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의 향연
마샬 버먼 지음, 문명식 옮김 / 이후 / 2001년 9월
이 책은 국내에는 "현대성의 경험"이란 다소 딱딱한 한국어판 제목보다 훨씬 아름답고, 명확한 "굳어진 것은 모두 사라진다(All that Solid Melts Into Air)"란 책의 저자 마샬 버먼이 맑스를 주제로 한 서평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 관계로 이 글을 읽는 내내 나는 꽤나 유쾌했던 기억이다. 이제 머리가 희끗해진(하긴 그의 머리는 오래전부터 반백이었다) 교수님과 즐겼던 지적 향연의 한 토막이 어제부로 막을 내렸다. 나는 지난 주에 구태여 피에르 부르디외를 젖히고 교수님 자신이 평소 주장해왔던 "청년문화론"을 가지고 종강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우겼고, 그 덕으로 우리는 "청년문화론"을 가지고 마지막 강의에 임했다.
발제가 끝나고 시작된 세미나에서 나는 선생의 평소 지론을 다소 신랄하게, 그리고 내 나름의 선량한 악의를 품고서 달려들었다. 한 학기 내내 나는 강의 시간에 침묵했었기에... 그리고 학생들 모두의 발언이 끝난 뒤 갈기갈기 찢긴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꼰대라고 불려도 하는 수 없다. 지금까지 계몽주의자로서 살아왔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계몽주의자로 살다 갈 생각이다." 짧은 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종종 세상의 모든 이론을 무화시킬 진리를 찾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유치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결국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먼저 머리로 생각했던 탓이다.
그리고 한 시절이 흐른 뒤에 나는 비로소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무슨무슨 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옳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단 사실이다.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의 원제는 "Adventures in Marxism"이다. "맑스주의의 모험"이라고 번역되어야 마땅할 이 책의 제목이 구태여 "향연(Symposion)"으로 바꿔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쩐지 나는 그 대목부터 이미 힘이 빠진다. 종종 "아직도 맑스?"란 비아냥 섞인 질문을 받는다. 정작 맑스 자신은 스스로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부인했다는 말처럼... 그런 경우에 나는 늘 이렇게 답한다. "아직도 맑스!" 마샬 버먼의 문제 의식은 맑스의 문제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성의 경험"에서 그가 이미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맑스로 돌아와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는...
요 얼마 전 "네오콘 프로젝트"란 책을 읽었는데, 국내 학자들이 미국의 신보수주의 집단의 역사적 연원부터, 정치이념과 그들의 정치외교적 실천 방식을 면밀히 검토한 역작이었다. 재미있는 건 "레오 스트라우스"란 유대계 미국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한나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였다. 지금 미국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네오콘들의 사상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도리어 매우 파시즘적인 정치 사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긴 그가 플라톤 전공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엘리트주의를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다. 향연하면 플라톤의 향연이 먼저 떠오른 탓에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마샬 버먼의 이 책은 꼭 읽어야 하는 그런 류의 책은 아니다. 읽었다고 해서 어디가서 이야기하면 누구나 알아주고 대화에 끼어주는 그런 책도 아니고, 잘 읽었다고 칭찬을 들을 고전도 아니다. 따지고보면 고전이란 문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논 필독서 목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것도 안 읽었어? 그럼, 같이 대화하기 어렵겠네. 라고 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벽 말이다. 그런 장벽 앞에서 갑자기 멍해진 기분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이런 책을 한 번 읽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혼란의 일부가 아니라 혼란의 진앙지가 되고 싶은 야심을 품어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그것이 자본주의가 완전한 승리를 구가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평생을 걸고 그에 반대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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