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Movie > Tezuka Osamu

 

 

 

 

 

아들 마코토와 함께 한 데즈카 오사무

 

 

아들 마코토와 함께 한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 Tezuka Osamu, 1928 -1989, 일본)

 

 

 

 

 

 Inner Link

 

삶을 이어가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정신과 군국주의

 

 

 

  월트 디즈니

  미야자키 하야오

  조셉 매카시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고 외치는 구호를 종종 듣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 어휘조차 한국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원래 이 말은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재임할 당시 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우리는 그 말을 아무런 고민없이 차용해서 쓴 것뿐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고민없이 가져다 썼다는 데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과연 세계적인 것이 무엇인가?와 함께 그렇다면 한국적인 것이란 것은 또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아무 고민없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 뒤에는 배타적 민족주의, 더 나아가 징고이즘(jingoism)에 당한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trauma)가 숨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내면의 상처가 덧나게 되면 우리 자신이 도리어 그런 배타적 민족주의에게 잡아먹히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일본 아니메의 효시이자 애니메이션을 저가의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정착시킨 주범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데즈카 오사무 작품의 여러 캐릭터들

 

 

 

<철완 아톰>을 그리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 - 그가 만든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철완아톰>은 우리에게는 <우주소년 아톰>으로 미국 등지에서는 <아스트로 보이(Astro boy)>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철완 아톰> 이전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은 <토에이>영화사에서 1시간이나 1시간 반 정도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상영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TV시리즈는 매주 30분간 1년 내내 방영할 경우 26시간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다. 만약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듯이 TV시리즈를 제작한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는 55만엔이라는 극히 적은 돈으로 이 엄청난 작업을 시작했고, 그의 주변에는 그의 열정에 공감하는 많은 애니메이터들과 스텝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데즈카 씨가 그때 조금만 참았더라면 TV 애니메이션 제작비 사정이 훨씬 나아졌을 텐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가 없었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런 말을 할 자리조차 없었을 지 모른다.(밑의 사진은 데즈카 오사무가 <철완 아톰>의 한 캐릭터를 흉내낸 것이다.)

 

 

 

 

 

  징고이즘이란 일본의 고대왕국인 야마토 정권 최초 지배자인 징고(神功)라는 황후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200년경 야마토국 수장에 오른 이 여성의 이름은 일본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징고'jingo 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강경론자' 혹은 '맹목적 애국주의'라는 뜻이나, 흔히 국제관계에서는 '난폭하고 염치없는 제국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징고이즘'의 나라 일본(日本)이 내세우는 최고의 문화 상품은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우리는 '아니메' 혹은 '제패니메이션'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다. 그런 일본 아니메의 출발점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런 '징고이즘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어떤 사람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데즈카 오사무였다.

  오늘날 데즈카 오사무의 이름은 전세계 모든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에게 월트 디즈니 못지 않은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 데즈카 오사무에게서도 분명 일본적이라는 요소를 빠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만화는 다른 일본 작가들에 비해 어쩐지 비일본적이라는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의 만화는 세계적인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은 데즈카 오사무의 말속에 숨어 있다. "만화가는 무엇을 그려도 상관없지만, 단지 하나 그려서는 안되는 것이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도록 하라!  삶을 이어가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도록 하자." 는 데즈카 오사무의 정신, 그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 그의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데즈카 오사무를 일본의 만화작가가 아닌 세계의 만화작가로 만들어 낸 것은 그가 일본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률 위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자신의 양심을 만화로 옮겼기 때문이며 그것이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한국적인 것이 진정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세계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다.

유복한 유년시절과 소년기에 겪었던 참혹한 전쟁경험

  데즈카 오사무가 태어난 것은 히로히또가 천황에 오른지 3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또한 이 해는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세계최초의 유성만화영화 <증기선 윌리호>를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영화 못지않게 20세기에 눈부신 발달을 보인 매체가 만화다. 만화책에서 만화영화, 광고, 그래픽 디자인 등 여러 영역으로 만화는 대중매체로서의 비중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초창기 만화 발전의 최대 공헌자로 서양에서 월트 디즈니를 꼽듯 동양에서는 데즈카 오사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월트 디즈니에게 매카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듯이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군국주의의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했다.

  데즈카는 효고 현 오사카시() 바로 곁에 있는 신흥관광도시 다카라즈카 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의 대기업인 스미토모의 중역이었는데 그는 프랑스제 영사기로 데즈카 오사무에게 디즈니 만화영화를 틀어주었고 어머니도 만화를 곧잘 사주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한 데즈카 오사무는 매일 만화를 그리다가 손에 번진 수포를 치료해 준 의사를 보고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데즈카가 기타노(北野)중학교 마지막 학년이었던 1945년 3월 패전 직전의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연합군의 대공습이 가해졌다. 당시 오사카의 공장에 동원돼 일하던 데즈카는 마침 공장 옥상 감시탑에서 공습경계를 서다가 폭격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공장 옥상 감시탑에서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13만 가구가 불타고, 3천 1백여 명이 숨져 길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이런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고, 이런 그의 작품 경향은 그의 만화를 보면서 성장한 후배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원형(原型)처럼 자리하게 된다.

  데즈카는 그 상황이 차라리 만화이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만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데즈카 오사무가 죽기 직전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그는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일본의 패망 직전에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부 전문과정에 입학했다. 이 의학부 전문 과정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군의관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중학 졸업생을 받아 이 과정을 이수하면 전문학교 졸업자격을 주었다. 일종의 군의관, 위생병 양성과정인 셈이었다. 교토 여자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라는 부제로 저술한 『전쟁과 인간』을 통해 군의관 양성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가와씨는 초년병 교육이 끝난 뒤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도쿄 나가노의 군의학교로 보내졌다. 그는 군의 중위가 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군에서는 그에게 군의과정을 밟게 했다. 3개월간 받은 연수교육의 핵심은 "죽는 것"과 "버리는 것". 군의는 부상병을 치료할 의무가 있지만, 자신이 부상당하여 임무를 다할 수는 없게 되면 살아있을 가치가 없으므로 죽는다.  그렇게 거듭 교육을 받았다. 같은 논리로 "전선에 복귀할 수 있는 병사는 치료하고, 그 이외의 병사는 죽게 놔두라"는 교육을 받았다. "중상자를 우선 살려야 한다는 의학의 상식, 인명을 살려야 한다는 안이한 관념은 모두 없애버려라"는 말 또한 거듭 들었다.

<『전쟁과 인간』/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길/ 2000년 86쪽 중에서 >

  비록 데즈카 오사무가 이와 똑같은 방식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군국주의 치하의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분위기 속에 교육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경험은 후일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블랙잭』에 반영되었다. 그는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부가 아니라 의학부 전문과정을 졸업하기는 했지만 1953년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받았다. 1961년에는 <이형정자세포 막구조의 전자현미경적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그는 의사로 개업하지 않았고, 진료행위에 임하지도 않았다. 그가 처음 의사가 되려고 했던 이상(理想)이 군국주의 일본이라는 현실의 벽에 막혀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가 자신의 학력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의 당시 사회 분위기가 만화를 경시하는 풍조 때문에 만화가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묵인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의사가 아닌 만화가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로 데즈카는 어머니의 역할을 크게 꼽고 있다. 의학부를 다니면서 그는 출판사와 계약하여 인기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둘을 병행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까를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데즈카에게 "만화가 좋으냐, 의사가 좋으냐"고 묻고는 데즈카가 "만화가 좋다"고 답하자 "그럼, 만화가가 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그렇게 만화가가 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예술가인가 아니면 악덕 기업주인가?

  1963년 1월 1일 18시 15분, 아니메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고 의심했던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TV전파를 탄 것이다. 그러나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총 193화를 제작해서 방송하는 동안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의 애니메이터 중 두 명이 과로로 죽고, 한 명이 알콜 중독에 걸리는 등 <철완 아톰>이 '최초'라는 영예를 얻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런 까닭에 많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데즈카 오사무를 비판했고,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추모사에서조차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1963년에 그는 편당 50만엔이라는 헐값에 일본 최초의 TV 아니메인 <철완 아톰>을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이후의 아니메 제작비가 언제나 바닥에 머무는 폐해가 생겼습니다. 애니메이션에 관해서 여태까지 데즈카 씨가 말해온 것이라든지 주장한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아니메가 보고 싶다』/ 박인하 외 지음/ 교보문고/1999년 47쪽 인용에서 재인용>

  그러나 1955년 불과 27세의 나이로 일본의 만화가 중 최고의 수입을 거두었던 데즈카 오사무가 굳이 그런 모험을 한 것은 개인적인 욕심이나 명예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66년에는 직접 COM이라는 만화잡지를 창간하는 등 많은 일을 벌여 나갔다. 데즈카 오사무가 비록 앞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한 데로 많은 비용과 적은 제작비를 상쇄시키기 위해 과중한 노동으로 애니메이터들을 혹사시키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이익을 전부 다음 만화영화의 제작을 위해 투자하는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애니메이터들을 혹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시 프로덕션은 결국 경영미숙, 직원들의 이탈 등으로 1973년 4억 엔의 부도를 내고 도산해 버리고 말았다. 한때 일본 내각의 총리 월급이 11만엔일 때 연수입 2백 17만 엔을 올렸던 데즈카는 1억 5천만엔의 개인 빚을 지고 무너져 버렸다. 출판사들은 그의 원고를 거절했고, 은행도 그에게 문을 굳게 닫았다.


데즈카 오사무 연보

1928년 11월 3일 오사카부 토요나카시에서 데츠카 유타키와 후미코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7년 (9세) 곤충 채집에 흥미를 붙여 '오사무시;라는 벌레를 알게되고 자신의 필명을 '데즈카 오사무시'라고 하다.
1946년 (18세) 연초부터 데뷔작인 <마아짱의 일기장>이 <소국민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다.
1947년 (19세) 사카이 시비치 원작의 장편<신보물섬>을 간행. 재판을 거듭해 40만부가 팔리다.
1950년 (22세) <정글대제>를 <만화 소년.에 연재.
1951년 (23세) <아톰 대사>를 <소년>에 연재. 다음해부터 조연이었던 아톰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철완아톰>을 장기 연재.
1953년 (25세) <리본의 기사>를 <소년 클럽>에 연재하기 시작.
1955년 (27세) 라디오 연속 드라마 <리본의 왕자>를 라디오 도쿄에서 방송.
1959년 (31세) 1월에 오카다 에츠코와 결혼. 후지(Fusi) TV 개국 프로그램으로 <철완아톰>을 드라마화.
1961년 (33세) 나라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음. 장남 마코토 탄생.
1962년 (32세) 무시 프로덕션 설립.
1963년 (35세) 일본의 첫 국산 애니메이션 <철완아톰> 방영.
1964년 (36세) <산케이 신문>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월트 디즈니를 만남.
1965년 (37세) 미국, 유럽 등지의 스튜디오를 방문, 같은 해 10월부터 일본 내 첫 칼라 애니메이션인 <정글대제>가 후지TV에 방송.
1966년 (38세) 잡지 <COM> 창간.
1968년 (40세) 만화제작을 위한 주식회사 <데츠카 프로덕션> 설립.
1969년 (41세)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천야일화 이야기>가 대히트.
1975년 (49세) <붓다>, <동물츠레즈레 쿠사>로 문예춘추 만화상 수상. <불랙잭>으로 일본만화가협회 특별 우수상 수상.
1981년 (53세) <블랙잭> 아사히 TV에서 드라마화.
1983년 (55세) 1985년 유니버시아드 대회 마스코트 <유니탄>을 디자인.
1984년 (57세) 만화가 생활 40년. 데즈카 오사무 전집 완결.(전300권)
1988년 (60세) 전후 만화와 애니메이션계에 미친 창조적인 업적으로 아사히상 수상.
1989년 2월 9일 위암으로 사망.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우주소년 아톰 - 테츠카 오사무 시리즈/ 데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 2001년

블랙잭 - 테츠카 오사무 시리즈/ 데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 2001년

밀림의 왕자 레오 - 테츠카 오사무 시리즈/ 데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 2001년

20세기 사람들/ 한겨레 편집부/한겨레신문사/ 1995년

일본 애니메이션 아니메가 보고 싶다/ 박인하 외 지음/ 교보문고/ 1999년 -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부터 현재까지 꼼꼼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 한 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입문하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오타쿠 -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지배자들/ 오카다 토시오 지음/ 김승현 옮김/ 현실과 미래/ 2000년 -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흐름을 반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한 가이낙스 창업자인 오카다 토시오는 일본 및 세계의 21세기 문화지배자들은 '오타쿠'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 자신이 오타쿠이기도 한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들이 녹아들어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데즈카 오사무 월드 / 데즈카 오사무의 공식 홈페이지이다. 그의 약력, 작품 세계 등등 그에 관한 모든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시피 한다. 자료도 충실하고 무엇보다 그의 만화 캐릭터들이 안내를 맡고 있어 매우 즐겁다.(영문)

신영이Z의 로봇 왕국/ 신영이Z의 로봇 왕국은 데즈카 오사무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어렸을 적을 회상시킬 만한 많은 로봇 애니메이션들이 모여있다. 한 번쯤 방문을 권한다.

철완 아톰 1. 철완 아톰 2. 철완 아톰 3. / 철완 아톰에 대한 각기 다른 여러 홈페이지들이다.

 


  이런 적은 제작비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아니메'의 특징처럼 되어버린 리미티드(Limited)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리미티드 기법은 사실 일본이 개발한 기법은 아니다. 1941년 디즈니 파업 때 디즈니사를 떠난 스티븐 보서스토우가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를 설립하면서 디즈니사의 실사에 가까운 동작, 귀여운 캐릭터 창출이라는 원칙을 부정하고, 초당 사용되는 셀 매수를 가변적으로 조정한 것이 그 최초이다. 사실 이 무렵의 디즈니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애니메이션 노동자들을 탄압하여 해고하고, 폭력조직을 동원해 협박을 가하거나 공산당원으로 몰아 고발하는 등 그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주장하던 꿈과 낭만의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디즈니를 떠났고, 디즈니사의 이율배반적인 도덕률과 현실과 괴리된 작품 내용에 반기를 들었다. 디즈니 역시 이렇게 떠나간 애니메이터들이 설 자리를 잃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리미티드 기법이란 그런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리미티드 기법이란 것 자체가 실사영화와 같은 움직임을 얻기 위해 1초당 24프레임이라는 원칙을 깨고 사용되는 셀의 수를 변칙적으로 축소함으로써 제작비를 절감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법을 처음 시도한 것은 미국의 UPA사였지만 이를 장편 애니메이션에 응용하여 극대화시킨 것은 데즈카 오사무였다.

  데즈카 오사무의 이런 저가 아니메 전략은 대략 세 가지 오해 혹은 진실의 시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번째는 데즈카 오사무가 비록 아니메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고는 있지만 아니메 시스템을 저가의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정착시켜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했고, 이런 저가 아니메 전략은 결국 현재 일본의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아니메 발전의 발목을 잡았고, 데즈카 오사무가 아무리 작품을 통해 인류애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해도 목적을 위해 많은 애니메이션 노동자들을 혹사시켰다는 비판(미야자키 하야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일본의 월트 디즈니를 꿈꾸던 데즈카 오사무 - 명성이나 부의 축적면에서 확실히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디즈니와 비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왜냐하면 디즈니가 남겨놓은 작품들이 예술성에 넘치는 불후의 명작들임에 비해, 그가 만든 작품들은 상업적이며 흥미위주인 오락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라는 시각(이원복)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데즈카 오사무가 월트 디즈니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풀 애니메이션(1초당 24프레임)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기법상의 차이가 예술상의 질적 차이를 빚어내지도 않을 뿐더러 디즈니식 미국 이데올로기를 담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불후의 명작이라는 데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일 디즈니사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경우, 데즈카 오사무의 <정글대제(국내명: 밀림의 왕자 레오)>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 번째는 데즈카 오사무의 선견지명이 오늘날 '제패니메이션'이란 일본 아니메의 전성기를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애니메이션 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업계가 학수고대하는 것이 우리 방송국이 자체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방명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을 제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로봇 태권V>를 만들던 시절, 국내 TV방송국에서 값싼 외국의 애니메이션들을 수입해 방영하기 보다는 국내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하여 방송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전세계 3위 애니메이션 제작국(주로 OEM과 하청)이면서도 실제 우리 이름을 걸고 외국으로 수출되는 변변한 애니메이션 하나 없는 현실과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을 것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일견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아니메 발전에 대한 성과와 그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그의 정신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철완 아톰, 인류의 교훈이 되다

  데즈카 오사무가 애초에 만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전쟁과 군국주의가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만화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인간세계의 진면목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만화는 일본만화사에 있어서도 단순한 희극이나 소녀물이 아니라 진지한 줄거리를 담은 스토리 만화의 효시로 꼽힌다. 동시에 그는 절대적인 선이나 악을 그리는 단순한 권선징악보다는 악인조차도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그의 만화를 생각하며 읽어내야 하는 텍스트로 변화시킨다.

  1950년대 일본에서 미국의 매카시즘처럼 '빨갱이 사냥'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극우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만화를 '일본교원노조'의 어용 기관지 만화라며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였을 정도로 데즈카 오사무는 작품을 통해 일본의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이런 작품 세계는 <철완 아톰>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가는 무엇을 그려도 상관없지만, 단지 하나 그려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철완 아톰>은 인간을 대신한 도구, 로봇이지만 그들이 단순히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인격을 지닌 로봇으로 재창조했다. 그가 만들어낸 이런 로봇의 전형은 <마징가Z>와 같은 거대 로봇물에 이르러서도 로봇이 공격당할 때 탑승자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형태로 계승되는 등 로봇 만화의 전형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군국주의 일본에서 살인도구로 혹은 제국주의 침략의 수단으로 전용될 뻔했던 자신의 경험을 녹아들게 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철완 아톰>을 통해서 어린이들에게 희망은 바로 너희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한편으론 엄청난 힘을 지녔지만 작고 귀여우며 어른들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로봇 아톰을 통해 어린이들과 아톰 사이에 교감을 이끌어내고 아톰의 고민하는 모습에서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만들었다. 또한 악한 로봇 조차 악한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일을 시키고 강제하는 어른들과 인간의 책임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그럼으로써 어린이들에게 자신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어린이들에게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데즈카 오사무는 담고자 했던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작품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후배들의 비판에 고민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입원하고, 죽기 전 병실에서조차 다음 작품을 위해 구상노트를 작성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1989년 2월 9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국왕이 된 지 3년째인 1928년에 태어나 히로히토와 같은 해에 숨진 그에게는 만화와 관련해 '왕', '황제', '일본의 디즈니' 등의 수사 외에 '쇼와시대 최고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평론집만 10여 종이 나왔으며 만화평론가 뿐만 아니라 문화평론가, 사회평론가 등 많은 학자들이 나서서 그의 작품을 분석했다. 이것은 그가 만화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고, 일본의 정신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애썼던 결과이다. 그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사회 일본에서 그런 가부장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혐오했다.

 그는 가부장적인 일본 사회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혐오하는 만화를 그렸고,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반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적인 작품 세계를 보였다. 그의 이런 노력들은 패전 후의 일본 사회의 침체된 분위기를 해소하는 데 일조했고, 또한 군국주의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가 살아 생전에 길러낸 많은 후배들 중 일부는 그의 이런 노력에 반하는 작품들을 그렸고, 오늘날 일본은 재무장의 길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Home > Movie > Tezuka Os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