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란 누구인가 -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9 / 노서경/ 책세상/ 2001년
1939년 4월 16일 러시아연방 서부지역 스몰렌스크(Smolensk) 인근의 카틴(Katyn) 숲에서 대략 4,400여 명 가량의 폴란드 귀족출신의 장교와 지식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이들은 철사줄로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뒤통수에 총격을 당하는 방식으로 사살당한 뒤 매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다급해진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폴란드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폴란드는 나름대로 수도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에 저항했다. 연일 독일 공군의 수도 바르샤바를 폭격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척추를 부러뜨린 것은 서방이 아니라 동방에서 날아든 일겨에 의한 것이었다. 스탈린 휘하의 소련군이 동쪽으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소련은 1939년 8월 독일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직접 서명하며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은밀히 폴란드에 대한 분할 점령 계획을 세웠다.
전후 폴란드를 장악한 스탈린은 폴란드를 영구히 소련연방에 편입시키기 위해 폴란드의 지도층 인사들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군 장교들을 집단적으로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숲 속에서 학살한 뒤 이들을 묻어버렸다. 이 학살사건이 알려진 것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 이후 독일국민들에게 총력전을 호소하던 괴벨스가 연합국 내부의 균열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술의 일환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부터였다. 당황한 소련은 이 사건이 독일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했으나 독일은 1940년 봄 옛 소련의 자행이라고 반격하였다. 당시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1939년 이래 소련에 사로잡힌 폴란드군 포로의 행방을 탐문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적십자사에 이 사건의 조사를 요구하였다. 소련은 즉시 폴란드 망명정부와 단교하였고, 영국과 미국은 당시 나치와의 전쟁 수행에 차질을 빚고 싶지 않았기에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련 정부는 이것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임을 인정했다.
이 책의 저자 노서경 선생의 "들어가는 말"은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우선 1930년대 니콜라이 부하린이 숙청당한 뒤 그의 아내가 겪어야 했던 고초, 나치 정권의 수립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던 이들 나라의 지식인들이 아픔, 그 뒤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싸워야 했던 약소국의 지식인들이 당했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한다. 그런 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이들에 비해 상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일보" 외신기자로 일했던 노서경 선생이 19세기말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역사를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이란 주제로 살피고 있다.
시기적 배열에 따라 모두 4장으로 분류된 이 책은 제1장에서 19세기말 프랑스 노동계급과 결합하기 위해 노력한 페르낭 펠루티에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노동자들의 과학적 사회인식을 노동운동의 기초로 삼은 펠루티에의 태도는 "지배계급이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지배하는 이유는 지적인 헤게모니에 있었다. 부르주아 예술은 정부, 군대, 경찰, 사법의 다른 모든 사회적 힘을 합친 것보다도 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그는 "예술과 저항"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노서경 선생의 "지식인이란 누구인가"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대목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문장들 때문에 읽는 내내 매우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위 인용문을 예로 들어보자. 아마 저 문장은 이렇게 교열되었다면 본래의 뜻이 보다 더 쉽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배계급이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노동계급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적인 헤게모니에 있었다. 부르주아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동력으로 정부, 군대, 경찰, 사법 등 다른 사회적 힘을 모두 합친 것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예술과 저항"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이 책의 본문 중 상당수가 저와 같은 문장형태들로 구성되어 있는 탓에 어렵지 않은 내용임에도 독해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찌되었든 펠루티에는 노동운동이 과학적 지식과 결합해야만 사회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부르주아 사회가 과학적인, 논리적인 근거를 자신의 존재이유로 제시한다면 노동운동 역시 그 못지 않은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제2장 "반전과 사회주의 지식인 - 장 조레스"는 우리 사회에서도 새삼스레 부각되기 시작한 프랑스 좌파 정치인 '장 조레스'에 대한 내용이다. 장 조레스는 제국주의적 팽창이 유럽 내의 근대민족국가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민족주의는 비등점을 향해 내달려가던 시대의 정치인이었다. 조레스는 1885년 26세의 나이로 하원에 진출한 이래 1914년 암살당할 때까지 하원에서 6선을 지냈다. 그는 민족주의가 당연한 대세이던 시대에 신문논설과 당대회 등의 각종 강연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들을 위해, 그리고 국민을 위해 전쟁에 반대했다. 당시 부르주아들은 사회주의를 민족과 문명을 파괴하는 이념으로 생각했으나 장 조레스는 사회주의가 문명을 파괴하는 이념이 아니라 문명의 파괴와 명분없는 살육으로부터 이들을 수호해내는 이념임을 알려주었다. 그가 극우파에게 암살당한 뒤 불과 며칠 뒤 프랑스가 한 세대가 전멸당할 정도의 극한 파괴와 살육으로 치달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든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평화의 의지, 조직되고 감시하는 평화의 힘, 그것은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산업도시의 임금생활자, 사회주의 근로자 당신들이었다." - 장 조레스
제3장은 "반파시스트 운동과 작가들"이란 주제로 1930년대 극우파(파쇼)가 지배하던 프랑스 사회와 나치 독일의 지배 아래 들어간 프랑스 지식인들이 극우를 극복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던 시기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지난 2202년 4월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펭이 돌풍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한 바탕 떠들석한 소란에 휩싸였다. 극우파이자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부르짖는 르펭이 대선 1차 투표에서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은 프랑스 사회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20년대에서 1930년대 프랑스에서 극우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정치 이념이었다. 그것은 단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전유럽의 공통된 분위기이기도 했다. 피레네 산맥 이남의 코르도바에서 라인강을 넘어 단치히까지, 파시즘은 부르주아정치의 한계에 도달한 유럽을 개혁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하이데거조차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지지찬동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반파시스트감시위원회를 성립시켰다.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숱한 논쟁을 거쳤고, 당시 프랑스 내부에 팽배해있던 군국주의 성향의 극우 파시즘이 지닌 위험을 체감했다. 이런 지식인들의 운동은 1934년 3월 비정치적인 지식인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앙드레 지드까지 참여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진다. 이른바 프랑스 지식인들의 앙가주망 전통이 다시금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나치 지배 아래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으로(이 책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파리 해방 이후엔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드골 망명정부의 권위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 국가의 법통상으로 보았을 때는 추축국에 가담한 국가였으나 연합군의 승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이들의 공로이다.
제4장은 전후 프랑스가 맞닥뜨린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대처를 "알제리 전쟁기의 청년 지식인들 - 군부의 고문반대"란 주제 아래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 프랑스 국민들에게 식민지 알제리는 식민지이면서도 동시에 인도차이나와는 다른 식민지였다. 그들에게 알제리는 프랑스 그 자체의 알제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초기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점차 알제리의 독립에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나섰고, 드골은 군부와 극우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식민지들에 대한 독립을 약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책이 던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다. 저자는 "맺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에서 지식인은 자기 시대의 중요한 문제에 무책임하지 않았고, 인민을 의식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인민을 떠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지식인은 경제적, 정치적을 압박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공유하고 질곡을 타개하려고 했다. 중요한 사회이론을 제시해온 당대의 사회학자가 파업노동자들 앞에서 그들을 위해 열변하는 장면 자체가 그러한 프랑스 지식인의 계보가 1995년에도 종식되지 않았고 여전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중략........... 지식인의 본질은 단면적인 비판에만 있지 않으며 어떠한 성격의 비판도 크고 넓은, 정신의 자유의 일환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중의 어느 한 가지라도 허물어져 버리면, 즉 경제는 앞서 나가지만 정치는 기틀을 잡지 못하고 사회의 기존 형태는 깨지는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정체되어 있게 되면 지식인은 나약해지고 용기를 잃게 된다.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의 지식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것은 폴란드의 정신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오늘날 서슴치 않고 "지식인의 위기"를 말한다. 혹시 우리들 스스로는 이념적으로 정체되어 있으면서 여론이란 미명 아래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제2의 송두율 교수는 없는지 한 번쯤 살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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