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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푸엔테스 -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서성철 옮김/ 까치(1997)
가끔 우리 문학이 비루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의 주류가 창작에서 비평으로의 이동이 전면화된 이래 작가나 시인들은 비루해 보인다. 그들이 비루해 보이는 이유엔 몇 가지 납득해줄 만한 근거들이 있다. 오래된 변명거리이긴 하지만 문학이 총제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현실이 늘 시대 정신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소가 되새김질 하듯 이 모든 일들을 찬찬히 곱씹어가야 하는 문학의 느린 걸음으로는 도저히 이 흐름을 발맞추어 따라가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최소한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자면 지난 1970년대 근대화의 흐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고는 해도 19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그 이후의 속도보다 빠르진 않았다. 근대화의 속도는 그 무렵이 보다 빨랐을 지는 몰라도 정신적 흐름은 그 이후 점차 가속도가 붙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의 위기가 단지 그런 문학의 총제적 위기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엔 변명 자체가 너무 비루해진다.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그 주된 원인을 작가, 시인들 자신의 소양 부족, 근성 부족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작품이 더이상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엽에 이르는 현재 대한민국 문화계의 모든 역량은 온통 영화판으로 집중된다. 그 단적인 예가 소설가 이창동이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것이다. 메이저 영화사들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극장 배급망을 장악하는 블랙홀 역할을 하면서 생기발랄한 작품들이 급속도로 설 공간을 얻지 못하고 사멸되어 간다. 문학판의 위기가 영화판에서도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아니, 자본의 원심력이 가열차게 가동하고 있는 한, 그곳에서는 보다 빠른 가속을 얻게 될 것이다. 문학판의 위기는 강단권력(비평)이 자본(출판사)권력과 커넥션을 이루어 일부 상품성 있는 작가들을 문단의 주류로 올리면서 본격화되었다. 보다 많은 다양한 작가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은 막혀버렸다.
서구의 이론에 길든 문학비평가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들을 양산하거나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친비평적인(? -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친자본적인, 친권력적인, 상업적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어야 한다) 일부 시인, 작가들이 다시 작품성 있다는(사실은, 상업성 있다는 ) 찬사를 받으며 언론권력을 통해 부각되고, 작가들은 다시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언론권력의 품에 안겨 서로가 서로의 구미에 합당한 글과 비평 기사를 양산해 내는 시스템이 구축된다. 결국 몇몇 인기있는 작가들의 되돌이표 이야기들이 양산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식상한 독자들이 문학을 멀리하게 되고, 독자들이 문학을 멀리하게 됨에 따라 출판권력은 더욱 유명작가들을 짜내기 위해 안달하게 된다. 초판 5만부를 확보하기 위한 피말리는 경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부 상업출판사들은 잽싸게 외국의 유명작가들 작품을 저작권 계약을 통해 입수하여 판매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래저래 한국의 문학은 점점 더 비루해져 간다.
단지 그것만이 우리 문학이 처한 이 비루한 현실의 원인은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우리 작가들의 자질 저하에 따른 것이다. 어느 때보다 많은 자유, 어느 때보다 많은 자료들에 둘러 싸인 시대를 살지만 그네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자신이 처한 세상과 절연하는 것만이(분명, 그것이 한 시대의 유행이긴 했지만)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인양 착각한다. 사회의 부조리에 직면한 젊은 작가, 시인들이 그것들과 절연하는 방식은 사실 지금 우리의 현실만은 아니다. 앵그리 영맨, 비트 제네레이션, 로스트 제네레이션 등등 서구의 젊은 작가들이 택한 것도 이와 유사했다. 그러나 우리처럼 철저하게 골방에 틀어박힌 사례는 없다. 그네들의 광기는 곧 도전이었으나 우리들의 광기는 곧 자폐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보르헤스의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작가가 역사책을 썼다. 한국과 같이 전공자의 밥그릇 싸움이 유난한 상황에서 그의 행위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위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지닌 인문학적 소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에 대고 칼을 가는 작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작가의 폭이 매우 좁다. 신춘문예와 몇몇 공인된(어느 측면에서는 자기들끼리 공인해주기로 밀약된) 잡지를 통해서 등단한 경우만 작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작가들은 마치 고시생들과 같은 코스를 밟기 마련이다. 세상과 고립된 채 골방에서 오로지 문예창작에만 전념한 결과가 오늘의 한국 문학이 답답해진 원인 중 하나라고 하면 너무 한 표현일까? 문학이 세속과 절연된 고상한 것이 될수록 문학은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다. 문학이 세속과 절연된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느낀다면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마르께스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은『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단순히 지리적인 구분으로서의 중남미가 아닌 문화적인 의미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멕시코로부터 칠레에 이르는 나라들의 역사가 아니라 1492년 10월 12일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기 전부터 살아왔던 원주민의 역사가 이후 어떻게 서구와 스페인을 통해 변모해왔는가를 함께 살핀다. 이 책에서 지리적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역사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푸엔테스는 스페인 알타미라의 동굴 벽화에서 미국 LA 뒷골목에 그려진 히스패닉의 그라피티(낙서) 문화에 이르는 스페인과 스페인계 아메리카인들의 수만 년에 걸친 역사를 다룬다. 이 와중에 벌어진 라틴 아메리카의 영광과 오욕, 희망과 좌절의 역사가 한데 펼쳐진다. 이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기대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폭넓은 시야가 보여줄 수 있는 지평이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을 문학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文學, literature)은 인문학(人文學, humanitas)다. 궁둥이는 엉덩이에 붙어 있고, 엉덩이는 볼기에 붙어 있듯 결국 같은 뿌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보여준다. 한국 문학이 비루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이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문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목차
서론 / 7
제1부 성모와 황소
제1장 태양과 그림자 / 15
제2장 스페인의 정복 / 37
제3장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 61
제4장 1492년 : 결정적인 해 / 95
제2부 신들의 싸움
제5장 인디오 세계의 삶과 죽음 / 113
제6장 신세계의 정복과 재정복 / 143
제3부 라 만차의 아이들
제7장 제국의 시대 / 183
제8장 황금세기 / 207
제9장 신세계의 바로크 / 237
제10장 고야의 시대 / 263
제11장 독립을 향하여 / 285
제4부 자유의 대가
제12장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 303
제13장 독재자의 시대 / 319
제14장 독립의 문화 / 341
제15장 토지와 자유 / 367
제5부 미완의 작업
제16장 라틴 아메리카 / 385
제17장 현대의 스페인 / 407
제18장 미국과 히스파닉 /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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