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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다쿠보쿠 ( 石川啄木, Ishikawa Takuboku, 1886 - 1912, 일본 )
 

 

일본 - 섬광() 속에 빛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백석

우치무라 간조

니시다 기타로

미키 기요시

후쿠자와 유키치

 

광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순간적으로 번쩍 빛나는 빛"이라고 정의하고, 백과사전에 보면 "광물이 나타내는 특수한 광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말을 염두에 두고 '섬광'이란 말이 풍기는 뉘앙스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이미지를 그려보면 내 머리 속에는 어김없이 일본 사무라이 영화(만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눈매의 혹은 장님 검객이 놀라운 발도술을 보여주면 환한 한 줄기 빛이 스쳐가면서 상대방은 어김없이 목을 잃고 쓰러지거나 붉은 피를 쏟아내면서 쓰러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인 하이쿠(俳句)와 단카(短歌)를 일본인들이 만들어 내고, 오랫동안 즐겨온 것은 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적합한 문학 형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세 줄도 길다"는 하이쿠와 단카는 '단시조'가 있는 우리 입장에서도 아주 낯선 형식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 태어나서 불과 26년만에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이 있다. 아르튀르 랭보도 요절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던 것에 비하면 다쿠보쿠가 26세에 요절했다는 것은 굳이 불교적인 해석을 달지 않더라도 정말 찰나()의 시간동안 세상에 머물렀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랭보가 비록 20세의 나이로 문학과 완전히 절연했다고는 하더라도 다쿠보쿠 역시 랭보만큼이나 문학에 매진한 시간이 짧은 시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에서 다쿠보쿠의 위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국민시인, 민족시인, 천재시인, 망향시인, 경세(警世)시인, 방랑시인 등의 수식어가 반드시 붙는데, 내가 굳이 그에게 별칭 하나를 덧댄다면 섬광의 시인이라고 하겠다. 그의 짧은 생애가 그러하며 그의 작품들이 또한 그렇다. 그에게 삶이란 괴로움 그 자체였기에 그리도 일찍 떠나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시부타미의 다쿠보쿠 출생터에 세워진 기념비

 

 

 

쿠시로시에 서 있는 다쿠보쿠 동상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관

 

 

 

 

A Statue of Takuboku with His Pupils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메이지 천황 암살 계획 사건
(일명 : 코토쿠 슈스이 대역사건)


1910년 5월에서 9월에 걸쳐 나가노, 도쿄, 오사카, 구마모토 등 각 지방에 사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다수 체포되었다. 그 중 코토쿠 슈스이 이하 26명이 천황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26명의 피고는 대법원에서 비공개 재판을 받고, 1911년 대역죄란 죄목으로 24명은 사형, 2명은 유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24명 중 12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나머지 12명은 결국 사형에 처해지고 만다. 감형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옥중에서 자결하거나 병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역대 정부에 의해 계속 은폐되어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사건 연루자 중 단 한 명의 생존자인 사카모토 세이마가 무죄를 증명하는 새로운 증거 자료들을 모아 대법원에 재심청구소송을 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려 했던 일본은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예상했던 전쟁 배상금을 거의 받지 못해 막대한 군비 지출이란 후유증만을 남겼다. 그 여파로 가쓰라 내각이 물러나고,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들어서는데 사이온지 내각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06년 일본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인 일본 사회당이 창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수장으로 하는 군부를 비롯한 일본의 우파는 이런 새 내각의 방침에 반대하였다.

때마침 1907년 11월 3일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사회주의자 소그룹이 "무정부당 암살주의자"란 서명으로 "일본 황제 무쓰히토 군에게 보낸다"란 대담한 내용의 천황 비판 문서를 공표했다.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한 사건이었지만 야마가타는 이것이 사이온지 내각이 사회주의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펼친 탓이라 생각하여 천황을 만나 사이온지 내각을 물러나게 만들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1908년 6월 들어선 가쓰라 내각은 사회주의에 대한 잔혹한 통제를 시작하여 미행, 언론통제, 사생활 간섭 등으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의 숨통을 옥죄어 들었다.

이런 상황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그룹에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분열과 반목, 이탈하는 그룹 등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때 천황에 대한 국민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깨우침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한 제재소 직공인 미야시타 다키치는 천황을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제조하기로 했다. 그는 이 일에 칸노 스가, 니시무라 다다오, 후루카와 리키사쿠 등이 관계했으나 고토쿠 슈스이 등은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야시타의 이런 움직임은 그의 행동을 감찰해오던 마쓰모토 경찰서의 끄나풀에 의해 이미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근절'이란 정치 방침에 충실한 가쓰라 내각은 이 사건을 빙자로 전국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그 영향 아래 있는 그룹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유명한 문필까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코토쿠를 이 사건의 주모자로 조작하였고,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 관련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두 체포해 들였다. 이렇게 체포된 사람들은 방청객은 물론 증인도 없는 한 차례의 재판 결과에 따라 정도 이상의 잔혹한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재판 당시에도 이미 대부분의 피고가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 일본은 물론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외국도 재판 결과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가쓰라 내각은 사회주의 척결이라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했고, 이 사건의 결과 일본에 겨우 뿌리내리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시대가 흘러 사건 방생 만 50년이 흐른 뒤 유일한 생존자 사카모토의 재심 청구에 의해 사건의 진위가 드러나게 되었다.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역시 당시 사건의 진실 대부분을 알고 있었고, 그 처분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가 바로 <코코아 한 잔>이었다.
<참고: 상식 밖의 일본사/ 안정환 지음/ 새길/ 1995년>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902년의 사진)
 

1886년 일본 이와테 현에서 출생

1902년 모리오카 중학교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문학에 몰두하고자 동경으로 올라와 요사노테강의 지도를 받음.

1903년 병을 얻어 귀향. 10월에 「명성」에 장시를 발표.

1905년 처녀시집 『동경(憧憬)』출간. 모리오카에서 세츠코와 결혼.

1907년 임시 교원으로 부임한 학교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교장을 전출시키고 자신 또한 면직됨. 5월에 훗카이도(北海島)로 이주. 이때부터 직장을 찾아 떠도는 유랑의 인생이 시작됨.

1909년 생활이 몹시 어려워 아내가 딸을 데리고 가출함.

1910년 코토쿠 슈스이(辛德秋水)의 대역사건발생. 이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짐.

1911년 사회주의 경향의 시 발표. 궁핍한 생활을 보다 못한 아버지 집을 나감.

1912년 3월 어머니 폐결핵으로 사망. 4월 13일 타쿠보쿠 또한 폐결핵으로 인해 26세로 세상을 떠남. 6월 유고시집 『슬픈 장난감』 출판. 아내 세츠코도 역시 이듬해 5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남.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선』/ 이시카와 타쿠보쿠 지음/ 손순옥 옮김/ 민음사/ 1998년에서 발췌 >

 

다쿠보쿠의 아내 세츠코(Setsuko,1912)

 

 

메이지 유신과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카와 다쿠보쿠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격변기였던 메이지 시대를 살아간 시인이었다.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곧바로 서구화와 등치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 서구적인 정치제도와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들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는 각기 다른 차이가 있다. 우선 중국과 한국은 서구 혹은 서구의 경험을 이식받은 일본에 의한 침탈, 식민지를 체험한 데 반해서 일본의 근대화는 그런 경험없이 이룩된 것이고, 중국과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한 차례 이상 이념이 개입한 혹독한 내전을 경험했으나 (중국의 국공내전이 그렇고, 우리의 한국전쟁 과정 - 그것을 근대화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일본은 그런 내전의 경험이 없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제122대 왕으로 1867년부터 1912년까지 재위했지만, 메이지 유신은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자본주의 형성기는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 함대가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온 1853년부터 1877년까지를 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 왜 내전이 없었는가라고 되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일본도 개항 무렵에 사츠마와 초슈를 중심으로 한 토막(막부토벌)파와 막부파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전의 발단은 일본의 전국 시대가 그러했듯이 권력 상층부 사이에서 권력자와 권력에 소외된 자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쟁탈전의 성격이었다. 그것이 일본의 미래를 결정한 것은 내전의 결과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토막파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지 애초부터 내전에 의해 결정된 부분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토막파가 내세웠던 구호가 '존왕양이'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막부파와 치열한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어느 한 쪽을 완전히 섬멸하는 식의 전투도 아니었다. 실제로 결과 진행 역시 쇼군이 자신의 지위를 선위하는 방식으로 승부 - 대정봉환(還), 구로후네(흑선)의 도래 이후 반막부파의 도전이 잇따르자 더 이상 정권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에도 바쿠후는 1867년 11월 조정()에 대한 정권 반환을 제의하고, 다음날 그것이 수락됨으로써 에도시대는 끝을 맺었다. -가 결정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는 과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의 역사에서 유신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혁명은 없었다. 일본의 내전은 대개가 권력층 사이의 내전이었으므로 일반 평민들에게 그것은 비록 괴롭고 목숨을 빼앗기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권력쟁탈에서 소외되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먼산의 불구경이었던 셈이다. 그런 일본에게 근대와 현대에 걸쳐 두 차례의 커다란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 첫 번째가 일본의 역사만화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구로후네'의 도래이고, 두 번째는 흑선의 도래로 시작되고 성장한 일본의 사회와 체제가 끝간데를 모르고 내달리다가 결국 핵의 충격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의 천황제야 변함없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일본에 새로운 혁명적 변화(민주주의)가 시작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일본이 강제 개항된 것이다. 흑선의 도래 이후 존왕양이를 외치던 사츠마번은 이에 저항하다 서구에 의해 그들의 근거지가 초토화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이후 본격적인 개항과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흑선의 도래는 일본에게 있어 원나라의 침공을 가로막았던 가미카제의 위력도 소용없었던 첫 번째 경험이자 그 변화는 일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에 비견할 만한 일이었다. 일본 민중의 삶에도 이런 변화는 극적으로 다가왔다. 작게는 육식(소고기) 습관의 유행부터 크게는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정치 개념이 등장하는 등 변화의 물결은 그야말로 해일처럼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유신이었다.

환난신고(患難辛苦)의 시작 - 모리오카 중학 자퇴와 아버지 잇테이의 가출

  쿠보쿠는 5년마다 한 번씩 일본이 크게 변한다고 할 만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본의 동북지방인 이와테현 모리오카의 한 변두리, 히노토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제창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구호 아래 일본은 빠른 속도로 서구의 물질 문명을 흡수했다. 국가적으로는 그들의 부국강병을 배우고자 했고, 개인으로는 신분 해방과 인간 해방에 따른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그의 아버지는 승려였고, 위로 딸 둘만을 두고 있던 터라 뒤늦게 태어난 다쿠보쿠에게 쏠린 이들 부부의 애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일본의 동북지방이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이긴 했으나 사찰의 주지였던 부친 덕에 어렸을 때의 그는 상당히 유복한 편이었다. 훗날 그가 씀씀이가 헤프고, 반항 기질이 있어 어디서나 자주 문제를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던 어린 시절의 이런 성장배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부친 잇테이가 시부타미 마을의 주지가 되어 가족 모두 시부타미로 이주한다. 어린 다쿠보쿠에게 이곳 시부타미의 우뚝 솟은 이와테산과 부드러운 히메가미산,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키타카미강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시인으로서의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배경이 되어 주었다. 시인은 많은 작품 속에서 고향 이와테의 아름다움과 정겨움을 노래했다. "정들은 고향 그 사투리 그리워/ 정거장으로 붐비는 사람 속에/ 고향 말 찾아가네" <봄의 진눈깨비>라는 제목의 단카 5수 중 한수로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향하는 시발점인 우에노 역에 나가 고향 사투리를 듣고자 하는 향수의 심정을 노래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하기는 했으나 공부는 곧잘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모리오카 중학에 입학한다(12세).

  다쿠보쿠의 중학 시절은 그를 평생동안 괴롭힌 가난과 인연을 맺게 되는 시작이었다. 1902년 10월 27일자로 처리된 그의 자퇴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로는 4학년 3학기와 5학년 1학기의 2번에 걸친 시험 중의 부정행위와 5학년에 진급한 후의 지나친 결석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다쿠보쿠 연구가들은 그가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그가 가난으로 인해 진학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학업을 포기하고 문학에 전념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세츠코와의 연애 감정이 학업을 등한히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중학교 3학년 당시의 스트라이크 사건에 그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맞는 이유이든 간에 다쿠보쿠가 매우 조숙했으며 일찌감치 문학에 뜻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다쿠보쿠는 중학교를 자퇴할 무렵인 1902년 10월 당시로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잡지 <명성>에 그의 단카가 뽑히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그는 이때 쓴 시를 모아 1905년 5월 그의 첫 번째 시집 『동경(憧憬)』을 출판한다. 이 시집의 내용은 주로 세츠코와의 연애 감정을 노래한 것이 많아 감각적인 수사와 형식이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쿠보쿠가 중학을 자퇴한 뒤인 1904년 12월 그의 아버지는 종비 135엔을 체납했다는 이유로 조동종(曹洞宗) 총무원으로부터 보덕사 주지 자리에서 면직당하고 만다. 이때 다쿠보쿠는 자신의 처녀 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동경에 가 있었다. 승려였던 잇테이는 다쿠보쿠를 승려로 기르고 싶지 않았고,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순순히 사찰을 떠났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다쿠보쿠 일가는 이때부터 끝없는 가난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다쿠보쿠는1905년 어린 시절의 연인이었던 세츠코와 결혼해 이듬해 시부타미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주지직 복귀를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아버지는 그만 가출해 버리고 만다. 아버지 잇테이가 가출해 버리자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된 다쿠보쿠도 더 이상 시부타미에 머물 이유가 없었고, 온가족이 마치 야밤도주라도 하듯이 시부타미를 떠났다. 그러나 모리오카 중학 중퇴의 학력은 이때부터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입신양명과 성공이 가장 중시되던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 속에 그의 학력은 실제 그가 가진 능력과 상관없이 낮은 대우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한 줌의 모래와 슬픈 장난감

  은 그의 인생에서 그나마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면 세츠코와 결혼하고 그의 첫시집이 나온 1905년의 짧은 1년이었을 것이다. 1907년 21세가 된 그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한 달에 8엔의 월급을 받기로 하고, 잠시 시부타미 소학교의 임시 교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가기엔 다쿠보쿠의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 그는 교원 자리를 얻자마자 <요미우리신문>, <마이니치신문>, <만쵸호>,<이와테일보> 등 네 가지 신문을 구독신청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학교 개혁을 위한 스트라이크에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곧 직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결국 그해 5월에 가족을 이끌고 훗카이도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훗카이도에 남겨둔 채 그는 소설을 써서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서 친구에게 가족을 맡겨두고 자신은 도쿄로 왔다.

 도쿄에서는 그의 어려움을 도와주었던 모리오카 중학 선배 긴다이치 쿄스케가 자신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얻어준 돈 5엔으로 목련꽃 1엔 어치와 1엔 짜리 꽃 병을 사기도 했다. 물론 다쿠보쿠 자신도 자신의 씀씀이가 헤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츠바라 신이치는 "그러나,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담배값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겨우 손에 넣은 6엔의 돈을 목련 사는 것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성격의 사람이 현세를 무사히 살아남는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즉, 그러한 사람은 어디서 인생을 헛디딜지 모르는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긴다이치 교스케 역시 "나도 목련이 정겹기는 했으나 내 옷을 전당포에 맡기고 빌린 돈인 만큼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약간 쓴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쓴 소설은 인정을 받지 못했고, 잡지사에 팔지도 못했다. 그는 소설이 실패하자 1908년 6월 24일부터 25일 새벽 2시까지 하룻밤 사이에 141수의 단카를 지었으나 단카는 그에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다.

  그는 가집(歌集) 『한 줌의 모래』에서 "동해바다의 자그마한 갯바위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벗하였도다"라고 노래한다. 당시 다쿠보쿠는 고향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 이산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이 때 하코다테 상공회의소에서 일급 60전을 받으며 선거인 명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읽고 싶은 책에 대한 욕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가난하고 힘든 생활 중에도 새로 나온 책을 사서 읽는 것은 그의 가장 큰 기쁨이었지만 며칠 뒤면 다시 팔아야 하는 책을 구입하고, 이를 다시 후회하는 일기를 남겼다. 그는『슬픈 장난감』에서 "책 사고 싶어, 책을 사고 싶어서/ 떼 쓸 생각은 아니지만, / 처에게 말해보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책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그였으나 생활을 위해 얼마남지 않은 책을 차례차례 팔고 결국 남은 것은 "때묻어 더러워진 독일어 사전 하나"밖에 없는 비참한 심정을 노래한 시도 있다.

  1910년 12월호 <정신수양>이라는 잡지에 발표된 <벼랑의 흙>이란 제목의 단카 21수 중의 한 수를 보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대하듯
죽은 자식 이마에
자꾸만 손 가누나

  이 시는 태어난지 겨우 24일 만에 죽은 장남 신이치의 죽음을 아비로서 다쿠보쿠가 읊은 시이다.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에 직면하게 된 시인은 그것을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대하듯"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자식을 얻었고, 그의 처녀 가집 <한 줌의 모래>가 동운당(東雲堂) 서점에서 출판하게 된 1910년 10월 27일 밤, 그가 늦은 야근을 하고 돌아오니 자식이 막 숨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그해의 일기에 "태어나자 허약하더니 불과 25일밖에 살지 못하고 같은 달 27일 밤 12시 조금 지나서 숨졌다. 마침 야근이라 일을 하고 돌아와보니 막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의사가 놓은 주사도 효과가 없었으며 체온은 새벽까지 남아 있었다." 라고 썼다. 너무나 궁핍하여 결국 온가족이 폐결핵으로 숨지고 말았던 다쿠보쿠 집안의 내력을 보았을 때 장남 신이치의 죽음 역시 가난으로 인한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가 시인의 삶보다는 소설가의 삶을 더 소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에게 시는 생계를 유지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지 결국 밤새 단카를 지으면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시밖에 없음을 한탄하여 이를 '슬픈 장난감'이라 했던 것이다.

참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 다쿠보쿠

  리에게 고통스러웠던 '근대의 기억'은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근대화 역시 그들 사회의 내적인 필연성이나 필요에 의한 요구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라는 외세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일본의 한 전범은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묻는 법관에게 "그건 페리 제독에게 따지라"고 했던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맥락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미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일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처럼 땅과 민중을 넘기고 상류층은 그 지위를 유지하는 방식이나 아니면 국력을 신장해 그들과 하루라도 빨리 대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만이 그들의 살 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을 배워 국력을 신장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외적 자극 아래 놓이게 된다. 일본은 서구를 통해 그들의 문물과 자본주의, 산업의 토대를 닦는다. 그러나 물질적인 면에서의 성장이 곧 정신의 근대화까지 일궈주지는 못했다. 일본은 서구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바탕에는 다른 민족을 식민화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로 조선을 노렸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09년 10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격렬한 의병항쟁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중심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초대통감을 사임하고, 남만주를 확보하기 위해 북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러시아군 의장대만이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권총 탄환은 삼엄한 경비와 경호를 뚫고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을 거두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는 우리 민족의 시각으로 보자면 조선을 병탄하고 우리 민족의 숨통을 끊어 논 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어 온 민족 지도자, 군부의 정치 참여를 거부할 수 있었던 거물급 정치인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토의 죽음은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 적절한 제동을 걸어줄 브레이크를 잃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1909년 10월 26일까지 40여년간 근대 일본의 정치 일선에 서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는 데 깊이 개입했고, 헌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내각제도를 만들어 2년 4개월간 초대 내각 총리 대신을 지냈다. 그는 통틀어 7년 7개월간 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전으로는 최장수 기록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사실상 국부의 한 사람이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역시 그런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나는 한국인의 애처로움을 알아, 아직도 진정으로 미워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 관대한 마음에 정을 아시는 공작도 또, 나와 함께 한인의 심사를 슬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다쿠보쿠의 생각에 100%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이토 공작의 청렴함, 정치적 식견에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일본의 젊은 시인이 다른 한편으로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 바람아
    명치 시대를 사는 우리네 청년
    위기를 슬퍼하는 얼굴 쓸어 주누나

    폐색의 시대 이 시대의 현상을
    어찌하려나
    가을에 접어들어 생각에 잠기노라

    … (중략) …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 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 바람 듣는다

    <9월 밤의 불평> 중에서

러일전쟁으로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

  일본은 이미 청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구 제국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병든 왕국, 중국과의 전쟁에서 아시아의 후발 주자가 전근대적인 종주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시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일전을 벌였다. 근대 일본은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그것은 막대한 전비 지출 등으로 인해 결국 실속없는 승리에 불과했다. 일본은 전비를 러시아에게서 보상금으로 타내고자 했으나 일본의 급부상을 저지하려던 열강의 개입과 러시아(니콜라이2세의 러시아는 이 무렵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다)가 전비를 지불할 만한 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결국 취약한 일본 경제의 바탕을 흔드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가쓰라 내각이 물러나고, 사회주의에 비교적 관대했던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들어서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06년 일본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인 일본 사회당이 창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수장으로 하는 군부를 비롯한 일본의 우파는 이런 새 내각의 방침에 반대했고, 결국 해프닝에 불과한 편지 사건을 기화로 사이온지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및 탄압을 시작한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해낸 것이 '쿄토쿠 슈스이 대역사건'이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선』/ 이시카와 타쿠보쿠 지음/ 손순옥 옮김/ 민음사/ 1998년 -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주로 말년의 시들을 수록하고 있다. 하이쿠나 단카를 제외한 그의 대표적인 시들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으신 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슬픈 장난감』/ 이시카와 타쿠보쿠 지음/ 황성규 옮김/ 한국문원/ 1996년 -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단카들을 모아 놓았다. 짧은 내용의 시이긴 하지만 그 뒤에 담겨진 내용들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양 설명이 제법 많은 편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어를 병기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슬픔과 한』/ 한기련 지음/ 월인/ 1999년 - 국내에서 다쿠보쿠를 연구한 아마 거의 최초의 책이 아닌가 싶다. 서술 수준도 비교적 평이하게 다루면서 충실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외국어 연구자들의 글에서 간혹 발견할 수 있듯 우리말에 서툰 부분이 조금 눈에 뜨인다. 중간중간에 오탈자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 이시카와 다쿠보쿠에 대한 기념 사이트이다. 일본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관심 있으신 분들은 노력을 기울이시길.....(일어) 

 


  다쿠보쿠는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점차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호루루기와 휘파람> 등의 시를 남겼고, 다쿠보쿠 자신도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 세계가 다시금 평가 받게 된 것은 일본의 패전이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일기>가 공개되고, 1910년의 왜곡된 '대역사건' 전후에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면서였다. 이전까지 다쿠보쿠는 다만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시인이었을 뿐이었다. 섬광처럼 짧은 생애를 살다간 다쿠보쿠가 만년에 이르러 사회주의에 깊이 경도되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인으로 재평가 받게 된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기에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슬픔과 한으로 점철된 위대한 시인

  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저서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면 일본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같이 새로운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서구의 선진 기술은 이식할 수 있었지만 그 근저에 놓인 정신은 내면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근대화의 동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천황제를 중심으로 국가의식을 고취시켜 그 동력원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한 명치번벌정부(潘閥政府)는 차츰 증대되어 가는 시민의 대두를 오히려 막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일본에서는 사회주의나 기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인의 양심적 행위까지 위험하게 여겼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아'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억압하거나 자기 스스로에게 명확한 한계와 금기를 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안게 되었다. 근대화는 이들에게 그토록 무거운 주제였던 것이다. 이 무렵의 지식인들에게는 오직 문학과 예술만이 그런 자신의 고뇌를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되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그런 시대의 시인이었다.

  우리 민족 시인 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1886 - 1912).   지금은 죽어 일본 하코다데에 묻혀 있는 시인. 교사 신분으로, 학교개혁을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시인이었다.(나중에 '망명지'에서 일본의 철학자 우치무라 간조와 니시다 기타로를 다루게 될 때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당시 일본은 국가적으로는 부국강병주의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가 팽배했다. 말이야 '개인주의'였겠지만 '국가'가 강조되던 시기의 사람들로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미키 기요시 편을 참조하시길.) 그는 일찍이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이들이 주장한 정한론(征韓論)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9월 밤의 불평>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 바람 듣는다" 과 같은 시를 짓는 등 소극적인 표현이나마 당시 일본의 국수주의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백석은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의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때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여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왔다.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는 '백석이 팔베게를 하고 그의 시를 많이 읽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이토록 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시카와 타쿠보쿠는 데뷔 시절 젊은이의 이상을 노래하는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강화되어 가던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 - 군인칙유(軍人勅諭)(1882),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 아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장 배척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학교에서 쫓겨난다. 실직한 이시카와는 그 뒤 별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 세츠코도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시인은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진 어머니가 애처로운 나머지 세 걸음을 걷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시카와의 삶은 궁핍했다. 그는 너무나 궁핍하게 산 나머지 폐결핵에 걸렸고,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의 아내 세츠코도 그 이듬해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는 데뷔 초엔 젊은이의 이상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표현해 갈채를 받았지만  죽기 몇 년 전부터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민중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도키 젠마로(土岐善棧) 등과 더불어 신잡지 <나무와 열매>를 기획하는 등 청년 계몽을 위해 노력했지만 몸에 깃든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일본문학사에서는 그를 메이지 시대의 편협하고 관념적인 단가(短歌, 하이쿠)의 성격을 서민의 애환이 깃든 생활적 주제, 민중적 경향으로 해방시킨 최초의 시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다니던 회사로부터 해고까지 당했던 백석이 그를 좋아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위의 시 <코코아 한 잔>을 읽으며 나는 다쿠보쿠의 그 비린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 그러나 "끝없는 논쟁 후"이 지나간 뒤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이 "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함을 말이다. 거기 어떻게 더 긴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견딜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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