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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25-03-27 10:59:56, Hit : 50, Vote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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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 경상도의 딸들은 왜 진보가 되었나』

『우리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 경상도의 딸들은 왜 진보가 되었나』 | 안지은·전윤채 | 걷는사람 | 2024

이 책을 읽고 나도 모르게 야릇한 탄성이 나왔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책이라니.”

살다보면 사는 게 뭔지 자꾸만 잊게 된다. 12·3 계엄, 내란 사태 이후 한껏 들뜬 마음이었다. 계엄이 발령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짐을 챙겨야 하나 싶은 마음이었다가 이것을 시민들이 막아내는 것을 바라보며 또 희망을 품었다.

때마침 『고등학생운동사』(동녘)란 책도 엊그제 나왔지만, 나는 그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으로 참가했었다. 87년 대선을 전후한 시기에 겪었던 경험은 평생의 상처이자 내게는 세상을 읽어내는 척도(尺度)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희망을 거는 모든 일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몸소 깨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7살 나이에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남았다.

언젠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세상 모든 것에 절망하면서도 희망을 거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산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도처(到處)의 절망에도 굴하지 않고, 일말(一抹)의 희망을 거는 일이다. 세상이 나쁘게도 변할 수 있다면, 세상은, 사람은 좋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변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거는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결국 살아가는 일, 살아내는 일 말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랴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 또래들은 일명 ‘개팔구’라고 불린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직행한 이들이 89학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떠돌이 생활 3년만에 대학에 진학했기에 92학번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들인 지은과 윤채가 92년생이다. 내가 산전수전 끝에 간신히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 아빠와 결혼한 후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된 시집살이였다. 그 당시 시집살이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누구나 시집살이를 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난 1992년은, 여자아이를 임신하면 낙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성별을 알려주는 것은 금지시킨 때였다. 엄마가 임신한 첫 아이가 딸인 것을 알자, 첫 아이는 아들이어야 한다며 낙태하라고 말한 친할머니.
엄마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지금 우리 세대가 ‘여성 혐오’라고 치부하는 것들을, 혐오가 혐오인지도 모른 채 ‘사회 풍토가 그러니까’로 퉁치며 비판적인 사고 없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삶의 기준으로 삼던 시대. ●

살다보면 자꾸만 뭔가 잊게 된다. 내가 살았던 그 시대가 그랬다는 사실은 물론 올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잊게 되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까먹고, 결혼기념일을 망각한다. 당장은 잊지 않아도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게 된다. 그래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새순이 돋으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은과 윤채가 서로 엇갈리며, 마주 보며 써내려간 글들은 봄날의 새순같이 싱그럽다. 그건 분명 이들의 나이가 어리다는, 피할 수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모두 8장, 여덟 가지 주제를 통해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갓 삼십대에 접어든 젊은 두 여성 글쟁이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현 시대 우리 젊은이들이 처한 고단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이를 무조건 부러워하거나 무조건 철없게 느끼거나 또는 그 고단함에 대해 두둔하고 나서기 십상이지만, 이들이 말하고 있는 주제들, 예를 들어 ‘연애와 결혼’, ‘고향’, ‘여성’, ‘부모님 세대’, ‘주거’,‘밥벌이’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두 사람은 엇갈리며 때로 마주하며 하나의 주제에 대한 이야기(에세이)들을 대화처럼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세계는 한 편으로 꽃밭이자 또 다른 한 편으로 폐허인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여덟 개의 이야기, 두 사람이 썼으니 16편의 이야기는 92년생 잔나비 띠 여성이 일상에서 서로 기대어 나누는 우정의 이야기, 2030세대 젊은 청춘들이 맞닥뜨린 어둡고 힘든 사회 현실의 이야기, 그럼에도 이 폐허 속에서 꽃이 피길 기다리는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계엄은 짧았지만, 내란은 길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란 상황이자 내전 상태였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도시와 시골, 서울과 지역, 젠더 등등 우리는 다툴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다투고 있었다.

한편으로 어둡고, 한편으로 힘들지만, 어쩐지 이들의 글을 읽으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보이는 기분을 얻었다. 내란을 전후해 국가, 민주주의와 관련한 많은 책들이 내 주변에서 수없이 이야기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책 말고 차라리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의 사랑과 관심, 우정을 아무 곳에나 흘리지 마시라. 대신에 이들이 쥐고 있는 한 줌의 꽃씨에 그 친절을 베풀고 함께 연대하는 마음을 품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