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 세상을 바꾼 책/
한상범 지음 / 이끌리오 / 2004년 1월
깐깐한 법학자. 한상범 선생과의 쪽팔리는(?) 만남
직업상의 이유로 본의 아니게 소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사람들을 지근거리에서 만나게 되거나 카메라에 담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혹은 그냥 책으로만 접하게 되던 이들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가 종종 있다. 그건 대학 때도 역시 종종 경험하게 되었던 일이긴 한데, 유명한 사람일수록 환상이 많아서인지 그런 환상체험이 순식간에 깨지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많았음을 밝혀둔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내가 나름대로 유명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 한상범 선생과 나름대로 얽혔다면 얽힌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다. 물론, 나쁜 얘기라면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어찌되었든 난 이 분을 존경한다.
2002년의 일이었다. 한상범(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선생에게 당시 "의문사 문제와 개혁"을 주제로 강연을 청탁한 적이 있는데, 그 강연 모임의 강사 선정부터 섭외와 진행을 내가 맡았다. 당시 한 선생께 강연 내용의 간단한 요지를 부탁드렸었는데, 한 선생은 전체 강연 내용을 미리 작성해서 보내주셨다. 그런데 그 사이 뭔가 착오가 생겼는지 한상범 선생은 강연 내용이 미리 프린트되어 강연참석자들에게 회람되는 줄 아셨고, 우리는 그럴 계획이 원래부터 없었다.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청중에게 이 내용이 프린트되어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그런 이유가 없었다면 강연 내용을 미리 부탁한 의도가 무엇인지 아프게 지적하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였다. 나로서는 섭외부터 진행을 맡았기 때문에 일종의 공개망신을 당한 셈인데, 어쩐지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착오라면 착오고, 실수라면 실수이므로 그냥 눈 감고 넘어가도 되는 일이었지만 당신은 그것을 명확하게 하고 싶으셨던 걸 게다. 강연 내용 자체도 민감한 것이었지만,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도 연로한 분들이 많았던 탓에 분위기가 우호적이지는 못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어떤 분이 일어나 질문을 던지길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엄혹한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질문이었고, 그런 질문을 던진 의도 자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면 그런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은 도대체 무어냐? 우리도 죄인이냐?'하는 투의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금서, 세상을 바꾼 책" 서문에서 한 선생은 "나는 큰 수난도 겪지 않고, 어려운 시절을 산 사람으로서, 수난의 상처를 안고 간 선인들에게 항상 죄스러운 마음을 떨칠 길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나름대로의 할 바를 조금이나마 하고자 몸부림쳐왔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조그만 기록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질문 앞에서 겸손한 답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맞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긴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당신의 대답이 기다려졌었다. 한 선생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 분의 대답을 옮기는 것보다 그의 간단한 약력, 그러나 결코 간단치 않은 약력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1964년 한일협정반대 교수단 서명을 비롯해 동국대생 김중태군 시위피살사건 진상규명 교수단조사위원회 간사, 표현의 자유 탄압에 대한 반대운동, 3선 개헌 반대운동 참여, 1970년대 군사정권에 비판적 이의 제기, 1972년 유신 쿠데타 헌법홍보 거부, 1980년 개헌 공청회에서 저항권 및 18세 유권자 제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후 시민계몽 민주화 운동으로 1980년 5.17쿠데타 후 7월 신군부 합수부에 피거되기도 하였다.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조선대 법학과 교수, 헌법재판소 자문위원을 거쳐 지금은 동국대 교수, 한국법학 교수회 명예회장, 아시아.태평양 공법학회 회장, 참여연대 고문, 한국기독교인권센터 실행이사, 인권정보센터 회장,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 있다."(한상범 선생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직은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맡고 있다.)
금서(禁書)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지난 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 "금서(禁書)"는 동시에 필독서였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 '금서(禁書)'란 것은 로마 교황청이 금서목록으로 지정한 책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터넷 홈피의 첫 페이지에 매기는 이름인 "인덱스(index, 색인)"이란 말 역시 원래는 금서목록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처럼 수도사들이 수도원 서장고에서 금지된 책들만을 찾아 읽다보니, 금서목록이 닳고 닳아 이 때의 '금서목록'에서 '색인'(index)이란 말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당명만큼 역설적인 작명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유신시절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유신헌법을 통해 공화정을 정면으로 부정했고, 뒤이어 전두환에 의해 급조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의 지배하던 시절에 우리들은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하던 시절이었나? 우리나라에서도 금서의 역사는 무척 오래된 것이었다. 가령, 조선시대의 양명학 도서들 혹은 이들의 글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이단시되고 심지어는 처형되기도 했다. 그럼, 위정자(권력)들이 금서를 양산해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특정서적(사상)의 내용이 "기성체제(국가나 사회)에 도전하는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한때 그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였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겠다는 마음가짐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인쇄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상이 널리 쉽게 보급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교황을 비롯한 유럽 각 제국의 왕과 제후들은 인쇄기를 등록시키도록 하고, 허가 없이 인쇄할 경우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 시대 금서 중 으뜸의 지위에 오른 책 중 하나가 "성서(Bible)"였던 까닭은 성서에 대한 해석을 오로지 권력자들이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금서가 가장 많이 양산된 시절은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제1공화국 시절엔 극도로 궁핍했고, 전후였던 지라 원칙적인 금서는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인 금서는 별로 없었던 시기였다. 4월 혁명을 맞이하면서 사상의 자유가 마치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 식으로 표출되었지만, 5.16군사쿠테타로 집권한 제3공화국은 원천적인 금서들을 양산하면서 엄격한 사상통제를 실시했고, 뒤이어 유신을 계승한 제5공화국은(사실 공화국이란 말이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온갖 책들에 구실을 붙여 금서를 만들었고, 금서가 된 책들은 오히려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 암암리에 팔려나갔다. 길가던 시민들을 불러 세우고 가방 안을 열어 보이게 한 뒤 금서를 소지하고 있는가 검열하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이 당시엔 읽을 만한 책들 중에서 금서였던 책보다 금서가 아니었던 책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무렵(유신시절) 금서였던 책 중에서 내가 훗날 읽고 감동받았던 책 몇 권을 소개해보자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김병익의 "지성과 반지성", 김우창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 김지하의 "황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신동엽 "신동엽 전집",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 등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던 제5공화국 시절의 금서들은 그람시의 "옥중수고", 박사월(김경재 - 그렇다, 민주당 국회의원 출신의 그 사람)의 "김형욱 회고록", 님 웨일즈의 "아리랑", E.H.카의 "볼셰비키 혁명사",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녹두출판사의 "정치경제학 원론", "세계철학사1.2.3", 지금 노동부 장관이 된 김대환 교수가 옮긴 "자본주의 이행 논쟁", 백산서당의 "경제학의 기초이론", H.마르쿠제의 "해방론", 정인(황광우)의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이오덕 "겨레와 어린이" 등이 있다. 이후 이런 금서 정책은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다가 서서히 해금되기 시작했다.
금서는 사회과학서적이나 사상서적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동엽 시인의 전집이 금서였던 것처럼 당시 창작과비평에서 출간되었던 다수의 시집들이 또한 금서였다(가령, 김지하, 조태일, 양성우, 신경림, 김정환 등). 김산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미국에서 출간된 것은 1941년의 일이고, 그것이 한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8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리영희 선생이었지만,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은 1984년의 9월의 일이었다. 동녘 출판사 사장은 이 책을 출판하고 3개월 동안 잠적해 도망다니다가 결국 기관원에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정식 출간 등록을 할 수 있었던 건 1992년의 일이었다. 금서는 단순히 권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항하는 이들도 스스로에게 일종의 자기 검열을 통해 많은 제약을 가하곤 했다. 가령, PD(민중민주계열)은 주체사상과 관련된 서적들을, NL(민족민주)계열들은 또다른 금서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 관련 저작들이 90년대 이후 사회과학 서적의 밀물이 빠져나간 뒤에 때늦은 손님처럼 나온 것은 80년대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비로소 해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교한 비판을 가했던 칼 포퍼의 책이나, 일종의 어용 작가로 낙인 찍혔던 이들의 책도 심리적 금서에 해당했다. 굳이 양귀자의 소설 제목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들에게 금지된 것은 더욱 소망하게 되기 마련이다.
간혹 독후감을 쓰기 위해 서설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그런 책들은 그 책의 저자와 그 책의 성격이 너무나 밀접하게 잇닿아 있는 경우들이다. 가령, 장준하 선생의 자서 "돌베게"를 읽거나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뒤, 이 책에 대한 서평 혹은 독후감을 한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상범 선생의 책을 현재까지 나는 2권 읽었다. "인권과 권력" 그리고 "금서, 세상을 바꾼 책"이다. 어떤 필자들은 자신의 삶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는 과거 선비들이 몸을 바로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책을 대하듯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온몸으로 밀고 온 생의 흔적을 더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한상범 선생은 이 책의 제1장 "선지자와 금서"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쓰인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저자의 피로 쓴 것만을 애호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당신은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것은 한상범 선생이 그의 피로 쓴 정신을 읽고 있는 것이란 걸 곧 알게 될 것이다.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어떻게 읽었고, 어느 부분은 어떻고 저렇더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당신에 대한 나의 작은 경험담, 당신에게 드리는 내 존경을 표하는 것이 더 합당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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