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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16-01-11 16:57:44, Hit : 1946, Vote :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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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남 - 나의 문화편력기

나의 문화편력기 - 기억과 의미의 역사
김창남 (지은이) | 정한책방 | 2015-12-25

1.

이 책은 나의 석사 지도교수인 스승 김창남 선생님이 오랜만에 펴낸 단독저서다. 그간 수요일마다 축구하시랴, 더 숲트리오 활동하시랴, 글쓸 시간이 많지 않으셨을 텐데 언제 이렇게 긴 글들을 쓰셨는지 모르겠다. 그런가하면 이 책의 출판사인 '정한책방'은 내 대학원 후배이자, 내가 이들 부부의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천정한 내외와 그 아들 하림이 향후 먹을거리와 깊이 관련이 있는 직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이 나오는 과정을 전후해 꾸준히 지켜봐왔으니 이 책은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체험을 위한 제품 대여 및 원고료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따위의 파워블로거 리뷰까진 아니어도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점 미리 밝혀둔다. 그러거나 말거나....

2.

드라마 <허준>에서는 스승 유의태가 임종에 이르러 제자에게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역사학자들은 허준과 유의태는 시간적으로 다른 시대의 인물이며 역사적으로도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원래 유의태란 인물은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 속 명의라기 보다 민중의 구비문학(설화) 속에서 명의로 표상되는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유의태는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부활했다.

두 해 전부터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을 하고 있다. 교양학부에서 겸임교수란 이름으로 한 학기 동안 '책의 문화사'란 강의를 하고 있다(그렇다고 모교 지도교수님이 불러서 강의 하라고 한 자리 내준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란다). 강의를 조금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하고픈 욕심이야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품는 마음일 테지만, 막상 강의를 하다보면 공통된 문화경험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런 것은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교수님들이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런 책을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엔 다들 영화라도 열심히 봤기 때문인지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하면 그럭저럭 통했는데, 지금은 영화 이야기를 해도 강의실에서 한 30%나 그 영화를 보았을까 말까 싶다. 케이블TV에서 그토록 지겹게 해준 영화들조차 보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 드는 비유인데, 그 비유부터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을 단지 세대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 쉬운데, 내가 몇 년 사이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물론 이것을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같은 세대 내부에서도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동시대의 비동시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3.

<나의 문화편력기>는 '박정희 시대 지방 소도시 소년의 일상적 삶'에 대한 회고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이고, 공간적으로는 '지방 소도시'에서 펼쳐진 한 소년의 '일상사'가 기록된 '성장연대기'이다. 글의 내용은 성장순서에 맞춰져 있는데, 1부 <애국 소년의 탄생>은 어린이 시절의 이야기이며, 2부 <유신시대의 사춘기>는 청소년기의 이야기이다.

시간순으로 1부와 2부 모두 박정희 시대이지만, 전반부는 유신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각 부는 '출판매체, TV, 영화, 음악' 장르로 나뉜다. 이것은 그의 연구영역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떻게 대중문화연구자가 되었는가란 과정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최근에 하나의 트렌드로 진행되고 있는 <응답하라>류의 복고트렌드와 의미가 통하면서도 드라마가 단지 풍문이나 배경으로 처리하고 있는 당대의 중요한 정치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역사는 기억과의 투쟁이며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대중과 지배계급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대중문화를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볼 수는 없지만, 대중문화를 통해 순치된 역사는 때때로 그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 에릭 홉스봄은 "역사를 신화와 날조로 바꾸려는 이러저러한 시도들은 단지 나쁜 지적 농담으로 그치지 않는다. 결국 이것들은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을 결정한다."라고 했다.

4.

그런 의미에서 김창남 교수의 <나의 문화편력기>는 매우 소중한 저작이다. 이 책의 부제는 '기억과 의미의 역사'이다. 이때의 '기억과 의미'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문명과 미개를 문화로 오인해서 하는 말이다. 문화는 그 같은 높낮이가 없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억과 의미'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런 의미에서도 단순한 복고(retro) 취미나 회고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연구 1세대의 가장 중요한 연구자 중 한 사람인 김창남이 선별한 당대 문화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에세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강점이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된다. 우리 근현대사의 여러 지점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취약한 지점 중 하나가 지식인들의 회고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날 것 그대로의 개인 체험과 문화연구자로서의 감식안이 함께 곁들여져 있다. 아마 이 책이 대중문화연구서로 쓰여졌다면 사람들은 이 책을 쉽게 읽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쉽고 재미있다. 거기에 개인적인 경험담까지 녹아있으며 자신의 감상도 스며들어 있다. 이 생생한 증언들로부터 앞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마치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그의 시신을 부검하라고 내준 것처럼 스승은 그의 후배들에게 자신의 기억과 의미를 맘껏 퍼가라고 내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