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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 Henry Ford, 1863-1947,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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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발명한 사나이, 헨리 포드

 

 

 

  모던 타임즈(영화)

  찰리 채플린

  레이 크록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영화)

  호파(영화)

 

 21세기를 살아 갈 사람들에게 '헨리 포드'란 이름이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22세기나 23세기에도 인류가 지구상에 계속 살아남아 문명의 이기를 자랑할 수 있게 된다면 후세 사가들은 20세기를 뭐라고 설명할까? 우리가 뭉뚱그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따위로 말하듯 미래의 인류가 20세기를 말한다면 뭐라 말할까?

  이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삶이 혹시 역사에 기록된다면 어떤 것이 될까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역사를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인생에 대해서 좀더 진지해질 수 있는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사람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은 있겠으나 그 누구도 20세기의 생산양식에 대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 즉 포디즘을 무시하고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중등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지금도 그런 과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술>과목을 공부했다면) 테일러주의나 포디즘(Fordism)이란 말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 3(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 포드) 가운데 하나인 포드는 이 사람, 바로 헨리 포드에 의해 설립된 회사이다.

헨리 포드는 죽을 때까지 T형 모델의 색상을 검정색 한 가지만 생산하도록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포드의 하일랜드 파크 공장에서 1913년 8월 하루 동안 생산해낸 포드 T형 모델들

 

 

 

 

Street Demonstration, San Francisco, 1933. Photo by Drothea Lange - 1930년대 미국은 노동자의 의식향상과 노동 조건 개선 요구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만년의 헨리 포드와 한 소년 사이에 학교교육에 대한 작은 설전이 벌어졌다.
    존 다링거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 노인이 학교교육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
    아이의 말을 포드가 잡아챘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20세기의 사람들/ 상권 58쪽/한겨레신문사/1995>

   현대를 발명한 사내, 헨리 포드. 그에 대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마크 노플러가 음악을 맡아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던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를 먼저 보시는 것도 헨리 포드에 대한 이번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일명 '발명의 세기'라고 하는 19세기는 산업혁명을 뒷받침할 만한 수많은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자동차라는 물건 역시 이 시기의 산물이었지만 아직까지 자동차는 일부 괴짜 발명가들이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 점잖게 앉아서 귀부인들과의 피크닉 정도에 이용하는 물건이었다. 이 때의 사람들은 누구도 '말 없는 마차'에 불과한 자동차가 20세기의 지구를 온통 뒤덮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가 끝나가고 있던 1896년 초여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신의 집 창고를 개조한 실험실에서 포드는 최초의 포드 1호를 끌고 모두가 잠든 새벽의 거리로 나왔다. 자전거 바퀴에 4륜 마차의 차대를 얹고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휘발유엔진을 장착한 이 자동차가 인류의 새로운 발이 되어줄 것이란 사실은 아마 포드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1903년 포드가 디트로이트의 중소자본가들의 자금을 모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을 때, 이곳에는 50여 개 이상의 자동차 회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자동차가 미래의 주요한 운송수단이 될 것이며, 자신의 발명품을 몰고 다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의 생산과 소비에 대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획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포드 자동차 회사가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다른 점이었으며 동시에 '현대'의 출발점이었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이 새로운 탈것인 자동차를 유한계급의 유희용으로 제공하고 있을 무렵,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저렴한 가격에 누구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19세기 중엽 연장 몇 개만 챙겨들고 아일랜드에서 쫒겨나듯 이민 온 농부(19세기 중엽 아일랜드는 '감자마름병'이란 재해로 인해 주식이었던 감자 대기근을 겪었다.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에 대한 원조를 하지 않아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어죽었고,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갔다. 얼마전 영국의 블레어 총리가 이때의 과오에 대해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사과하였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대기근/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63/ 1998년>을 참조하시길)의 손자이자 미국에서 농사지을 땅을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던 아버지 윌리엄은 포드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T형 자동차의 생산과 포드주의

   누구도 T형 포드를 앞지를 수 없다. 아무리 달려도 그 앞엔 또 다른 T형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24년 무렵에는 약 천만대의 T형 포드가 미국의 전도로를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미국의 어느곳에 가도 T형 포드가 보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포드가 최초의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1908년 당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 값은 평균 2천 달러 정도였다.(물가인상율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일반인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러나 포드는 이때 T형 차를 8백 25달러에 팔았다. 그후 가격은 더욱 떨어져 3백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포드는 어떻게해서 이렇게 싼 가격이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었을까?

포드 이전까지의 자동차가 장인들에 의해 수공 생산되던 수공품이었다면 포드는 대량 생산과 생산기술 혁신을 통해 자동차를 공산품으로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들이 공구를 들고 작업대로 찾아가 제품을 만들고 조립해왔지만 포드에 이르러서는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생산조립품을 실어나르고, 노동자들은 나눠 받은 작업동작을 온종일 반복하는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광경이 저녁 뉴스 시간대마다 언젠든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이전부터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을 좀더 세분하고 재조직하는 철저한 분업을 통해 생산을 독려하고 좀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자를 독려해왔다. 노동자 한 명 한 명에게 단순동작을 맡기고, 그 작업을 독려하도록 한 테일러주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포드는 그런 독려의 과정을 사람이 아닌 컨베이어벨트에 맡기도록 하였다.

대규모 공장 단지와 전용기계 등을 이용한 대량생산 시스템은 이후 점차 미국이란 사회의 구조까지 바꿔나가게 된다. 현재 전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수많은 체인 사업들의 밑바탕에는 형태는 많이 달라지고 변형되었지만 이런 '포드주의'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맥도날드 햄버거(레이 크록)의 맥도날디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는 원가절감의 기획을 원료부터 판매까지를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헨리 포드 자신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했고, 검소한 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린치를 가하도록 했다.

 

 

 

 

 

헨리 포드와 토마스 에디슨 - 헨리 포드가 금욕적인 기독교 신앙과 높은 임금의 이면에서 자행된 노동 탄압의 기업가였다면 토마스 에디슨은 발명가라는 이미지 뒤에 숨은 탐욕스런 기업가이기도 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20세기 사람들』/ 한겨레신문 문화부편/ 한겨레신문사/ 1995년

『아일랜드 대기근』/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63/ 1998년

 


마르크스 대신 포드를

   헨리 포드의 이런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노동 통제 시스템은 노동자 자신을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했다. 더 이상 노동자는 장인일 수없고,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의 부품처럼 되어갔다. 이런 식의 현대를 간파한 이가 찰리 채플린이었고, 그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포드주의가 노동자의 시간과 동작을 컨베이어벨트에 의해 중앙통제하고, 노동자라 불리는 인간을 결국 부속품처럼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갈파한다.

한편 헨리 포드는 이런 생산시스템으로 인해 생긴 생산비 절감의 효과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선언하고 1914년부터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당시 동종업체의 평균임금 수준이 2.34달러였던 때에 하루 최저임금을 5달러로 인상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른바 '포드맨'이 되기 위해 장사진을 쳤고, 포드는 그들 가운데 우수한 인력만을 골라 쓸 수 있는 여유를 즐겼다. 보수 우파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지만 정작 포드 자신은 "인도주의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 포드 자신은 남북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미국 동부지역의 부호들과는 달랐다. 그는 스스로 늘 아일랜드 출신 농부의 아들이자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공언했으며 술과 담배와 사치를 멀리했고, 금융수입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 에드셀은 디트로이트에서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는 부호의 조카딸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는 상류사회의 호사를 즐겼다. 그리고 그는 노동조합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 자신이 높은 임금과 복지시설을 제공하고 있는 마당에 (국내의 모 그룹처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을,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사업장에는 '사업자의 첩자가 포드자동차만큼이나 많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심지어 '봉사부'라는 전과자들로 조직된 부서(일종의 '구사대')를 두어 노동자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회사 밖에는 '검은 부대'라는 집단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고문, 집단린치를 자행하며 노동조합의 결성을 막았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나 영화 <호파> 등을 보면 이 시기의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자행하던 폭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포드에도 노동조합이 생겨났지만 미국의 자동차 업계 빅 3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 되었고, 이런 포드의 고집스러움은 T형 자동차 생산만을 고집하여 다양한 차종으로 다양한 계층을 파고든 제너럴 모터스에 의해 추월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후 포드가 숨질 때까지 포드는 제너럴 모터스에 뒤집힌 순위를 역전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헨리 포드가 현대에 남긴 유산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는 최초로 노무관리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 맡긴 기업가였으며,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폭력조직을 만들었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을 통해 자원의 고갈과 빈부의 격차, 환경파괴의 주요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어찌 헨리 포드의 잘못이라고만 하겠는가? 그러나 헨리 포드는 이런 모든 문제들의 시작을 만들어 낸 인물이기는 하다. 세계 초강국 미국의 그 압도적 힘의 바탕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과 제3세계 민중들의 울분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헨리 포드에 대한 자료들 거의 대부분이 '성공시대' 풍의 글들이었다. 성공시대를 볼 때마다 기만적인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드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헨리 포드에 대한 시각 역시 좀더 교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현재 디트로이트 시의 헨리 포드 기념관에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명구가 기록되어져 있다고 한다. 헨리 포드가 정말 꿈을 꾸는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 꿈이 우리 모두의 삶에 정말 복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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