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웅
귀도 크노프 지음, 이동준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0년 12월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책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시리즈물처럼 처리되어 나온 적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판권을 확인해보니 시기적으로 비슷한데 그랬나 싶기도 하다(같은 출판사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란 책(1권 짜리)이 나왔고, 바바라 터크먼의 "독선과 아집의 역사1,2"권이 나온 적은 있다). 어쨌든 그런 문제 때문에 귀도 크노프와 이 책의 옮긴이가 악평을 들을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정확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이 책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고, 게다가 유익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 책 "전쟁과 영웅"은(원제는 모르지만) 제목부터 다르게 붙었어야 한다. 이 책은 마치 퓰리처상 수상 사진 작품집 혹은 타임 라이프 사진집에 실린 포토저널리즘적인 사진의 뒷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별권 격인 "전쟁과 폭력"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쟁과 폭력"은 그나마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가 이 책보다 많다는 점에선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인 귀도 크노프는 역사학자이긴 하지만,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대중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작가이며, 그가 방송토론 진행자라는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이 시리즈 역시 그가 방송 다큐멘터리(ZDF) 같은 것을 직접 진행하고, 연구하면서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것이었던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옮긴이 이동준 씨가 독일에 있을 때 내가 이 책을 인용해 이야기한 것을 보고 메일을 보내와 몇 차례 이메일로 이야기한 사연도 있다. 나름의 깔끔하고 걸리는 대목 없이 넘어가는 번역 덕분에 무척 편하게 읽었다.
이 책이 특히 재미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두 번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인 "유황섬에 성조기를 꽂은 가짜 영웅들" 이야기를 살펴보자. 포토저널리즘, 특히 진실을 보도한다는 일은 여러가지 점에서 제약의 대상이다. 특히나 그것이 전쟁 사진과 같이 여러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일 경우 말이다. 국익과 진실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시시각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문제란 거다. 1945년 2월 23일 제임스 V. 포레스틀 로젠탈스가 촬영한 유명한 사진이 바로 유황도의 영웅들로 이 사진이 준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존 웨인 주연의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 유황도는 일본 도쿄 남쪽 해상 오가사와라 제도에 있는 화산섬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이곳에 공군 기지를 만들어 두었다.
미국 역시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을 위해 이곳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스리바치산 주변에 지하화된 요새를 건설하고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곳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7천 명에 가까운 막대한 인명 손실을 겪어야 했다. 격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스리바치산 정상에 도달한 미 해병대는 이곳에 성조기를 세웠고, 로젠탈스는 그 광경을 촬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진은 전투가 한창 격렬하던 순간에 다른 병사들이 이미 세운 성조기를, 이미 점령이 끝난 상태에서 좀 더 큰 성조기로 교체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전투가 격렬한 가운데 목숨을 걸고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던 병사들을 촬영한 것은 루이스 로워리였는데, 성조기가 너무 작아서 극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점령 후 휘날리는 성조기가 너무 작다고 느낀 부대장이 성조기를 교체하라고 지시했고, 조금 더 큰 성조기로 교체하는 장면이 마치 전투가 한창이던 무렵 용감무쌍한 미 해병대 병사들이 성조기를 세우는 것처럼 보도되어 버렸다.
사진을 보도한 AP통신과 미 국방성은 전쟁 중인 자국 국민들의 사기를 고취하는데 더할나위없이 좋은 장면임을 알고 이를 대대적으로 알렸고, 결국 처음 목숨을 걸고 고지를 점령한 병사들보다 다른 병사들이(그 가운데 한 명은 인디언 출신 병사 헤이즈였는데,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결국 자살한다)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물론 사진작가 로젠탈스가 거짓말을 한 것도, 병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남의 공적을 빼앗은 가짜 영웅이 된 셈이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현대사의 중요했거나 흥미진진하지만 그 뒷 이야기들이 잘 전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1962년 쿠바 위기를 다룬 "13일간의 핵전쟁 위기"를 읽고 나서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13일"을 보았는데, 책과 너무나 흡사한 구도로 진행(물론 영화 자체를 가상 인물을 포함한 다큐멘터리식으로 만들기도 했지만)되어 영화를 보기도 전에 영화 내용을 전부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영국 최대의 섹스 스캔들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틴 킬러 사건,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일깨워주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사이공의 처형집행인"의 처형집행인이 현재는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거나 1973년 베트남의 종군기자 현콩닉웃(Hyun Cong Nich Ut)이 촬영한 사진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의 미군의 오폭으로 화상을 입은 채 벌거벗고 달려오는 소녀의 현재 이야기 같은 것들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함을 넘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냥 묻혀버리기엔 제법 쏠쏠한 재미를 준다. 역사의 뒷 이야기 읽길 좋아하는 분이나 포토 저널리즘에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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