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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AG건축기행 1, 옛절에서 만나는 건축과 역사
김봉렬 글, 관조스님 사진 / 안그라픽스 / 2002년 4월
원래는 어제까지 휴가였는데, 편집회의가 있는 바람에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제부로 휴가를 종치고 출근하고 있다. 이번 휴가는 정신없이 놀기만 하고 한 권의 책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사이에도 책을 전혀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며 가며 앉은 자리에서 그러고보니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 심각하게 생각질 않았던 모양이다. 우선 툴루즈 로트렉과 고야에 대한 책을 한 권씩 읽었고,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를 읽었고, 그외에 지금 당장 생각은 나지 않지만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이럴 수가 아무 책도 읽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읽어댄 거지...(괜스레 잘난 척 한 것 같기도 하고, 책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이 책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은 읽은지 좀 된 책이다. 정확히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군데 포스트잇도 붙이고 한 걸로 봐서 그 무렵 나름대로는 진지한 독서를 했다는 흔적은 남아 있는데 언제 읽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 걸로 봐서 나는 영 기억이 젠병인 인간이다. 그런 나의 기억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읽은 책은 읽었다는 티를 내놔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책에 대한 글을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에 또 사면 아깝지 않은가 말이다. 이 책의 저자 김봉렬 선생은 건축가다. 집을 짓는 건축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건축학과를 졸업해서 현재 한예종(한국예술종학교)의 건축과 교수로 있으니 건축가인 동시에 선생님이기도 하다.
얼마전 건축학 대학원까지 졸업한 아는 동생 녀석의 집들이에 갔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잠깐이었지만 건축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난 평소 건축에 대해 궁금해 하던 몇 가지 용어 같은 것들을 물었고, 이야기는 저절로 우리나라의 건축 현실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는 참 특이한 나라다. 가령, 모래 위에 집을 짓고도 그것이 대충 번듯하게 오래가는 구조이고, 그것이 허물어진다고 해도 별반 반성없이 거기에 또 집을 짓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해마다 장마철이면 둑이 무너지고, 절개지 토사가 밀려와 도로를 덮어도 다음해면 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라이다. 이 모든 것의 문제가 기초가 약한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부분 별다른 고민없이 잘 살고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에 사람들은 제1한강교던가를 들먹이면서 일제 시대 일본 기술자들을 칭찬했다.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건 단지 우리 시대가 그때보다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을 게다. 이를테면 집을 짓는 사람들의 자세의 문제였을 것이다. 가령 일본이 제1한강교를 튼튼하게 지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네들이 이 나라를 영원불멸토록 지배할 것이란 믿음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그네들이 그렇게 믿었기에 남의 나라에 와서 다리를 건설하면서도 그토록 튼튼한 다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네 건축은 아직도 그런 식민지적 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휴가 얘기로부터 많이 빗나갔는데,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책이자 휴가철에 읽으면 좋은 책이라 일부러 좀 엇나가는 이야기를 해 보았다. 건축가 김봉렬은 승려 사진가인 관조 스님과 함께 불교신문에 한국의 사찰 건축에 대한 글을 연재했고, 이 책은 그 중 일부를 별도로 모아논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컴퓨터 서체로도 잘 알려진 국내 유명 디자인 회사인 안그라픽스에서 깔끔한 북 디자인으로 출판된 책이다. 당연한 이야기일 테지만 글 내용도 그렇고, 책의 활자나 사진 인쇄 등 책의 매무새 전반이 깔끔하고 읽기 좋다.
이 책은 "절로 가는 길"을 비롯해 "어우러짐, 넉넉함, 멋스러움, 성스러움, 소박함" 등 모두 여섯 개의 주제로 사찰 건축을 응축해 놓고 있다. 도입부에 "절로 가는 길" 이란 주제를 배치해놓은 것부터 시작해서 이 책의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절로 가는 길이 일종의 도입부라면 그외 나머지 다섯 개의 주제는 우리네 사찰 건축 양식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본질을 드러내주고 있는 속성들이다. 자연과의 어울러짐, 산 속에 자리하고 있거나 혹은 대처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넉넉함, 우리네 건축 양식의 두드러지지 않으나 더이상 치장할 수 없을 정도의 멋스러움, 사찰이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는 장소라는 본질에 어울릴 법한 성스러움, 그럼에도 서양의 오래된 교회 혹은 졸부 기질이 잘 드러나는 신흥거대교회 건축들의 치렁치렁한 장식미를 배제한 소박함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에 대한 흠모를 감추지 못하는 속물 사내이긴 하지만,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지고, 내 귀로 듣기 전엔 잘 믿지 못하고 진정으로 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까닭에 여행하기 전 여행안내서를 읽는 일을 그닥 즐기지 못하는 편이다. 그건 내가 책을 읽되 한 번에 읽고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장에서 본 영화라도 반드시 비디오나 DVD 등과 같이 리와인드하면서 볼 수 있는 매체를 통해 다시 읽어내야 하는 것처럼 여행도 한 번 가보았다고 해서 전부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누가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줄거리를 줄줄 꿰고, 영화 비평 글을 읽으며 미리 해석하고, 단정을 내린 뒤에 영화를 보고 싶어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을 권하는 까닭은 이 책을 읽고 어딘가에 매력을 느껴 가보는 일도 좋으나 한 번 갔다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서 여행해보라는 측면도 있다. 난 제작년에 지리산 화엄사에 며칠간 머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사람들을 인솔하고 역사기행을 가기도 했지만, 그 며칠 동안 보살님들이 기거하는 옆 방에 머물면서 법고와 새벽 예불 소리를 듣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 절은 관광지가 아니다. 우리 이야기를 남의 공간 개념을 빌어 설명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절은 서양의 수도원과 교회를 합쳐 논 공간이다. 그 속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봐야 절이 재미있다. 절이 재미있다는 말에는 "쥐죽은 듯 혹은 절간처럼 조용하다"는 표현의 진정성을 몸소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범어사를 비롯해 정수사까지 모두 29곳의 사찰을 멋있는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찰들 중에서 대충 헤아려 보니 한 17-8곳의 사찰을 다녀 본 셈이었다. 그 중에서 어느 절이 가장 좋았으니 그 절로 몰려들 가시라고 추천하는 건 우둔한 짓이다. 모두가 제 나름의 멋과 맛이 있으니 그걸 느껴보는 건 각자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 책에 나온 사찰 어느곳이든 시간을 내어 절 입구부터 제 발로 천천히 걸어가 보시라. 오래도록 지근지근 제 발로 밟아 오르다 보면 돌담 사이에 피어오른 돌이끼 하나조차도 그냥 자라난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일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서양의 교회를 교회 건물만 교회이지만 한국의 사찰은 그 산 전체가 이미 사찰이다. 그만큼 우리 사찰의 공간을 빚어내는 기술은 우리나라 전국토를 불국토로 여겼던 옛선인들의 믿음이 드러나있다. 그 한 예로 강원도 영월에 있는 법흥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절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절은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그 분의 진신 중 일부가 있는데 구태여 불상을 만들어 모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의당 있어야 할 부도나 사리함 같은 것이 절에 모셔져 있지 않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대웅전을 등지고 있는 뒷산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전해질 뿐 누구도 어디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때 내가 깨우친 것은 바로 법흥사 뒤의 산이 바로 그 분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자, 사리함이자 당신의 진신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넓은 산 속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찾는 다는 건 사막에서 모래 몇 알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때 한국의 사찰이 지닌 그 넉넉함과 멋스러움과 소박함, 그리고 그 엄청난 스케일에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우리네 사찰이 그 장구한 세월의 마모를 견디며 오늘날까지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은 기술의 훌륭함도 훌륭함이지만 그 믿음, 이 땅에서 그네들의 후손이 영원토록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들이 가져야 할 믿음, 우리가 쌓아올릴 벽돌 한 장에 과연 그런 믿음이 들어 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이번 휴가철에 산이니 바다니 떠들썩하게 떠나는 것도 좋지만 소박한 작은 사찰을 찾아 얼마간의 시주를 보태고 방 하나 얻어서 조용히 지내보는 것은 어떨까. 계곡에서 삼겹살에 소주 먹는 일도 즐겁겠지만, 절 공양간에서 해주는 나물밥 한 그릇 얻어먹고,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조용히 책 한 권 읽어내는 일이 더 알찬 휴가일지도 모르겠다.
책속으로
차례
지형과 교리가 빚은 개성들 속에서_김봉렬
가람에 담긴 정신을 찾아서_관조
1. 절로 가는 길
범어사 - 짧지만 길고 굽었으되 곧은 길
화암사 - 천연요새의 성 같은 고찰
유가사 - 자연이 주연, 인공은 조연인 사찰
해인사 국사단 - 깨달음과 미망의 경계에 세운 공간 예술
2. 어우러짐: 가람과 자연의 조화
부석사 - 땅의 리듬에 맞춰오르는 계단식 석단
낙산사 홍련암 - 동해바다에 떠 있는 구도의 법당
선운사 - 여백미 사라진 자리엔 동백꽃만
고운사 - 두 가람 잇는 다리
내소사 - 자연과 한 몸을 이룬 절
마곡사 - 끊김과 이어짐의 절묘한 조화
해인사 - 변화무쌍한 공간의 멋
3. 넉넉함: 원융회통의 건축적 표현
화엄사 - 절묘한 공간 활용으로 이룬 화합의 정신
금산사 - 수평과 수직의 어우러짐
대둔사 표충사 - 불교의 포용력 상징하는 가람 속 사당
옥천사 - 살아 있는 통불교 박물관
문수사 - 민중의 얼굴을 한 보살
신원사 중악단 - 명성황후 구국혼 깃든 산신당
4. 멋스러움: 가람에 담긴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
은해사 - 자신감 넘치는 뼈대의 아름다움
수덕사 - 섬세한 공예미 가준 고려 건물의 정수
청룡사 - 휘어진 기둥에 담긴 중용과 역동의 미학
흥국사 - 궁궐 대접받은 왕실 원찰
5. 성스러움: 아름다운 것은 성스럽다
법흥사 - 온 산이 다 부처님의 몸
통도사 - 새것 만들되 옛 질서 따르는 정신
한계사터 - 옛 절터에서 만나는 '처음 정신'
개암사 - 용과 봉황으로 가득한 정토
6. 소박함: 가람과 절제의 미학
봉정사 영산암 - 소나무 그늘에 담긴 거대한 의미
화엄사 구충암 - 모과나무로 구현한 자연주의
선암사 - 고결한 삶을 보듬는 건축적 지혜
정수사 - 작은 것이 아름답다
사찰건축-어떻게 이해할 것인가?_김봉렬
조선시대 불교 건축의 구성-그 통불교적 교리_김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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