전)으로 비롯된 과잉생산의 수익을 구조적으로 독점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생명경시, 성과 인종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폭력문화의 문제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폭력은 인류의 노력으로 줄여나갈 수 있으며, 21세기는 ‘평화와 환경의 세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다 기요시는 평화학의 선구자 요한 갈퉁의 개념을 이어 받아 폭력에도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폭력’과 ‘구조적 ․ 간접적 폭력’이 존재하며 이 두 가지 폭력의 방식을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접적 폭력에는 명확한 주체가 있고, 구체적인 피해자가 있지만, 구조적 폭력은 피해 대상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다고는 해도 폭력의 주체는 매우 모호해지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무이다. 구조적 폭력은 사회구조가 가져온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은 전쟁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쟁을 점점 더 공업화, 무차별 테러화하고 있다. 수많은 제왕들이 왕국을 건설하며 주장해온 “한 명의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만 사람을 죽이면 왕이 된다.”는 역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테러, 전쟁, 사형 등은 국가와 같은 공적 조직이 수행하는 대표적인 폭력이라는 것이다.
토다 키요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죽음을 불러들이는 군수산업과 담배산업, 다국적 기업의 구조적 폭력(환경파괴)에 대해서도 폭력의 개념을 빌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군수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로서 그 자체는 살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생산되는 상품의 목적이 오로지 사람을 살상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구조적 폭력에 해당한다. 군수산업의 기술혁신은 구식무기의 재고를 처분하고, 신식무기를 전장에서 하루빨리 실험해보도록 유혹한다. 군수산업자본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정치헌금을 제공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담배회사의 의도 역시 이윤추구이지 건강파괴는 아니다. 그러나 그 유해성을 알면서도 생산해내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 광고까지 하는 것은 ‘미필적 고의’이며 기업테러라고 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앞의 글에서 “존 F. 케네디는 빈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주의자들은 평화를 위한 '전략'(문자 그대로의 전쟁 계획)”을 짠다고 말하면서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공격성(폭력)에서 출발하는 언어들로 묘사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공격성의 언어들로 묘사되는 평화 속에 진정한 평화는 자리할 수 없으며 평화의 진정한 의미는 은폐되고 만다. 갈퉁은 단지 ‘전쟁의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라고 부르고, 행복이나 복지, 번영이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 불렀다. “적극적 평화란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다. 평화가 환경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궁극적으로 발전주의, 성장주의의 욕망에 의해 평화와 환경이 긴급하게 위협당하는 현실에 처했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궁극적인 폭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선진국이,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는 세계사회의 불평등한 구조가 ‘전쟁에 의하지 않는, 피할 수 있는’ 메가데스(백만명 단위의 사망자)를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자원을 낭비하는 선진국 사람들에게 가해의 의지는 없다하더라도 이것은 전형적인 구조적 폭력이다. 그렇기에 전쟁의 부재로서의 평화는 ‘소극적 평화’에 불과하며 인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적극적 평화란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이 가난한 빈국이라거나 개발도상국이란 핑계로 외면할 수 없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치지만 지금 우리가 못 사는 것은 대한민국이 벌어들이는 금액이 적은 탓이 아니라 우리가 버는 만큼 서로 나누지 못하는 탓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