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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로의 초대/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12월
1. 중세의 빛과 그림자
얼마전 "페르디난트 자입트"의 저서 "중세의 빛과 그림자"를 서양중세사의 입문서로 추천한 적이 있다. 최근 나는 서양 중세사에 대한 책들을 중점적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서양 근대, 현대사에 대한 도서에 편중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서양 중세사에 대한 호기심이 작동한 탓도 있다. 페르디난트 자입트도 독일 출신이고,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중세로의 초대"의 저자 "호르스트 푸어만(Horst Fuhrmann)" 역시 독일 슐레지엔에서 태어나 게르만 중세연구소의 소장으로 20여 년 동안 중세원전간행사업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책이 다루는 내용도 주로 독일 중심의 중세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전의 책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일종의 입문서, 개론서로서 다소 읽기에 딱딱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책은 상대적으로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인생관과 생활방식은 이 책의 전체를 개괄하는 총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1부에서는 중세를 규정하고, 당시의 세계관, 가치관을 점검한다. 그리고 중세를 규정할 수 있는 요소들 - 중세를 이루는 중세적인 것들 - 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중세인의 삶과 죽음에서 고통 속에 자행된 유아 살해, 어린이 양육, 평균수명, 의복, 굶주림, 신의 형벌과 로마 제국의 의미, 중세 지상 최고의 권력자였던 교황과 황제, 교회와 이단, 그리고 중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사(Knight)의 이중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사는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장비와 전투력면에서 기사 100명이 보병 1000명과 맞먹는다는 평을 들으며 중세 전투의 대명사가 되었고, 아랍의 기마부대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은 유럽 침공을 저지한 투르 프와티에 전투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기사 1인을 양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고, 일종의 상비군이 필요했던 카를 대제는 부유한 농민들과 교회에 이들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의 책무를 맡겼다. 결과적으로 중세 봉건제의 토대가 된 장원제는 이들을 위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부유한 농민들은 기사계급이 되고, 귀족이 되었고 기사계급은 혈연에 따라 계승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귀족제와 결합하면서 기사의 전투는 점차 양식화되어 갔고, 보병, 궁병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무거워진 기사들의 장비는 기사들의 군사적 가치를 점차 줄어들게 만들었다. 종종 기사들은 싸움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평민 중심의 전투력인 보병과 궁병의 난도질에 희생당하기 시작했다. 중세의 몰락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1부에 매료되었다면 나머지 부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의 도입부는 매력적이고, 중세의 의미, 특징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2. 중세시대의 사람들의 죽음은 곧 삶이었다
'제2부 중세의 위대한 인물들'에서는 생전에 '대제'라는 칭호를 얻었던 유일한 중세인 '카를 대제'와 우리들에게 카놋사의 굴욕으로 잘 알려진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 왕은 아니었으나 왕과 흡사한 권력을 누렸던 사자공작 하인리히의 생애에 대해 말한다. 제1부가 중세를 살아간 다양한 계층의 익명의 다중들을 다루었다면 제2부에서는 중세의 대표적인 권력자인 황제와 교황 그리고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던 귀족의 대표적 인물들을 통해 중세의 권력 관계를 조망해보고 있다. 저자 호르스트 푸어만이 "중세로의 초대"를 얼마나 치밀하게 기획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2부를 통해 중세의 황제, 중세에도 여전히 찬미 받았던 로마제국이 어떻게 신성로마제국으로 계승되는지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독일의 분열과 재통합의 열쇠가 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중세는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중세는 죽음이 삶과 혼재되어 있었고, 인간의 존재는 삶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역시 태어난 날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이른 순간은 기록되어 있다. 교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황제 하인리히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이 말에 감동해 그레고리우스7세를 나의 영세명으로 삼았다. 그는 1085년 5월 25일 죽었다.
이 책을 그간 중세를 다룬 다른 책들과 가장 두드러지게 하는 부분은 3부와 4부에 있다. '제3부 신의 대리인, 교황'에서 우리는 민족과 국가, 왕실과 귀족으로 나뉘기 전의 유럽, 중세인을 통솔했던 가장 큰 권력자. 가톨릭의 수장 교황 성하를 알현하게 된다. 중세를 지배한 가장 큰 권력은 황제와 교황이었다. 하지만 중세의 교황은 황제와 결탁하여 세속의 통치권을 얻었고, 이들은 서로 대립하거나 타협해 가면서 중세의 통치권력을 계속해서 행사했다.
"지상의 권력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중세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균일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았으며 국면별로 긴 휴지기가 있었다. .....(중략)...... 특히 법학자, 신학자들이 주축이 된 전문 집단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리고 학자들 곧 '7자유학문(문법, 수사학, 변증법, 대수, 기하, 음악, 천문학)'을 가르치던 사람들에 속했던 철학자들도 여기에 끼었다. 덧붙여서 중세 전성기 이후로 점점 뚜렷해지던 교회와 국가의 제도화 과정도 한 몫했는데, 이러한 제도화는 신의 의지에 근거한다는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교회가 곧 국가였다" 그러나 자유학문을 배운 인간들(인문학자)은 제도는 신의 의지에 근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점차 교회에서 국가를 분리해냈다. 대신에 절대왕정 시대에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신에게 위임받은 것으로 주장(왕권신수설)하기 시작했다.
3. 세상은 속고 싶어한다(Mundus vult decipi)
호르스트 푸어만은 중세의 최고 통치 권력자 중 하나였던 교황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까닭은 중세의 이중적인 권력 체계에서 황제를 능가하는 전유럽적인 권력, 실질적으로 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고의 권력은 역시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최초의 교황 베드로부터 시작된 교황이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런데 로마 주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임명하면서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하면서 로마 사람 클레멘스를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위조된 편지에 들어 있었고, 이것이 진짜가 아니란 사실은 아주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언제나 인용되고 있다. 이 부분은 다시 4부에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제4부 위조의 시대'였다. 그것은 어떻게 한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그것도 중세 1,000년의 역사를 위조의 역사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저자의 혜안에 이마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앞서 베드로가 로마인 클레멘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그들이 대대로 이어진 로마교황청의 교황이 되고, 다른 신부들, 다른 성직자들 보다 상위에 서게 되는 권위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중세가 얼마나 엄청난 위조의 시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어쩌면 중세의 문서 전체가 위조일지도 모른다"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중세의 사람들은 그토록 도덕성이 결핍된 이들이었던가? 토마스 만은 중세에는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은 세계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고 말하고 허구와 전설이 실질적인 작용을 하던 시대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위조란 것은 형식의 위반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규정되고 객관화된 법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조는 중범죄로 다스려지고, 법조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따지기 위해 전문적인 지식을 요할 만큼 구문 자체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그러나 중세는 이와 다른 시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세의 사람들은 법은 곧 신의 명령이었다. 법은 인간이 규정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인간에게 내려온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법이 곧 정의는 아니지만, 중세인들에게 법은 곧 정의였다. 그러므로 법조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정의만이 법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법령 안에 적힌 내용이 제 아무리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세적 가치 판단에 의해)불의라고 판단되면 효력을 잃었다. 중세의 정의는 개인적으로 느낀 정의와 일반적인 도덕성이 합쳐진 개념이었다. 즉, 오늘날엔 판결이 내려지기 전엔 누구나 무죄로 추정되는 법 원칙이 설령 여론이 느끼기엔 확실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지켜져야 하는 시대이지만 중세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세를 지배하던 체제는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신의 섭리가 합당하게 일치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질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가령 11세기 교회에서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한 번 더 성수를 뿌리는 것을 낭비로 여겼다. 그러자 얼마 뒤 초대 로마 교황 클레멘스1세가 썼다는 편지 한 통이 나타났고, 그 편지엔 이런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중세의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해낼 수 있을 만한 지각이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위조는 범죄겠지만 신의 영역에서는 그것도 진리라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속고 싶어했고, 그리고 기꺼이 속아주었다. 예수 사후 수백여 년, 거의 천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짊어졌던 십자가의 목재부스러기와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던 아마포 천쪼가리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기꺼이 믿음의 증거로 삼았고, 수도원은 이런 예수나 성인의 물건들을 신주처럼 받들었다. 설령 누군가가 이것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효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이단이냐? 그렇지 않은가라는 것 뿐이었다.
4. 중세로의 초대와 근대 유럽으로의 전이
호르스트 푸어만은 스위스 바젤 출신의 역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에게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명저를 남긴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유럽의 고전문화와 정신을 수호하고자한 예술사학자이기도 했다. 호르스트 부어만은 중세를 단순한 시간적 흐름 속에 놓인 중세가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신적 고향으로서의 중세유럽으로 부활시키고 싶어한다. 그런 까닭에 중세는 인간의 영혼이 멈춰 선 암흑기가 아니라 인간이 그들의 숙명을 신이라는 거울에 처절하게 비춰 본 시대로 그리고 싶어한다. 인간은 그렇게 신과 대면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해나간다. 오늘날 서구 유럽의 특징 같은 개인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뿌리는 중세 유럽에 기원한다.
서구에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시기는 15세기 무렵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 시기의 인간은 중세의 어둠을 뚫고,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 부르크하르트였다. 호르스트 푸어만은 이 시기를 더 중세의 암흑기로 끌어당긴다. 단순히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에 발견되었다는 존재로서의 '개인'은 사실 중세에 이미 발견되고 있던 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 - 르네상스 시기에 비로소 개인이란 개념이 형성되었다 - 을 반박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의 주장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에서 중세에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했으며, 중세의 기독교가 반드시 한 개인의 '개인성 발현'을 가로막은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호르스트 푸어만의 이 책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중요한 중세사학자이지만, 중세에도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기독교라는 중세를 지배한 거대한 정신적 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생각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재미있는 책이었다. 단순하게는 중세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넓혀주는 측면과 함께 중세의 시대 정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측면까지 폭넓은 재미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페르디난트 자입트의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교과서라면 이 책은 그에 대한 참고서로 읽을 만하다. 이 책은 중세의 유럽사에서 근대의 유럽사로 넘어가는 가교 구실을 하면서 동시에 중세 유럽의 여러 역사들과 정신사, 문화사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도 충실하게 해주고 있는 책이다. (유럽의 중세 읽기를 위한 책의 리스트에서 언젠가 별도로 밝히겠지만 동문선에서 나온 '자크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요한 호이징하'의 "중세의 가을",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죽음의 역사", '죽음 앞에 선 인간" 등을 읽기 위해 사전에 읽어둘만한 책이면서, 그것과 상관없이도 읽어둘만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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