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세계사 - 히스토리아 문디 5
윌리엄 맥닐 지음, 신미원 옮김, 이내주 감수 / 이산 / 2005년 9월
유럽 문명은 어떻게 중국을 압도했는가?
문명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중국인들은 화약을 발명했지만 그것으로 불꽃놀이를 했고, 서양인들은 대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 이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서구 문명보다 앞서 있었던 동양(중국)이 어떻게 서구에 의해 압도당하는 상황이 되었을까. 이 같은 질문은 제레드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문명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풀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다. 앞서의 이야기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지만 동시에 해답의 실마리를 감추며, 심지어는 몇 가지 편견을 조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국인들 역시 화약을 전쟁기술에 응용했고, 당연한 말이지만 대포를 제작했으며, 이런 이야기는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방법으로 화약을 사용한 중국인들에 비해 서양인들이 본성적으로 폭력적이란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
윌리엄 맥닐은 중국이 제철 및 해운에서 유럽의 기술적 성과를 능가하는 성취를 달성했음에도 이 같은 성취를 영속화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중국사회의 전통적인 체제가 단 한 번도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에서 찾는다.
정부의 명령구조는 맹아단계의 시장경제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때로는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근본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제철업자나 조선업자도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끝내 한 번도 자율성을 갖지 못했다. <본문 75쪽>
맥닐의 지적 속에서 비교적 손쉽게 읽어낼 수 있는 결론 - 중국이 서구에 압도당한 원인 - 은 정부의 명령(혹은 권위)가 언제나 시장경제(즉, 자본주의의 발전)의 발전을 통제하고, 압도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기술적 혁신을 초래할 만한 변화의 가능성(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산업혁명)이 봉쇄되었다는 것이다.
잡다하고 방대한 전쟁의 역사를 일의관지(一以貫之)하는 통찰력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을 가리켜 우리 시대 가장 빼어난 역사가라고 하는데, 역사학계의 실제 평가와 무관하게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 찬사가 적절하다는데 공감할 수 있다. 원제가 “The Pursuit of Power(힘의 추구)”인데 “전쟁의 세계사”란 제목 역시 적절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힘의 추구”라는 원제에 비해 “전쟁의 세계사”가 덮어버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맥닐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이 그의 전작인 “전염병의 세계사(Plagues and Peoples)”와 흡사한 인식 -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그는 인간집단과 미시기생체인 병원균의 상호작용에 비추어 세계사의 주요사건들을 살피려 한 것처럼 - 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사(혹은 군대)가 전문화된 자신의 폭력행위만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사회에서 먹이를 구할 수 있고, 기생하는 일종의 돌연변이 병원체와 흡사하게 파악하는 방식으로 ‘전쟁과 군대 vs. 사회와 역사’를 기술하고자 했다는 두드러진 장점이 돋보이지 않을 위험이 있다.
전쟁을 비롯한 인간의 조직적인 폭력행위에는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양의성(兩義性)이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성은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영웅적 행위나 자기희생, 용맹을 통해 최고도로 발휘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전사들 사이에서 단결의 유대는 살벌할 정도로 강고하다. 저쪽에는 증오스럽고 두려우며 쳐부숴야 할 적이 있고 이쪽에는 폭력행위의 위험과 승리를 공유하는 전우가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집단형성 본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본문 8-9쪽>
인용에서 살필 수 있듯 맥닐은 전쟁에 대한 옳고 그릇된 가치판단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해왔고, 존재해 갈 것이란 필연을 인정한다. 대신에 그는 기술과 군사조직, 사회라는 각기 다른 세 요소가 균형과 불안정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일도양단적인 해결책이나 자포자기적인 급진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자칫 방대한 역사(A.D. 1000-1945 이후)가 만들어낸 무기와 기술의 발전 혹은 소소한 재미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상업적 군대에서 산업적 군대로
“전쟁의 세계사”는 고대로부터 1945년 그 이후에 이르는 역사적 시간들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많은 비중이 실린 부분은 중세와 근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이다. 그는 방대한 역사지식을 활용해 중세의 석궁(石弓)부터 화포에 이르는 군사 기술적 발달에도 주목하지만, 동시에 군대가 사회와 맺는 관계 즉 중세의 상업적 군대(용병)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의 징병제라는 군사조직의 변모도 함께 다룬다.
유럽에서 일부 소수 국가의 주권자들이 조직화된 폭력을 독점하고 그 경영을 관료제화함에 따라 전쟁은 이제 국왕들의 스포츠가 되었다. 이 스포츠의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했기 때문에,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납세자 계급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전쟁에 관여시키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농민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했고, 도시민은 정부와 그 군사기구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공급하는데 필요했다. <본문 217쪽>
위의 인용은 비록 18세기의 군대와 사회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서구에서 전쟁은 오랫동안 지배계급만의 전유물이었다. 민란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피지배계급은 적군이든 우군이든 약탈과 강간의 대상이었지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였던 적이 거의 없었다. 전쟁은 신체적인 역량을 전투에 적합하게 훈련하고, 검과 창이라는 기술적 연마를 거친 프로페셔널한 전사(그것이 봉록을 받는 기사이든 아니면 용병집단이든)들의 몫이었다. 유능하고 뛰어난 군주는 이 같은 전쟁서비스를 직접 판매하는 상인들을 보다 많이 고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를 의미했다.
상업적, 봉건적인 군대조직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계몽주의와 기술적 진보의 산물이었다. 화약의 발전과 총포 기술의 진보는 비록 이전에도 스위스용병의 미늘창이나 영국 젠트리 계급의 장궁에 패한 바 있었지만 중세 최강의 군사조직이라는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왔던 기사 집단(지배계급)을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의 무대에 퇴출시켜 버렸다. 화승총은 장궁보다 먼 거리에서, 장궁처럼 오랜 숙련과정 없이도 누구나 손쉽게 기사들을 한 방에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소총은 오늘날 어린아이들도 다룰 수 있는 총기들보다는 확실히 사용하기 복잡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군대조직은 신병들을 모집해 이들에게 소총의 장전과 발사에 따르는 각각의 동작에 구령을 붙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이 같은 군대 훈련법의 개선은 사실상 ‘과학적 노동 관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테일러주의(1911년)’보다 거의 200년 전에 개발된 것이다. 이 시기에 군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소한’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잔인하고 놀라운 학교가 되었다.
군대는 남성들에게 빡빡하게 짜인 하루 일과, 기상나팔로 일어나 일제히 점호를 받고, 구령과 구호를 외치며 상급자의 감시와 질책 속에서 새로운 행동 패턴(오늘 아침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돌아오는 당신의 하루 일과를 상상해보라.)을 배우도록 했다. 과거의 군대가 전투가 없을 때는 하릴없이 농땡이를 부리거나 인근 마을의 부녀자를 약탈하기 위해 어슬렁거렸다면 근대의 군대는 전투가 없을 때라도 하루 몇 시간씩 일정한 시간에 훈련과 작업을 병행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근대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훈육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적인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 군대다.
가장 합리적인 근대성의 산물인 가장 비합리적인 군대조직과 사회
가장 합리적인 근대의 산물처럼 보이는 군대조직이었지만 군대는 상업적인 판단으로 군비증강을 억제했던 송 시대 이후 - 송은 이민족에게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공물을 바치는 것이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정치 안정이란 측면에서 좀더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 현대까지 그 자체로 가장 비합리적인 인간 본성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 같은 군대의 비합리적 본성은 단순히 군대가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고,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을 학살하는(냉정하게 말해 '국민의 군대'가 이런 행위를 수행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세의 ‘기사도’를 믿는 것만큼이나 환상적이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전쟁의 수행 목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 마치 기업이 이윤을 얻기 위해 - 가장 합리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것처럼 가차 없는 군대조직조차 때때로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유럽의 군사대국이었던 프랑스는 지배계급이었던 귀족을 대신해 평민 계급의 병사들을 일선에 내몬 영국의 장궁부대가 위력적이란 사실을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깨우쳤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 결코 평민 계급을 무장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근대 유럽의 군사강국이었던 프로이센 역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능동적 제휴가 얼마나 막강한 군사력을 발휘하는지 알았지만 인민과 제휴하려 들지 않았다(맥닐의 표현을 빌자면 “루이16세가 인민의 의지라는 호랑이를 타려다가 무슨 일을 당했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도 유럽의 장교 집단은 과거 기사계급의 명예와 자부심을 소중하게 간직했고, 스스로를 평민 계급이었던 사병 집단과는 다른 존재로 치부했다. 이 같은 군대조직 상층부의 인식은 민간기업의 기술혁신을 통한 신무기 개발에 언제나 반보씩 뒤처져 쫓아가는 형국이었고, 이 같은 군대 상층부의 인식은 기술혁신을 먼저 받아들인 국가에 의해 치명적인 패배를 경험하고서야 변모하게 되었다. 그제야 국가와 군대조직은 민간의 기술적 진보를 먼저 받아들이고, 이를 군사기술에 접목시켜내는 것이 전쟁 수행의 목적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길이란 사실을 깨우쳤다. 그런데 문제는 민간의 기술적 진보를 이끌어내는 힘 역시 합리적인 시장, 기업에 의한 것이란 점이다.
전쟁은 어떻게 "Modern"을 발명했는가?
그 같은 인식의 변화, 합리적 목적추구의 최종 결과들이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와 대량살상을 불러들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이것을 논증해내는 것이 맥닐의 책무는 아니다. 다만, 맥닐은 “가장 큰 역설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모든 개별적인 측면에서는 위대하고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시스템 전체는 제어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각 부분이 점차 합리적이고 경영하기 쉽고 예측할 수 있게 되어갈수록 인간의 전반적인 정황은 더욱 무질서하고 경영하기 어렵게 되어갔던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국가 혹은 정부는 군대와 시장경제 위에서 균형을 유지했었다. 비록 시장과 군대를 통제하는 데 때때로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근본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지배계급이 오늘날처럼 직접 기업이나 시장을 소유하는 대신 토지에 기반해 정치권력을 장악했고, 이 같은 권력을 통해 소규모의 생산수단과 시장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배계급은 근대적 합리화의 추구결과로 시장 그 자체가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겉보기엔 그 어느 때보다 군대조직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실상은 군대조직의 정신과 기술혁신의 방법을 내면화함으로써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서부 개척 시대의 기병대는 아파치요새의 PX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전투를 벌였지만, 오늘날의 기병대는 PX주인의 명령을 받아 위스키를 팔기 위해 전투를 벌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기병대원들이 과거에는 일부 소수의 훈련받은 군인들이었지만, 오늘날엔 거의 대부분의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합리적인 목적 - 오늘날 각각의 노동자는 개별적인 주식 투자, 펀드레이징 등을 통해 스스로를 자본가화하고 있다 - 의식에 충실한 기병대원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중세 용병처럼 시장의 논리 아니 시장 그 자체의 합리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지배계급(피지배계급에 속해야 할 노동자들 역시 의식세계만큼은 이들의 충실한 동반자라는 자기계발의 의식개혁을 달성해가고 있으며)이며, 그들이 오늘날 인류공동체를 최대의 위기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