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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 1. 23. - 199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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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에 대해서 고정된 생각을 갖고 싶지 않다. " - 페데리코 펠리니

 

 

 

  네오 리얼리즘(Neo Realism)

  로베르토 롯셀리니(Roberto Rossellini)

  빔 벤더스(Wim Wenders)

  길(La Strada)

  파리 텍사스(Paris Texas)

  미야자키 하야오

 

  예술이라는 것이 순전히 인간에 대한 것이라면 예술이 창조하는 인간형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 보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 몇 편의 영화는 펠리니 감독의 <길 La Strada>와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Paris Texas> 였다. 물론 <길>의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잠 파노(안소니 퀸)'를 일컫는 말이다. 펠리니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일은 이제 먼지 쌓인 도서관에서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고 고전을 꺼내 읽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영화들은 자신의 환상에 충실한 작품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안개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영화는 분명 네오 리얼리즘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시작해 '펠리니'라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그가 만들어 낸 완전히 '펠리니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그 오솔길을 따라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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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 영화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lani)는 종종 펠리니 감독의 페르소나를 대변하는 역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마치 한 학급의 친구처럼 절친한 동료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직업적인 역량뿐만 아니라 내가 여러 가지를 감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신뢰감을 주었던 그의 태도는 실제로  나에게 절대적이 도움을 주었다" 펠리니는 마스트로얀니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편 마스트로얀니는 펠리니와의 작업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펠리니의 손에 의해 잘 작동되는 도구처럼 되려고 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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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의 한 장면 - 영화 <길>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첨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미녀와 야수>의 패러디인데, 바보가 된 미녀 젤소미나와 가난뱅이 뜨내기 차력사가 된 야수 잠파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또 성녀 이미지의 백치 소녀와 예수의 이미지를 가진 줄광대 마토, 그리고 무지몽매한 대중으로서의 잠파노가 그것이다.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성녀는 짓밟아 버린다. 원래 제작자는 잠파노 역에 버트 랭카스터, 젤소미나 역에 실바나 망가노를 기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 감독의 고집이 영화를 살렸다. 펠리니는 이 영화를 그의 '영감의 원천'인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의 구원이 사실은 사랑의 절망 혹은 불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구원받기 어려운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예술가의 천형이다. 이 영화가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데에는 오텔로 마르텔리의 카메라와 니노 로타의 음악 역시 크게 기여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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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마르코드>를 촬영하고 있는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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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 광대 펠리니, 길에 서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연상할 때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몇 가지 상징적인 아이콘들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두 가지로 갈리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첨단 유행 패션과 고대 로마 제국의 유적들, 맛좋은 피자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지중해의 태양이 상징하는 선진국 이미지와 다른 하나는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이 만들어 낸 전후 이탈리아 뒷골목의 어두움과 그 안에서 살아나가는 이탈리아 서민들의 정서가 그것이다. 아마 펠리니가 태어나던 1920년의 이탈리아는 분명 후자쪽에 가까왔을 것이다. 이 해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기는 했으나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한 전쟁이었던 탓에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막노동 일꾼이 되기 위해 떠나가는 이민선에 몸을 싣던 시기였다. 펠리니가 태어난 리미니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작은 소읍으로 아드리아해와 인접해있었다. 1509년 이래 로마교황령이었으나, 1860년에 이르러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된 곳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때로 필요 이상으로 종교(가톨릭)적이라고 보이거나 개인적인 추억에 집착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가 자라난 리미니의 쓸쓸한 아드리아해와 근세까지 교황령에 속했던 이런 종교적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미야자키 하야오 <붉은 돼지>의 배경도 아드리아해였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바다는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길>은 바다에서 시작하여 바다에서 끝난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었지만 그리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태어난 리미니는 작은 소읍이기는 했지만 해안가에 있어 카니발과 서커스, 그리고 순회 보드빌 극단이 자주 공연을 벌였고, 어린 펠리니는 낮부터 밤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그 공연장에 앉아 있었다. 다니던 가톨릭계 학교를 뛰쳐나와 그는 서커스 단원이 되었고, 이후 만화가, 신문기자, 만평가, 작사자, 그리고 개그 작가로서 일한 페데리코 펠리니는 1939년에 영화대본의 공동작업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그에게 일생을 두고 영향을 준 대상 4가지를 꼽으라면 무엇보다 서커스와 가톨릭, 로베르토 롯셀리니(Roberto Rossellini), 그리고 줄리에타 마시나(Giulietta Massina)였을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서커스 무대가 주는 현란한 긴장과 무대에 한껏 매료된 시기였다. 그는 "만일 영화라는 것이 없었고 내가 로셀리니와 만나지 않았다면 또 서커스가 아직도 현대적인 흥행물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큰 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커스야말로 기술, 정확성, 그리고 즉흥성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인형극을 즐겼던 이 미래의 영화 감독은 동네 영화관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는 여러 시간 동안 거울 앞에 앉아 볼에 연지를 칠하고 서커스를 보고 와서는 광대 분장을 해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림 실력으로 영화배우들을 그려 전시함으로서 극장측으로부터 그 곳을 자유롭게 출입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은 터였다.

   하지만 가톨릭계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통제와 억압이었고, 밝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에게 우울한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결국 그는 교권 반대주의자가 되었지만 그의 이런 행동들이 그가 반종교적인 인물이 되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을 옭아매려는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다.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활발한 서커스 광대처럼 행동하는 그의 내면에는 주변 사람들과 늘 함께 있음에도 늘 외롭고 수줍으며 소심한 리미니의 어린 소년이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필름에 써내려 간 자서전들

  펠리니 감독을 한 마디로 어떤 유형의 감독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펠리니의 영화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흔적들을 남겼고, 몇 차례에 걸쳐 패러다임의 전환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리얼리즘(네오 리얼리즘)에서 시작하였지만 그 길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영상언어의 길을 탐색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그를 향해 "가장 논쟁적인 요소가 많은 영화작가"라던지 "영상언어의 마법사"라는 칭호를 달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펠리니의 영화들은 유난히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들과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름을 통해 자신의 자서전을 써내려간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면서도 패전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처지에 놓인 이탈리아(가장 먼저 연합군에 항복했고, 항복한 뒤에는 다시 나치의 점령 상황이었으며 수많은 빨치산들이 이들에 저항해 투쟁했으므로) 로마에서 펠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롯셀리니 감독의 조감독이 되었다.  그는 <무방비도시>(1945년), <전화의 저편>(1947)을 비롯한 수많은 네오 리얼리즘 걸작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롯셀리니 뿐만 아니라 라투아다와 제르미를 위해 공동대본 작업을 하고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네오 리얼리즘의 주요 흐름에 동참했다.

  네오 리얼리즘의핵심은 '절대적인 리얼리즘'의 추구였는데 이를 위해서 스튜디오나 세트가 아닌 실제의 삶이 움직이는 장소에서 촬영하고 전문 배우가 아닌 로드 캐스팅을 통해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영화를 제작했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제작하고자 했던 이들은 당시 이탈리아 영화를 지배했던 중류 계급의 '백색 전화(중산층의 허위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전화가 보급될 당시 회선이 부족한 탓에 일부 계층에게만 보급이 가능하여 웃돈을 주거나 연줄을 이용해 전용회선을 가진 전화를 공급받는 일이 있었다. 이를 '백색전화'를 뽑는다고 했다.) 영화'에 대항한 노동계급이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은 기록영화(다큐멘터리)적인 수법을 이용하여 파시즘과 가난, 실업, 매춘 등 사회의 부조리한 실상을 주로 다뤘다.

  펠리니가 자신의 영화로 데뷔한 것은 1951년 <하얀 추장>을 통해서 였다. 이 영화는 네오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나 영화 동료이자 아내인 줄리에타 마시나를 만나면서 그의 영화 세계는 한차례 크게 변모하게 된다. 처음에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그녀가 테아트로 델레 아르티(예술 극장)에서 였다. 당시 펠리니는 라디오의 드라마의 젊은 작가로 활달한 재기로 줄리에타 마시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펠리니 역시 그녀의 교양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자세에 마음이 움직였다. 결혼한 뒤에 줄리에타 마시나는 2 ~ 3 년 동안은 배우로서보다는 가정주부로 지냈으나 1947년 알베르트 라투아다 감독의 영화< 무자비>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후 펠리니는 아낸인 줄리에타 마시나를 출연시켜 촬영한 영화 <길>(1954년)을 통해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부부는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또한 영화 <길>은 펠리니 감독으로하여금 이전까지의 리얼리즘 경향에서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시적인 언어를 찾아가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길>, <달콤한 인생>, <8½>

  영화 <길>을 통해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펠리니는 이제 서커스 극단의 어릿광대를 쳐다보며 상상했던 그의 세계를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었으며 신성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유희와 휴머니즘 사이의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런 영화적 작업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나 또한 그의 영화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므로 몇 편의 대표작들을 통해 그의 작품론을 써보는 것으로 마쳐야 할 것 같다.

  펠리니가 초창기 영화작업을 네오 리얼리즘 경향으로 시작했다고는 하나, 페데리코 펠리니 자신이 리얼리즘에 깊이 천착했다기 보다는 그가 임해야 했던 영화 현장의 당대 경향이 리얼리즘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화적 뿌리가 골수까지 모더니스트였다는 증거 또한 없다.) 영화 <길>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한 펠리니는 그만의 영화언어들을 구사하며 현란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그 댓가로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는 잉그마르 베리이만, 장 뤽 고다르 등과 함께 모더니즘 영화의 트로이카가 되었고, 영화 속에 점점 더 많은 장식미와 자의식을 쏟아붓고자 했다.

   영화 <길>이 처음 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 모든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칭찬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당시 이탈리아 영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억압의 정당화'라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분명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관객의 호응과 더불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또 가톨릭에서 주는 영화상도 수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 <길>이 오늘날까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그런 비판들을 상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폭력에 대한 충동이다. 펠리니는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이런 충동을 스크린에 옮겼고, 이는 보편성을 획득했다. 관객들은 분명히 스크린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이 되었던 것이다.  

   영화 <길>은 그의 영화 중 어떤 작품보다도 우화적이고 풍부한 알레고리들을 감추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미녀와 야수>의 패러디이다. 바보가 된 미녀 젤소미나와 가난뱅이 뜨내기 차력사가 된 야수 잠파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또 성녀 이미지의 백치 소녀와 예수의 이미지를 가진 줄광대 마토, 그리고 무지몽매한 대중으로서의 잠파노가 그것이다.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성녀는 짓밟아 버린다. 원래 제작자는 잠파노 역에 버트 랭카스터, 젤소미나 역에 실바나 망가노를 기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 감독의 고집이 영화를 살렸다. 펠리니는 이 영화를 그의 '영감의 원천'인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의 구원이 사실은 사랑의 절망 혹은 불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구원받기 어려운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예술가의 천형이다. 이 영화가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데에는 오텔로 마르텔리의 카메라와 니노 로타의 음악 역시 크게 기여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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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들

1950  <객석의 등불 Luci del varieta>
1952  <백색의 족장 Lo sceicco bianco>
1953  <이 비테로니 I Vitelloni>
1954  <길 La Strada>
1955  <사기꾼들 Il Bidone>
1957  <까빌리아의 밤 Le notti di Cabiria>
1959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
1961  <유혹>(<보카치오' 70> 중 단편 Le tentazioni del dottor Antonio, an epi- sode in Boccacio '70 )
1962  <8 1/2>
1965  <혼의 줄리에따
Giulietta degli spiriti>
1968  <죽은 자의 영혼 Tlby Dammit>(<이상한 이아기> 중 단편), <펠리니-한 감독의 단상들 Block-notes di un regista>
1969  <새트리콘 Fellini Satyricon>
1970  <광대들 I clowns>
1972  <펠리니의 로마 Rome>
1973  <아마르코드 Amarcord>
1976  <카사노바 Casanova>
1979  <오케스트라 리허설,
Prova d'orchestra>
1980  <여자의 도시 La citta delle donne>
1983  <그리고 배는 항해한다 E la nave va>
1986  <진저와 프레드 Ginger e Fred>
1987  <인터비스타 Intervista>
1990  <달의 목소리 La voce della luna>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펠리니 - 한길로로로 016/ 미하엘 퇴테베르크 / 한길사 / 1997년 7월
- 한길사에서 인문학 시리즈로 계속 발간하고 있는 로로로총서의 16번째 권이 바로 이 책 <펠리니>이다. 영화 <배트맨>의 '조커'처럼 삐에로 분장을 하고 있는 펠리니의 모습을 표지로 삼은 이 책은 펠리니의 길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에 불과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펠리니 인터뷰 - 펠리니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 사이트이다.(영문)

펠리니 팬클럽 사이트 -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팬클럽 사이트이다.(영문)

 


   현실적으로 보자면 잔인하고 무식하며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눈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사내 잠파노가 그의 부모에게 인신을 매매하여 성적 노예로, 무임금 노동자로 순진한 젤소미나를 착취하다 결국 병에 걸리자 버려 죽도록 만든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전의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펠리니는 그 안에 순수한 인간과 동물적 속성을 지닌 남자를 등장시켜 인간의 영혼과 사랑, 구원의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보다는 그 이면의 영혼에 주목한 것이다. 자칫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만이 두드러질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펠리니는 <길>을 그런 상투성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1960년 제13회 칸느 영화제에서 펠리니에게 황금종려상의 영광을 안겨준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1959)은 극장 개봉 당시부터 수없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였고, 단테의 <신곡>을 패러디했다고도 하는 영화이다. 가톨릭 교단은 물론 이탈리아 정부도 이 영화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펠리니의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바티칸에 밧줄로 그리스도 기념조각을 운반하는 헬리콥터를 따라간다. 로마의 하늘을 뚫고 높이 치솟은 그리스도의 기괴한 그림자 아래 일광욕을 하는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며 전화번호를 받으려 하나 헬리콥터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마르첼로는 구원의 희망을 잃은 채 여자 친구를 속이면서 여러 여자들의 품을 날아다니는 불나방 같은 존재였다. 그는 상류 사회의 위선을 취재하여 그것을 가십으로 다룸으로써 살아가는 파파라초(유명인의 뒤꽁무니를 추적하며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의 원조가 된 말, 이탈리아어로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달려드는 벌레를 가리키는 말이다.)였다.

  전쟁에서 패한 뒤 불과 10년만에 다시 재건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상류층 사람들은 매일매일 타락에 젖어 있었고, 전쟁 전의 파시즘적인 잔재는 사회 도처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주인공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주변의 친구 중 거의 유일하게 이성적인 삶을 살아가는 친구에게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는데 그는 가족과 동반자살을 하고 만다. 그는 충격 속에 파시스트로서 항상 마초 이미지를 자랑하던 아버지가 창녀와의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을 목격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정적인 장면들을 통해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가는 로마의 여러 역사적 이미지들을 불러낸다. 펠리니는 펠리니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주인공을 통해 점차 내면으로 도망가며 초라해지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펠리니는 다시 한 번 <길>의 해변 장면과 흡사한 장면을 삽입하고 있다. 주인공 마르첼로가 해변에서 서 있을 때 그를 향해 소리쳐 부르는 순수한 처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서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가 구원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영화 <8½>은 유난히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하는 감독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녹아 있는 영화이자 펠리니의 영화세계의 중요한 한 뿌리였던 네오 리얼리즘과의 인연을 완전히 해소하는 영화이다. 흔히 이 영화 <8½>을 말할 때 이미 만든 8편의 영화와 그 절반이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라고들 표현하듯이 <8½>은 펠리니 영화 인생에 있어서 <길>과 함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펠리니의 분신이랄 수 있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 펠리니의 또다른 자아 '구이도'로 등장하고 있다. 구이도는 영화 속에서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장에 온 제3차 세계대전 생존자들의 우주로의 도피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영화감독 구이도는 끊임없이 동업자이자 참견꾼인 영화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다. 장장 135분 동안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감독 구이도의 예술에 대한 오딧세이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화감독 펠리니의 고백성사이기도 한 것이다. 구이도는 예언자의 반열에 올았던 예술가의 위치를 평범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앉히고, 그 누구도 인류를 위한 거대한 메시지를 담은 위대하고 거창한 영화를 만들 수 없으며 자신은 단지 그런 혼란, 불확실성, 타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그제서야 구이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펠리니는 이 영화에서 어찌보면 정신산란하기 까지한 복잡한 양식들을 반복한다. 구이도는 꿈을 꾸고, 플래쉬백하며 의식의 흐름을 추적한다. 그제서야 관객은 구이도가 만들기를 의도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영화<8½>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자 동시에 영화가 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여행의 기록이다. 펠리니는 <8½>을 통해 자신의 영화적 상상력이 고갈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했고, 이후의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형식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는 <8½> 이후 2편의 텔레비전용 영화를 포함해서 14편의 영화를 제작한다.

진정한 리얼리스트, 페데리코 펠리니

   펠리니의 영화 이력은 한 두마디로 압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그 만큼 많은 영화와 다양한 양식들을 영화 속에 시험해 본 인물이자 자신이 의도했던 영화들을 만들 수 있었던 비교적 복많은 영화작가에 해당한다. 수없이 많은 영화 작가들 중 유독 그가 가장 시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가 가장 시인의 품성에 가까이 다가선 영화 작가였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그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의 영역에서 그만의 특별하고 주관적인 감성을 동원한 영화들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8½>은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특별한 영향이 느껴진다. 그는 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되는 꿈을 꾸고 영화를 찍고 그것을 자신만의 기질 안에서 융합시켜 스크린에 투사했다. 그는 네오 리얼리즘 영화의 촬영현장에서조차 카메라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지만 그것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영화 예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진정한 리얼리스트였다.

   펠리니는  "나는 삶에 대해서 고정된 생각을 갖고 싶지 않다. "고 말했다. 그에게 내면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구분할 필요도 없고, 상대적 우열을 나눌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길>을 보면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야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때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공격성이 쏟아져 나올 길을 찾지 못해 스스로를 들볶다가도 문득 구원받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욕망의 소용돌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좋은 영화란 울림(共鳴)이 있는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펠리니의 영화들은 좋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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