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문화사
게르트 미슐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시공사 / 2002년 4월
자살이란 희생자가 스스로 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어떤 행위에서 비롯되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경우를 말한다. - 에밀 뒤르켐
게르트 미슐러의 "자살의 문화사"를 구해 읽으려고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글쎄,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특별히 죽음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고민해본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죽음을 각오했던 경험은 한 번 있었다. 그런 경험 탓일까. 아니면 모든 인간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종말로서의 죽음에 대한 관심 탓일까. 죽음을 다룬 꽤 여러 종의 책들을 구해 읽었고, 게르트 미슐러의 "자살의 문화사"는 아마도 그런 과정에서 읽게 된 책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 뒤르켐의 "자살론", 필립 아리에스를 따르다 발길이 닿아 게르트 미슐러에 이르렀다고 해야하겠다.
"자살의 문화사"를 읽고 아쉬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우선 책의 내용이 문화사라고 하기엔 너무 얄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살의 문화사를 크게 유럽문화권과 비유럽권의 사례로 구분하고, 유럽문화권의 자살에 대해서는 시대별로 추적하고 있다. 목차를 보면 뭔가 많은 내용이 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주석을 포함해서 270쪽 이내의 책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반대로 하자면 그렇기에 일반 독자들이 읽고 자살, 자살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엔 적당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은 유럽문화권에서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었는가? 자살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자살한 사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어떻게 변모해왔는가를 추적한다. 게르트 미슐러는 그 시작으로 고대 사회의 자살, 특히 삶이 죽음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 파악한 스토아 학파를 중심으로 자살이 이 시대엔 특별히 질책받아야 할 무엇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제논, 클레안테스, 세네카 등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스토아 학파는 불치병으로 육체가 만신창이가 되거나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가야 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성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럴 경우 자신의 자유의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 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자살은 자유로운 시민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었지, 남의 재산으로 분류되는 노예들은 자살할 권리가 없었다. 자살을 기도했던 노예가 매매될 경우엔 반드시 그 사실을 새로운 주인에게 밝히도록 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와는 반대로 독배를 마시고 자살한 스승을 두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피타고라스는 비록 당시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자살에 반대했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는 이것을 신의 영역에 인간이 침범한 것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사회에 대한 책무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짓으로 간주했다. 이들의 논리를 극적으로 부활시킨 것이 중세의 기독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스스로 죽을 권리가 없다는 이유를 십계명의 제6계명에서 찾았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살인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저 "살인하지 말라"고 적혀있는데, 이 말은 인간을 죽이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란 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이 신이 세운 나라에 속해있다고 보았으므로 속세의 질서가 부여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에 대한 기독교적 의무를 손상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계몽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유럽에서 자살한 사람의 죽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였으며, 시신은 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지 못했고, 본인의 시신은 물론 그 가족까지 재산 몰수 등의 처벌을 받았다. 중세 교회가 고대 사회에서 인정받았던 자살할 권리를 종교적, 문화적으로 처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에서도 이야기되는 것처럼 교회는 자살, 즉 죽음을 통제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기독교 교회는 신도들에게 이승이 사후에 축복받는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 가르쳤다. 이 놀라운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 전파 당시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면서 이를 행복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순교는 천국의 열쇠를 거머쥐는 영순위 추천장이었다.
중세 기독교 사회로 넘어오자, 교회는 너무 일찍 천국행을 희망하는 신자들을 통제할 적절한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자살 금지는 중세 성직자들의 정신적 권력을 위한 기초였다. 게르트 미슐러는 자살 금지 조처가 내려지던 시기에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로 스스로 절망에 빠진 나머지 자살하려는, 독실한 믿음을 지닌 순박한 신자들에게 죄를 사해주어 이승에서의 삶을 연장시켜 주었다. 중세 사회가 자살에 대해 엄격했던 현실적 이유는 고대 사회의 노예들에게 자살이 금지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혹독한 노동과 가혹한 삶의 조건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중세의 농노들, 평민들의 발목을 이승에 잡아두기 위해선 자살이 금지되어야 했던 것이다.
계몽 시대에 이르러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살이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것이란 중세적 시각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울증의 발견이 그것이다. 이제 자살은 처벌의 대상에서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악마의 유혹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병으로 자살한 사람들은 이제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런 시기에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왔고, 모방 자살이 급증하게 된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자살을 급증시켰다. 대중사회의 출현, 도시의 익명성, 산업화에 따른 실직 및 고용 안정의 불안 등은 도시 노동자들을 삶의 극단적 한계까지 몰아갔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외로운 시간을 골라 자살했다. 자정부터 새벽 2-3시 사이... 경제위기 상황에선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자살했고, 도시의 익명성에 숨을 수 있었던 도시 미혼모들에 비해 농촌 촌락공동체에 속했던 미혼모가 더 많이 자살했다.
19세기에 들어와 의학이 발달하면서 죽음은 더이상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었다. 점점 더 많은 질병들이 치유되었고, 이제 죽음과 질병은 교회가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과 질병은 교회의 손을 떠나 병원의 침상으로 옮겨졌다. 과거 불치병이었던 병들이 치유되기 시작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오랜 시간 아프게 되었다.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점점 더 길어지게 되었으므로 인간들은 죽음을 더욱더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병자를 돌보아야 하는 가족의 부담도 더욱 커졌다. 이제 죽음은 두렵고 귀찮은 것이 되었으며, 이것은 자살이란 개념에도 전염된다. 자살은 두렵고, 경멸스럽고, 역겹고,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책임한 행위가 되었다.
사람들은 속설처럼 전쟁이 일어나면 자살율이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실례를 들어 그와 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바이에른에서는 1615년 인구 10만명당 5명, 1623년 10만명당 8명, 1627년 10만명당 29명으로 늘어났고, 스웨덴군에 점령당한 뮌헨에서는 10만명 당 20명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불안감과 절망강 이외에도 남편과 부모와 자식 혹은 사랑하는 애인을 잃은 슬픔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자살자 급증에 대해서 사회병리학적인 원인을 찾아보려는 진지한 시도가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죽음은 외부로부터 어떠한 억압도 없이 정상적인 심리상태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늘 저런 모호함에서 발생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억압으로 볼 것인지, 정상적인 심리 상태란 무엇인지, 충분한 시간은 과연 얼마만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결정에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뿐이다.
* 게르트 미슐러의 "자살의 문화사"엔 아쉬움과 더불어 부러움도 좀 있다. 게르트 미슐러가 1970년생으로 나랑 동갑이란 사실 한 가지(난 뭐했나 싶은 것도 있고)는 부럽고, 다른 한 가지는 좀 더 깊이 있게 밀고 들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리고 다른 아쉬움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1792년 9월 25일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국민의회의 연단에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분노로 자살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정치 동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발사했다. 1년 뒤에는 의사이자 작가, 정치가였던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가 욕조에서 목숨을 끊었다. <본문 88쪽>
음, 이런 경우 저자인 게르트 미슐러의 실수인지, 번역자 유혜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시공사 편집부의 실수인지 모르겠으나 누구의 실수던 간에 납득하기엔 좀 어처구니가 없어 그냥 맥없이 웃음이 나온다. 프랑스 혁명의 정치 지도자 장 폴 마라는 1793년 7월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자택 욕실에서 살해당했다.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라는 이름은 프랑스 혁명사에 자주 등장하는 시골 출신 젊은 처녀(25세)의 이름이다. 그녀는 칸이라는 자그만 시골 마을에서 파리로 올라와 욕실에서 목욕 중인 마라(Jean Paul Marat)를 준비해 갔던 칼로 살해하였다. 코르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화가를 불러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하여 화제가 되었던 여성이기도 하다. "마라의 죽음"은 같은 혁명의 동지이며 친구 사이였던 다비드의 회화 "마라의 죽음"을 통해서 너무나 극적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참고문헌을 찾아보니 게오르게스 미노이스의 "자살의 역사"에 나오는 그는 "장 폴 마라"가 아니라 "데이비드 마라(David Marat)"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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