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끄 상뻬(Jean-Jacques Sempe,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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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끄 상뻬에 대한 짧은 삶의 기록

알베르 카뮈

K. 마르크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장 자끄 상뻬.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거다. 그가 르네 고시니와 함께 『꼬마 니꼴라』를 작업한 것이 국내에 출간되었을 무렵 참 프랑스적인 데생이란 생각을 하며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렵엔 아직 장 자끄 상뻬란 인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대학 때 리포트를 쓰느라 처음 접하게 되었던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은 뒤 그의 작품들을 찾아 읽다가 우연치 않게 걸려든 것이 『좀머 씨 이야기』였다. 지금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이들이 읽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좀머 씨 이야기』는 그냥 아는 이들만 알던 그런 평범한 책이었다. 파트릭 쥐스킨트는 그의 작품 세계가 그러하듯 매우 특이한 은둔생활로도 유명한 작가였다. 평생 외부로의 노출을 꺼려 인터뷰도 사절이고, 사진 촬영도 거부한다. 그런 까닭에 어쩌다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더라도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을 만큼 철저한 은둔자였다. 어쨌든 그런 쥐스킨트와의 인연으로 해서 장 자끄 상뻬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젊은 시절의 장 자끄 상뻬

중년의 장 자끄 상뻬

『라울 따뷔랭』에서 자전거를 못타는 따뷔랭의 이야기는 어쩌면 상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선생께서는 열두 권의 소설책을 집필하셨고 수십만의 독자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또한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지요. 선생께서는 여러 나라에 수많은 저택을 소유하고 계시고 여러 대의 요트는 물론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점은, 왜 선생은 딱 한 번만 결혼하셨습니까?" <『어설픈 경쟁』, 22-23쪽>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네. 누군가 미소 지으며 길을 건너와서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거는 거야. 감사합니다. 당신이 안 계셨더라면 이 황량한 세상에 정말 뭔가가 부족한 듯 아쉬웠을 겁니다." <『어설픈 경쟁』, 24-25쪽>

"먼저 내 소개를 하겠소. 나는 세자르 라베르뉴고, 여러 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차례 금, 은, 동메달을 땄소." <『어설픈 경쟁』, 14-15쪽>

장 자끄 상뻬에 대해 알기 위해 그의 생애를 뒤적이다 보면 그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상뻬의 작업과 그의 인기에 비해 그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것은 상뻬가 쥐스킨트와 무명 시절부터 서로 친구 사이였다는 것만 보아도 자기 자신에 대해 노출되는 것을 그가 꺼리는 편이란 것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상뻬는 1932년 6월 17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출생했다. 그가 열 살 무렵이었던 1942년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패해 프랑스 전역이 그들의 지배 아래 있을 무렵이었고, 알베르 카뮈는 같은 해 『이방인』을 발표했다. 상뻬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훗날 르네 고시니와 함께 작업한 『꼬마 니꼴라』처럼 그 자신도 대단한 장난꾸러기였고 중학교에서 퇴학당한 경험이 있다는 정도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보르도는 프랑스 서남부 지방의 대서양에 인접한 도시로, 우리가 흔히 포도주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보르도는 포도주의 집산지로 유명하지만 또한 고풍스러운 18세기 건축양식으로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높이 114m에 달하는 첨탑으로 유명한 성 안드레 성당 (Cathedrale St. Andre)도 이곳에 있다. 어쩌면 상뻬, 역시 이곳에서 자신이 앞으로 즐겨 그리게 될 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들과 사람들을 연습했을지도 모르겠다. 상뻬가 처음부터 그림과 데생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 악단에서 연주하는 것을 꿈꾸며 재즈 음악가들을 그리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중학교를 퇴학당한 뒤 그는 포도주 중개상 밑에서 자전거로 포도주를 배달하기도 했다. 훗날 가진 한 인터뷰에서 "나는 보통 사람들이 하는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것저것 시도도 많이 해보았지만……. 예를 들어, 나는 자전거로 포도주를 배달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적이 없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는 끊임없이 쓰러지곤 했다. 정말 끔찍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런 생활을 견디지 못해 징병 연한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자원하여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가 군에서 제대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무렵이었던 1953년의 일이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한창이었고,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였던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제대를 했지만 여전히 그는 무일푼으로 살아가야 했다. 자신의 데생을 사줄 신문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았다. 상뻬는 여인숙과 셋집을 전전하며 그날그날을 겨우 살아가는 신세였다. 그는 이 무렵을 "어느 날, 나는 그 동안 모은 약간의 돈을 가지고 샹젤리제 거리로 술을 마시러 갔다. 나는 어떤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맥주 한 잔과 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낭비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털어 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한다. 정식으로 데뷔하기까지 가난한 예술가에겐 맥주 한 잔과 햄 샌드위치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야 할 만큼 대단한 사치였던 것이다. 그는 훗날 명성을 얻은 뒤에도 종종 그 카페를 찾아가 같은 메뉴를 시켜놓고 과거를 회상하고는 했다고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그는 노력한 덕분으로 몇몇 신문 그의 데생을 실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뻬에게 벨기에의 신문사 <무스티크>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작품 중 하나를 그들이 발간하는 주간지의 표지로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에게 엄청난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바로 1960년 르네 고시니(R. Goscinny)와의 만남이었다. 192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르네 고시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에서 다수의 풍자만화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은 유머작가였다. 그런 그가 1959년 프랑스로 돌아와 이탈리아계 이민 출신인 알베르 우데르조(A. Uderzo), 샤틀리에 등과 함께 만화잡지 <필로트 Pilote>를 만들고, 우데르조와 함께 만든 작품이 이후 세계적으로 2억 6,000만 부가 판매된 만화 『아스테릭스(Aste'rix)』를 발표한다. 제정 로마에 대항하는 골(Gaulois)족(族) 아스테릭스와 그의 친구 오벨릭스가 주인공인 바로 그 만화의 원작자였다. 장 자끄 상뻬는 르네 고시니를 만나 그의 글에 맞춰 삽화를 작업하여 벨기에의 한 지방 주간지에 연재를 시작한다. 그 작품이 훗날 모두 5권으로 완결되는 『꼬마 니꼴라』시리즈였다. 『꼬마 니꼴라』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2년 상뻬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집『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를 발표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이미 데생의 대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상뻬는 드노엘과 갈리마르 등의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30여권에 가까운 작품집을 발간했고, 프랑스의 「렉스프레스」, 「파리 마치」 같은 잡지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9년 동안 미국의 「뉴요커」를 위해 많은 삽화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뉴요커」의 표지만 53점을 그렸다(그가 「뉴요커」를 위해 일한 작품들은 나중에 『뉴욕 스케치』란 작품집으로 묶였다). 지난 1991년, 상뻬는 1960년부터 30년간 그려 온 데생과 수채화 작품들을 모아 “빠삐용 데 자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파리 마치」는 "그의 작품은 따분한 천 편의 논문보다 현대인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뮌헨, 뉴욕, 런던, 잘츠부르크 등 주요 도시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현재 그는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지 않고 처음부터 작품집으로 묶인 책을 판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작가이며, 프랑스 그래픽 미술 대상을 수상한 공인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줍고 겸손하며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휘황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 『뉴욕 스케치』 중에서

장 자끄 상뻬의 작품 세계

장 자끄 상뻬가 아직 무명이던 시절 그는 신문에 데생 작업들을 들고 다니며 만평을 기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날 그가 세계적으로 누리는 명성을 떠올려 보면 그 시절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겠지만 그런 경험들이 명성의 기반이 되었을 거란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장 자끄 상뻬의 작업은 대략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상뻬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카툰 형태의 일러스트, 두 번째는 자신이 스토리를 구상하여 만든 아트 워크(Art Work), 그리고 마지막으로 르네 고시니, 파트릭 쥐스킨트, 파트릭 모디아노 등과 일종의 삽화가로서 공동 작업한 결과물들이다. 이중에서 특기할 사항은 장 자끄 상뻬가 일의 형태상 삽화가로 참여한 작업들에서조차 본문에 종속된 이미지를 그리는데 연연하기 보다는 그만의 느낌과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오늘날 프랑스 최고의 데생 화가로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최초의 유명세를 안겨 준 작품인 『꼬마 니꼴라』는 이미 유명 작가였던 르네 고시니의 텍스트에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종속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이미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 그림체, 전일(全一)적 구도 등이 나타나고 있다. 1989년 콩쿠르상 수상작가인 파트릭 모디아노와 『발레 소녀 까트린』를 작업하면서 그는 "모디아노의 우주에 자신이 가까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지난 1991년 『좀머 씨 이야기』를 작업하면서(상뻬는 쥐스킨트와 서로 무명이던 시절부터 친구였다.) 쥐스킨트가 좀머 씨의 죽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이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뜻에 따라 좀머 씨의 죽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쥐스킨트 역시 상뻬를 생각하여 그가 좋아하는 것들, 피아노, 자전거 등을 중요한 소재로 사용했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작가의 의지(텍스트)에 종속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년여 동안 엮어낸 『랑베르 씨』『랑베르 씨의 신분 상승』이후 우연의 일치겠지만 1985년 『어설픈 경쟁』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펼쳐진 그의 작품집들에선 일관된 흐름이 느껴진다. 『랑베르 씨』 연작의 배경은 모든 손님들이 친구같이 지내는 피카르 식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손님들이 와서 식사하는 작은 식당 "피카르"는 현대인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일상의 공간이므로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그들은 늘 작은 일에 분개하거나 흥분한다. 65년에는 젊은 랑베르 씨에게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고, 75년에는 랑베르 씨가 승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평온한 일상이 흔들린다. 85년의 『어설픈 경쟁』은 마치 랑베르 연작의 완결판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집의 87쪽에서 91쪽에 이르는 단편 카툰 연작을 살펴보자.

① 거실에 앉아 편안하게 책을 읽고 있는 중년의 부인이 맞은 편 창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이사와 집안 꾸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② 중년의 부인은 같은 자세로 책을 들고, 맞은 편 창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녀는 안경을 끼고 있다. 맞은 편 집에는 남자가 선물을 들고 찾아왔고, 젊은 아가씨는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③ 페이지가 넘어가고, 부인의 안경은 더욱 커졌고, 맞은 편 집 아가씨와 젊은 남자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④ 이제 부인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맞은 편 집 부부에겐 아이가 생겼다. ⑤ 부인의 헤어스타일이 제법 짧게 바뀌었고, 뜨개질을 하고 있다. 맞은 편 집 부부의 아이들이 제법 자랐다. ⑥ 부인은 노인이 되었고, 류머티즘 때문인지 한쪽 슬리퍼 발밑엔 쿠션을, 그리고 오른 손엔 지팡이를 짚고 있다. 맞은 편 집 여인은 홀로 집안 청소를 하고 있다.

⑦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부인의 허리는 더욱 꾸부정해졌고, 그녀의 소파 옆엔 지팡이 대신에 목발이 그녀의 발치엔 약병들이 놓여 있다. 맞은 편 집 여인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⑧ 이제 부인은 더 이상 소파에 앉아 있지 않다. 소파는 텅 비었고, 맞은 편 집 여인은 안경을 끼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⑨ 할머니의 소파가 치워져 있고, 새로운 짐들이 들어온다.

⑩ 맞은 편 집 여인은 이제 안경을 끼고 거실에 편안히 앉아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맞은 편 창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이사와 집안 꾸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마치 M.C. 에셔의 순환하는 그림처럼 우리 네 일상의 쳇바퀴가 모이고 모여 일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구조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게 별거냐는 장 자끄 상뻬 특유의 관조랄까, 위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개성(personality)을 대단한 장식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지만 실제 삶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현대인의 몰개성을 드러낸다. 『어설픈 경쟁』을 통해 장 자끄 상뻬는 앞서의 이야기들을 살짝 변주하여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상뻬의 『어설픈 경쟁』은 표지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체스판 위에 놓인 넥타이를 맨 남자의 모습, 어쩐지 남의 얼굴을 보는 것 같지 않다.

상뻬의 작품에서 종종 사람(한 개인)은 아주 작은 미립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특히 그 사람이 허장성세로 가득한 인물이라면 더욱더 작아진다. 이 작품에서 상뻬는 펼친 면을 이용해 화면 가득 들어찬 수풀과 나무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자그마한 이젤을 놓고 화가 양반이 팔레트를 손에 끼고 이렇게 읊조린다.

"먼저 내 소개를 하겠소. 나는 세자르 라베르뉴고, 여러 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차례 금, 은, 동메달을 땄소." <『어설픈 경쟁』, 14-15쪽>

위대한 창조자(자연) 앞에서 작은 창조자인 화가(인간)가 우쭐대는 순간, 인간은 더욱 왜소해진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작가와 방송 진행자가 앉아 있다. 방송진행자가 질문한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거대한 마천루,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두 사람이 걸어간다.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지닌 매력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그의 작품들이 매번 특별한 변화를 꾀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의 초기작으로부터 후기작에 이르는 동안 그림체에도 약간의 변화들이 있었다. 선이 좀더 가늘어졌다거나 등장하는 이들의 머리숱이 제법 줄어들었다거나 하는 변화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에 의한 따스함이다. 유머 작가 사비냑은 「리베라시옹」을 통해 "상뻬는 자기가 우리 편이며,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고, 늘 실망하는 몽상가라는 사실을 곁눈질로, 그리고 연필 끝으로 우리에게 점잖게 일깨워 주곤 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 자연은 인간에 비해 늘 거대하게 그려지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향기를 뿜어내는 것은 도리어 인간들, 철저하게 인간의 세계, 인간의 관계가 빚어내는 묘한 아우라의 향연들이다. 삶이란 체스판에 놓인 채 집값을 염려하고, 날로 두둑해지는 아랫배와 종종 자신을 앞질러 성공하는 이를 질투하는, 그럼에도 이 황량한 세상에서 누군가 내게 당신이 계셔서 다행이란 말을 듣고 싶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장 자끄 상뻬는 1987년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집의 제목은 보들레르의 시에서 따온 말로, 마티스 역시 같은 제목의 그림을 발표한 적이 있다. 보들레르가 세기말 파리의 우울을 그렸다면, 상뻬는 이 제목을 차용함으로써 ‘새로운’ 세기말에 봉착한 한 소시민의 절망에 가까운 희망(혹은 욕망)을 통해 삶의 결핍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어 1989년 「뉴요커」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뉴욕 스케치』를 출간하는데, 이 작품집에는 말 그대로 뉴욕이란 거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심성을 이방인의 따스한 시선으로 날카로우면서도, 동시에 부드럽게 묘사해내고 있다. 그리고 1991년 『좀머 씨 이야기』가 출간된 같은 해에 출간된 『속 깊은 이성 친구』에서 상뻬는 갑자기 수다스러워진다. 이 때 「리베라시옹」과 가진 인터뷰에서 글 쓰는 화가라는 사람들의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상뻬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 피아니스트를 공격하는 식으로 나를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 “재즈 음악가들은, 특히 그들이 흑인일 경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천부적인 리듬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음악 이론에는 완전히 무지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 음악가들은 거의 모두가 대단한 학자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진지한 음악도 연주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나를 대할 때도 그 음악가들을 대할 때와 조금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사람들은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는 사실에 언제나 놀라곤 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다른 것, 예를 들어 진짜 초상화 같은 것을 그릴 줄도 안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한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는, 데생은 문맹자들도 할 수 있는 일, 무능력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난다.

"괴물처럼 연기를 내뿜는 쇳덩이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어지러운 속도로 달리는 차 창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고 있소. 나를 실은 기차는 소리유를 향하고 있소. 그곳에서 부치게 될 이 편지는 닷새 후면 당신에게 도착할 거요.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소. 하지만 지난 3월 당신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게 된 이래, 내 가슴은 성급함으로 요동치고 있다오. 언젠가 우리의 약혼을 기념하게 될 날을 기대해도 좋다고 대답해주오. (내가 일주일 내에 도착하게 될 -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 마드리드에서 그 대답을 해주시오.) 지금이 7월이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내년 초까지 대답해주시오. 기한이 촉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엘리자벳, 당신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소. 하지만 이제 우린 속도의 시대로 들어섰고 나 역시 이 시대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오." <본문 55쪽>

작품 연보

1962/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Rien n'est simple)

1963/ 모든 것이 복잡해진다
(Tout se complique)

1965/ 랑베르 씨 (Monsieur Lambert)

1972/ 마주보고 (Face face)

1975/ 랑베르 씨의 신분상승
(L'ascension sociale de Monsieur Lambert)

1977/ 가벼운 일탈 (Un lger dcalage)

1983/ 아침 일찍 (De bon matin)

1985/ 어설픈 경쟁 (Vaguement comptitif)*

1987/ 사치와 평온과 쾌락
(Luxe, calme et volupte)*

1989/ 뉴욕 스케치 (Par avion)*

1990/ 여름 휴가 (Vacances)

1991/ 속 깊은 이성 친구
(Ames soeurs)*

1993/ 풀리지 않는 몇 개의 신비
(Insondables mystres)

1995/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Raoul Taburin)*

1997/ 거창한 꿈 (Grands rves)*

1999/ 아름다운 날들(Beau Temps)

2001/ 파리 스케치(Un Peu de Paris)

2002/ 바보 같은 짓을 했어
( Il a fait l'idiot a la chapelle!)
- 글/ 다니엘 오퇴유 (Daniel Auteuil)

2003/ 겹겹의 의도(Multiples Intentions)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1월

『성완경의 세계만화탐사 - 그림으로 찾아가는 세계만화의 23개 보물섬』 / 성완경 (지은이) | 생각의나무/ 2001년

Ruru&Sempe
(http://www.ruru76.wo.to)

얼굴 빨개지는 아이(http://comagoekf.naweb.cc/face/)

삽화가 있는 집
(http://www.sempe.wo.to)

* 위의 세 사이트는 장 자끄 상뻬의 국내 팬 사이트들이다.

장 자끄 상뻬와 따뷔랭(자전거)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멋진 것을 만들어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행만을 만들어낸다.
- K. 마르크스 『경제학-철학초고』

앞서도 이미 많이 이야기되고 있듯 상뻬의 작품 세계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자전거(bicycles)다. 쥐스킨트는 삽화를 그리는 상뻬를 위해 『좀머 씨 이야기』에도 자전거가 등장하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상뻬의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95년에 발표한 『따뷔랭(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까지 이어진다. 자전거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의 힘으로 바퀴를 회전시켜 움직이는 2륜차"이다. 앞뒤 한 줄로 세운 두 바퀴를 설치한 차체를 타고 사람의 발로 움직여 앞으로 달린다는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한 탈 것이면서 육체의 힘을 이용한 탈 것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생존할 법한 물건이기도 하다. 자전거의 역사는 1790년까지 거슬러 올라야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전거(페달에 의한 회전을 체인으로 연결하는 방식)가 개발된 것은 1869년의 일이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농업과 수공업에서 도시 산업 노동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농촌 지역 역시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고, 공동경작지를 빼앗고, 오랫동안 가난한 농부들에게 속해 있던 방목권 역시 박탈당했다. 결국 농촌 지역의 빈곤은 이들이 도시 지역의 값싼 노동력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를 얻어야만 했으므로 보건 시설이 전혀 없는 빈민가에서 살아야 했고, 안전장치도 없는 기계를 다뤄야 했다. 미성년자는 물론 아동들까지 노동에 나서야 했던 탓에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19세에 불과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구 사회의 노동자는 비로소 여가(leisure)란 것을 알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 초기의 영국 노동자들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노동했고, 이와 같은 장시간 노동은 인간의 신체 한계를 시험했다. 그러나 당시의 자본주의는 생산증가와 이윤확대를 위해 노동 착취 외엔 별다른 수단이 없었던 시대였다.

1830년대에 이르러 노동계급이 조직화되고, 기술 혁신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자본가계급 역시 노동자들의 각성과 더불어 인내력에도 한계가 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육체적 황폐화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자본 축적을 가로 막는다는 인식(제1차 세계대전에 징병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신체검사를 실시한 결과 징병 가능한 노동자 수가 태부족했던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 1847년에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노동시간이 더 단축되고, 토요일의 경우 노동시간은 4시간으로 줄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8시간 노동제 역시 1880년대 수많은 노동자들이 피와 땀으로 얻어낸 성과였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의 노동자들에게 여가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때마침 등장한 여가 문화가 바로 축구와 자전거였다.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을 통해 축적된 재화를 지불해 자전거를 구입했고, 자전거를 타고 인근의 산과 들로 피크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여가소비를 산업화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여가문화 역시 자본주의의 체제 내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방식, 즉 소비하는 형태의 여가에 사로잡혀 자본의 이익창출 방식에 적합한 여가소비가 권장되기에 이른다. 모두가 바캉스를 떠날 때, 나도 떠나야 하고, ‘캐리비안 베이’에서, ‘롯데월드’에서 줄을 서 놀이기구를 타야만 하는 곤욕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여가조차도 거대한 자본주의 틀 안에서 강제로 쉬어야만 하는 시스템, 주5일 근무제 시행의 밑바탕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이제 여가시간의 합리적 소비(여가를 어떻게 해서든 즐기지 못하는 자는 바보라는 이데올로기는 다시 새로운 강습소들 - 댄스, 스포츠 등의 레저산업들을 만들어낸다)야말로 노동계급이 지녀야 할 새로운 태도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파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돈, 자본,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이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상품으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상품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 자끄 상뻬의 라울 따뷔랭은 이와 다소 다른 의미에서의 소외를 그린다. 그는 자전거를 수리하는 데 있어 최고의 장인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산물을 '자신들 외부에 있는 낯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공장시스템에 의해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된다. 공장시스템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법이고, 시스템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따뷔랭은 그 자신이 자전거를 타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생산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어쩐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에 의해 주체성을 잃지만 우리 시대의 채플린인 따뷔랭은 자신의 창출해낸 산물을 즐길 수 없기에 주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장 자끄 상뻬가 의도한 바는 그것이 아니겠지만...

장 자끄 상뻬의 문명비판과 게으름에 대한 찬양

굳이 앞서 언급했던 「파리 마치」의 비평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뻬의 작업들에서는 사회학자들이 어렵게 파고 들어간 연구들, 문명 비판적인 요소들이 너무나 잘 표현되고 있다. 그 까닭 가운데 하나는 상뻬가 시인(詩人)과 마찬가지로 이론이나 통계가 아닌 직관에 의존해 세상의 진실에 육박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방법론이 자료를 충실히 조사하고, 통계를 내고 그에 따른 근거에 입각해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bottom up)이라면 장 자끄 상뻬는 전일적 관점(topdown)을 통해 바로 결론에 도달한다.

상뻬의 85년 작품집인 『어설픈 경쟁』과 97년 작품집 『거창한 꿈』은 국내에서는 모두 같은 해인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실제 발표 연도와 상관없이 두 작품집은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보인다. 앞의 책에서 "세자르 라베르뉴"란 화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스스로 전람회에서 받은 상을 자랑하는 인물 - 이 책에선 그 자연 한 가운데 여인 한 명을 배치하고, 다시 전작의 화가인 듯한 인물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인이 외친다.

"나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러고보니 화가와 여인 사이가 제법 멀다. 자연 속에 파묻힌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왜소한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만 왜소해지는가? 상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거창한 꿈』에서 상뻬는 문명과, 문명이 일구어낸 조직 속에서 한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지난주, 그러니까 내 퇴직을 삼 개월 앞둔 날이었지. 인사과 비서실의 콜레트 부인이 나한테 그러더군. (프로시냐르 씨, 상부에서 <프로시냐르 이후>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거 아세요?) 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다네. (<프로시냐르 이후> 를 말하는 것 보니 <프로시냐르라는 존재>가 있긴 있구나) 라고 말일세. 고백컨대, 그 얘길 듣고 나서 썩 만족스러웠다네." <본문 17쪽>

나란 존재가 과연 세상 어디에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듯 제 이름으로 된 묘비명 하나를 남기기 위해, 죽어라 욕망의 흔적들을 쌓아 올리는지도 모른다. … 그리고 결국 모두 죽는다. 몇 개월도 가기 전에 잊혀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상뻬의 문명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펼친 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철도 레일과 그 위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 농촌을 건너가는 증기기관차. 양떼가 증기기관차의 서슬에 놀라 한쪽으로 도망가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마을 사람들, 베어낸 밀을 가득 실은 말이 놀라 짐이 떨어지고, 아이들은 집 안으로 줄행랑을 친다. 멀리 미루나무가 높이 솟은 운하로 짚단을 실은 화물선이 양안으로 이끄는 말의 힘에 이끌려 흘러간다. 저 쪽 구석에서 개가 놀라 짖는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책 『거창한 꿈』에 실려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상뻬는 의뭉스럽다. 의뭉스럽게 이런 그림에 저런 글을 적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안 되었고, 그대 손에(입술도 아니고) 키스 한 건 지난 3월(지금이 7월인데 말이다)인데 결혼해달라고 급하게 말해서 미안하단다. 그것도 속도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불과 1-200년전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얼마나 빠른 시대에 살고 있는가. 장 자끄 상뻬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느리게 사는 법, 게으름의 철학을 설파하고 있다. < 2005. 9.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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