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잘 만드는 책
김진섭 지음 / 이미지박스 / 2004년 2월
한 명의 편집자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3년을 꼬박 노가다(土方)판에서 보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을 졸업하고 이날 이때까지 만 10년 넘게 꼬박 인쇄밥(책 만드는 일)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노가다판과 인쇄판의 공통점 한 가지를 찾자면 두 영역의 전문용어들이 모두 일어식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거다. '노가다'란 말 자체가 일어에서 온 말이고, 품삯 받는 것을 간조(勘定) 탄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두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그외에도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는 대개의 용어들이 일어식 표현들이다. 문틀을 '와꾸'라고 부른다던지 일본 말로 아버지를 뜻하는 '오야지'는 건축 현장 십장이나 한 팀의 우두머리, 시아게하다(마무리 짓다), 데모도(조력공), 가끼나라시(바닥을 평평하게 긁어 고르기), 가베(벽), 단스(작은 장), 고데(인두질), 데꼬보꼬(올록볼록), 덴죠(천장) 등등이 있고, 영어라도 일어식으로 사용되는 말들이 콘크리트(공구리), 미터(메다), 미끼샤(믹서) 등등이 있다.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한 데로 적어보았다.
인쇄용어에서 사용되는 일본말들은 찌라시(전단지), 보카시(계조, 그라데이션), 도비라(속제목), 하리꼬미(터잡기), 마끼도리(잉크세척), 베다인쇄(민인쇄), 세네카(책등), 시오리(가름끈), 아지노 무선(어살무선), 사시꼬미(사이넣기) 등등 어쩌다보니 건축판과 인쇄판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이렇게 일어식 표현이 되었을까. 원인이야 간단하다. 처음 이 분야의 일들은 근대화 이후 새롭게 판갈이 된 영역이거나 이전엔 없던 것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일본으로 모든 걸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의 일본어 혹은 일본식 표현들이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해방 이후 언어 순화 내지 정화를 거치며 혹은 미국식 용어들로 변화하면서 많이 사라진 반면에 이 건축 현장과 출판 현장 이 두 분야는 상대적으로 그런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건축과 출판 현장이 그만큼 외부 세계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로 떨어진 전문(폐쇄적) 분야라는 것인데,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는 정상적인 루트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출판아카데미 형태로 몇 군데 학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건축현장의 건축 노동자를 교육하는 기관은 내가 알기로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건축 현장의 인력 수급은 대개 오야지 단위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조력공들을 공급하는 거리의 인력센터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경우에도 친구 아버지가 목수 오야지였기 때문에 처음 반 년 정도를 목수 조력공(데모도)로 일했고, 6개월여가 지나자 비로소 한 사람의 새끼 목수로 인정받으며 내 몫의 망치와 못 주머니를 얻을 수 있었다. 기생을 가르치는 권번으로 치자면 새끼 기생이 머리를 올린 셈이다. 미장공으로 일했을 때는 3개월 정도만에 내 몫의 흙손을 기공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일당이 달라진다. 건축판의 인력 수급은 대체로 그런 알음알음으로 시작해, 건축판의 여러 분야 예를 들어 목수, 미장, 공구리, 방수, 전기, 철근 등등으로 구분되는 각각의 분야에서 일종의 도제식 수업을 쌓아 조력공에서 기공이 된다.
출판 현장도 실제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신문방송학과에 대한 오해부터 하나 풀어보자. 신문방송학과 나오면 신문사나 방송국 가는 줄 알지만,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일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신문방송학과는 신문이나 방송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매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일 뿐이다. 실제로 신문사나 방송국엔 국문학과를 비롯한 어문학부나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더 많다. 언어와 사회에 대한 감각이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출판사나 잡지사로 내려오면 전공의 중요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선배들이 이미 취업해서 터 잡아놓은 과일수록 이 방면의 취직이 쉽다. 대개의 출판사나 잡지사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공개 채용을 하지 않았고, 현재도 인터넷상으로 편집부 직원 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공개적으로 채용하는 법이 없다. 기껏해야 한 두 명 뽑는데, 공채한다면 우습지 않겠나?
출판에도 나름의 영역이 있다. 특히, 이 분야에서 메이저급에 해당하는 분야는 아동물 분야이다. 전집류 기획편집자들은 그네들의 영역이 있고, 단행본 쪽은 단행본 나름의 영역이 있는데, 다 같은 편집이라도 인력 교환은 거의 없는 편이다. 아동물 하는 사람은 계속 아동물 쪽으로 나가고, 단행본 쪽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단행본으로 가기 쉽다. 본래 출판 분야에서의 이직이나 전직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워낙 영세한 구조다 보니 직장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월급을 인상 받기 위해서라도 이직은 필수적이다. 월급을 올려치면서 다른 출판사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영세출판사는 신참 편집부 직원을 뽑는다. 영세출판사들은 대개 사장이 영업 뛰고, 갓 대학 졸업한 친구를 데려다가 편집하게 한다(아니면 남편은 영업, 부인은 편집하는 경우도 많다).
대개 출판사 편집부 지망생들은 개인적으로 워낙 책을 좋아하거나 나름대로 이 분야에 자신의 애정을 쏟을 각오를 한 이들이다. 책이 좋아서 책 만드는 일을 택한 가련한 분들인 거다. 그러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사전과 씨름하며 교정 교열을 익혀 나간다. 인쇄 실무는 영업 출신인 사장 따라 다니며 배운다. 그런데 인쇄소의 기술자들은 대개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대개 단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자고, 초짜인 편집부는 억세게 단련된 인쇄소 남자 기술자들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도 제법 있다. 그런 경험을 한 두 차례 겪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단련되고 일본식 인쇄 용어들을 익혀가며 악다구니, 깡다구가 는다. 사실, 1-2년 정도 인쇄밥을 먹다보면 실수로 잘못 인쇄된 책 만들어 본 경험을 한 두번씩 다 하게 된다. 그런 실수를 하면서 출판이란 게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되면, 나름대로 인맥도 축적되고, 주변의 출판사 직원들과 교류도 생기게 된다.
그러면 제법 큰 출판사에서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직을 생각하게 된다. 이직하면서 보수도 좀 올려받고, 영세출판사는 그럴 여력이 없으므로, 심지어는 퇴직금도 뜯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나중에 다시 어디선가는 마주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세출판사 사장이 망해서 다시 영업으로 돌아가면 어딘가 대형서점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친다). 그렇게 좀 규모있는 출판사로 옮겨가면 편집부도 두 세 명 되고, 편집장도 있어서 좀더 세련된 기술들을 배울 수 있거나 좀더 다양한 책들을 출판하는 경험을 쌓게 된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산전수전 다 겪는 거다. 나름의 편집자로 제 몫을 하게 되는 건 대체로 이때부터다. 그래서 출판사마다 출판경력 4-5년차 편집부 직원 찾느라 난리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월급 많이 달라고는 안하고, 일은 베테랑 편집자보다 그다지 떨어지지 않으니, 부려먹기 좋아서 그런다. 훌륭한 편집자와 그렇지 않은 편집자는 겉으로는 잘 알 수 없다. 교정만 잘 본다고, 교열을 잘 한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이 또 눈에 확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이 때가 중요하다. 이때 확실히 자기 갈 길을 정하지 않으면 여성의 경우엔 결혼과 동시에 이 세계를 떠나야 하거나 남성의 경우엔 아, 이 분야에 비전이 없구나 생각하고, 일을 접어야 한다. 왜냐하면 편집연수가 축적되면서 승진과 보수라는 직장 생활, 사회 생활, 가정 생활을 꾸려가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를 출판계는 확실히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 거대 출판사로 진입하던지 아니면 규모는 작더라도 알짜 중견 출판사(나름의 정년을 보장해주는)로 옮겨 가지 못하면 갑자기 길잃은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배운 도둑질이라고 마음 맞는 영업자와 신규출판사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신규출판사를 차린다고 성공하게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신규출판사를 차릴 땐 당연히 자본의 부족을 절감하게 되므로 일단 팔리는 책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중견출판사들이 첫 책들을 한 번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책, 정말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기 시작한 출판사는 극히 드물다(거물급이 독립해서 자기 출판사를 차리는 경우를 제외하곤). 그러다보니 여성의 경우엔 결혼과 함께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면서 아르바이트로 교정 외주를 하고, 남자들의 경우엔 새롭게 영업 파트 일을 배워가거나(나중에 독립을 위해서라도) 전직을 생각한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출판사는 괜찮은 사람들 데려다 젊을 때 심각하게 부려먹고, 노후는 알아서들 하라는 식이다. 그러고는 어디 나가선 출판인 이야기하고, 출판문화의 후진성, 낙후성을 이야기한다(물론 이런 책임이 전적으로 출판사 운영자들에게만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건축현장의 판 돌아가는 추세나 출판현장의 판 돌아가는 추세는 이렇게 흡사하다. "책 잘 만드는 책" 이야기 하다가 멀리 돌아온 것 같지만, 사실 이 책이 그런 주장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은 제목이 설명해주는 그대로 출판에 처음 몸을 담은 신출내기 편집자가 궁금해 할만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내 경우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내내 교지 일을 해왔고, 대학에서도 출판 실무 강의를 들었다. 그래도 막상 현장을 처음 접하고는 어려운 점도 많았고,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표지를 재인쇄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험도 있었다. 교정 교열이란 것도 참 신기해서(신기할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큰 글자, 당연히 잡아낼 수 있는 오탈자도 안 보이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사람마다(편집자도) 말이나 글에 특정한 습관들이 있어서 어떤 버릇들은 죽어라하고 고쳐지지가 않는다.
사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까닭은 내 밑으로 들어오는 신출내기 편집자들을 위해서였다. 책의 구성부터 여러 용지들을 실제로 경험해볼 수 있도록 지질을 달리한 여러 페이지들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종이부터, 2장 DTP(Desktop Publishing), 3장 인쇄, 4장 제책, 5장 가공, 6장 예산서 작성법, 그리고 실전 제작에 이르는 출판 실무의 전 분야를 두루 살펴주고 있다. 비록 지금 내쫄따구가 이 책을 잘 들여다보고 있는지(열심히 안 보더군)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이론적인 지식보다는 현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정보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책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제 아무리 책이 잘 가르쳐주어도 밤을 새워가며 교정보노라면, 혹은 내 손을 떠난 영역에서도 잘못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편집자의 손을 떠나 인쇄기에 올려진 순간, 인쇄기가 돌아가는 순간 편집자의 실수는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기 쉽다. 사람은 가도 책은 남아서 수백년이 흐른 뒤 누군가는 그때의 편집자를 기억해줄지는 몰라도... 가끔 지금은 내 손을 떠나 누군가의 책꽂이에 꽂혀 있을 그 책들이 너무 부끄러운 것들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 이것으로 이 책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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