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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본 아놀드 하우저

 

 

 

게오르그 루카치

T.W.아도르노

막스 베버

발터 벤야민

칼 마르크스

J.R.R.톨킨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무엇과도 연관을 안 갖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 있다.
ㅡ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

  로 나온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다시 읽었다. 예전에 나온 구판에 비해 도판이 많이 들어갔고, 군데군데 바로잡을 것들도 바로 잡았다고 한다. 문학비평 혹은 기타 여러가지 예술비평 혹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책들에서도 종종 하우저(개정판 이후부터 "아르놀트 하우저", 분명 외래어 표기법에 인명의 경우엔 현지 발음에 충실하게란 원칙이 맞다면 이게 정확한 표기겠지만 나는 그저 입에 굳은 대로 적는다. 착오 없으시길)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놀드 하우저가 그가 지리적으로 속해있는 서구 유럽, 좀더 구체적으로는 독일어권을 떠나 머나먼 이역만리 동아시아의 변방 국가에 이식되어 있음을 뜻한다. 굳이 이 책을 출판한 창비의 광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찬미해 마지않는다. 개인적으로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아놀드 하우저의 인생 역정을 살펴볼 때, 그가 거의 평생을 두고 이룩한 학문적인 성과란 점을 살필 때 존경을 표하는 것이 마땅하단 생각엔 변함이 없다.

아놀드 하우저의 고향. 테메스바 - 하우저는 독일계 유대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혁명기에 잠시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뒤 거의 평생을 망명자로 살아야 했다.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했던 대영도서관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이곳에서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 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했고, 이곳에서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를 만났다.

 

 

 

 

 

 

칼 만하임(Karl Manheim) -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만하임은 루카치가 주도하는 일요회 모임을 아놀드 하우저와 함께 했다. 1926~1930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학, 1930~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의 사회학 교수를 지냈으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했다.

그는 독일에서 지식사회학이라는 새로운 사회학 분야를 개척하여 이데올로기의 존재구 속성을 강조하였고, 영국에 망명한 후로는 전투적 민주주의자로서 시국적인 발언도 하며, 시대의 진단학으로서의 사회학의 의의를 역설하였다. 또 경험적 사회학의 성과를 인정하였으며, 사회심리학의 도입과 근대 합리적 사회의 대중사회화 현상과 자유를 위한 계획 등을 주장하여 미래사회의 계획화에 역점을 두었다.

주요 저서로 《지식사회학의 문제》(1925)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1929) 《변혁기의 인간과 사회》(1935) 《현대의 진단》(1943) 등이 있다. 1947년 1월에 사망한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옮긴 이 가운데 한 명인 반성완은 이 책이 지닌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유럽의 예술과 문학을 통사적으로 서술한 유일한 저서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항 · 필적할 만한 저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문학에 한정되어 있고 또 방법론을 달리하고 있지만 역시 통사적 성격을 띠고 씌어진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와 쿠르티우스(E.R.Curtius)의 『유럽문학과 중세라틴문학』과 함께 날이 갈수록 미시적 연구에만 빠져드는 제도권 중심의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사를 사회사적 시각에서 조감해보려는 문학도에게는 일종의 교과서적 역할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우저는 문학사가이기 이전에 미술사가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형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술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양식사적 현상, 즉 매너리즘을 셰익스피어 문학 해석에 적용시키고 있다든가 20세기 전위문학의 특성을 현대의 영상예술에서 찾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시각이 없었더라면 아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을 음악과 문학의 관련 속에서 보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의 특징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일반적 이론과 구체적 작품 비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잘 매개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보이는 몇몇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하우저의 뛰어난 실제 비평은, 그가 정해놓은 이론의 틀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사가 빠지기 쉬운 도식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술사가로서의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과 입장은 이론적 · 체계적 비평에 매우 강한 루카치와 개별적 예술품에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보는 것처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연결짓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연구나 예술연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하우저의 사회사(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 대로 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이 빠지기 쉬운 도식적 구성과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여러 사회학적 인식은 그에겐 예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적 현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요소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예술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예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면을 예술의 형식 내지 양식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과 자율성, 그리고 예술이 갖는 보편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뵐플린 식의 양식사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든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16세기의 매너리즘적 양식의 연속선상에서 고찰한다든가, 아니면 ‘예술의 종말론’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현대예술의 존립근거와 기능을 옹호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예술관의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연구방법론에 대한 그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헝가리의 유태인으로 태어난 하우저

  놀드 하우저는 1892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있던 헝가리의 작은 도시 테메스바(Temesvár)의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19세기를 1830년에 시작해서 1910년까지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그가 출생한 1892년으로부터 그가 성인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의 대부분은 19세기를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 말은 물론 그가 전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분히 19세기적 지식인의 교양을 바탕으로 한 인물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가 "영화는 대중문화의 특징적 산물"이라고 규정한다거나 "오늘날의 집권자치고 자기가 오로지 다수 대중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노라고 감히 공언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오늘날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대중예술, 대중문화에 대해 일방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놀드 하우저를 매튜 아놀드나 리비스와 같은 엘리트주의 문화이론가로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사상적 배경엔 19세기적 지식인의 교양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원저명은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이다. 원저명대로 하자면 "문학"보다 "예술"이 먼저 나와서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되어야 마땅한 번역일 테지만, 이 책의 옮긴이들이 문학비평가 내지는 그 방면으로 공부를 해온 분들이라 그런지 혹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경향 - 예술보다는 문학을 좀더 상위로 치는 - 때문인지 몰라도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아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되었다.(하긴 이렇게 읽는 것이 입에 굳어서 그런지 어색하진 않다.) 그러나 하우저 자신은 문학, 특히 소설은 18세기의 예술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예술사가 이전에 미술사가, 미술비평가란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오늘날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모국어격인 독일어권은 물론이고, 프랑스, 영미 문화권에도 널리 알려진 20세기 유럽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루카치", "아도르노"와 비슷한 계열의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이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당시 테메스바는 헝가리 영토였지만 그의 부모는 독일 이주민이었고, 그런 덕분에 아놀드 하우저는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 그의 부친은 독일어는 물론 헝가리어, 세르비아어까지 똑같이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생업을 제외하고 독서에도 열중하는 교양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우저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의 손에 한 번도 책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놀드 하우저. 내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한 까닭은 그가 만학(晩學)이자 전형적인 독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문화적인 교양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정신적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이곳에서 앞으로 평생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가 될 칼 만하임(그렇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과 그의 스승이 될 게오르그 루카치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헝가리 출신 지식인 중 만하임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플로렌스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 레더러, 라스크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에른스트 블로흐, 파울 에른스트와도 깊은 친교를 가졌다. 그가 헝가리로 돌아온 것은 1915년 무렵의 일이었고, 칼 만하임과 아놀드 하우저 등은 곧 그의 제자가 되었다. 루카치는 "일요회(Sontagskreise)"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회원 수는 열두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임에 속하기 위한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은 없었으나 이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만남을 가졌고, 종종 만남은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길고긴 설전이 되곤 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점증해가고 있는 독일의 팽창주의를 염려했고, 문학을 토론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2. 고달픈 망명생활과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우저는 독일어만큼 프랑스어도 잘했다고 하는데, 그는 문학사를 전공했지만 문학사보다는 미술사 특히 조형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는 고대의 조형예술가(조각가)들이 시인보다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원인을 분석하는데 많은 공력을 기울였던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하우저는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전후 잠깐이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1919년) 루카치의 도움을 받아 잠깐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 취임하기도 했지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곧 빈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의 망명은 그가 앞으로 전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망명자 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술사에 있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양식사 연구, 드보르작(Max Dvorak)의 역사주의적 예술사 연구 등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또 이들과 사상적으로 결별했다. 그는 모든 예술양식 및 예술적 기호의 변화는 외적인 영향(하부구조의 변화)의 요구에 의해 생겨나며 그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대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녹아들어 훗날 평생의 저작으로 남게 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떠돌이 망명자생활 동안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자들 게오르그 짐멜, 베르너 좀바르트,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적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파리와 이탈리아 등에 머무는 동안엔 직접 미술품을 접하여 안목을 넓혔다. 비록 고달픈 망명자 생활이었으나 그에겐 훗날 예술사 연구의 기초가 된 셈이었다. 하우저 내외는 독일을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된다. 비록 헝가리로 돌아갈 순 없더라도 헝가리에 가까이 살고 싶다는 부인의 희망 때문이긴 했지만 하우저는 빈에서 더욱더 고달픈 생활을 해야만 했다. 독일에서 그는 출판사 일과 서적 판매업을 했는데 빈에서는 아무도 그를 고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놀드 하우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별 볼일 없는 영화사의 사환으로 일했다.

  비록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놀드 하우저는 수백, 수천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경험,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작품이 복제 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가 '회화를 대하던 보수적 태도에서 영화를 대하는 진보적 태도'로 변화"하였고, "영화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한다. 영화의 관객은 이전 회화 감상자처럼 위계 질서적 매개를 통해 개별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집단 수용의 형태로 감상하기에 그 반응이 다르다."고 말했던 바로 그 변화를 그는 바로 영화사의 책상에 앉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빈에서의 망명생활도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고 말았다. 나치 독일이 빈(오스트리아)을 점령하자 그는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의 망명생활 역시 그에겐 고달픈 것이었다. 그는 돈도, 명성도, 목적도, 희망도 없이 떠도는 망명자였다. 그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아내와 사별하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이런 곤궁과 비참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대영도서관에 갔다.

언제나 그곳을 기억할 때면, 나는 그와의 털끝만한 연대성도 감히 느끼지 못합니다만, 그곳에 앉아있는 순간은 바로 내가 다름 아닌 성소에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414쪽에서 재인용>

  런던에서의 1940년부터 1950년까지 아놀드 하우저는 어느 영화사에서 ‘사환이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직장일이 끝난 저녁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10여 년에 걸쳐 빈에서 착수했던 영화미학과 예술사회학에 관한 저술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하우저는 먼저 런던에 와 있던 칼 만하임으로부터 그가 담당하고 있던 예술사회학에 관한 선집의 100여쪽에 달하는 짧은 서문을 청탁받는다. 그는 서문을 집필하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찾았으나 마땅히 참고할 만한 책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놀드 하우저로 하여금『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를 집필하게 만든 동기였다. 하우저는 짧은 서문을 쓰는 대신에 보다 체계적인 예술사회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었다.

제 자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저는 늦포도를 따는, 즉 첫서리가 내린 후 포도가 가을의 향내를 그윽하게 내뿜을 때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책을 쓴 것은 47세와 57세 사이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정점이 지나가 버린 연배입니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이루어진 10년간입니다.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415쪽에서 재인용>

  마침내 그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탈고했으나 누구도 무명의 학자가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선뜻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라 『반지의 제왕』도 J.R.R.톨킨의 희망과 상관없이 3권으로 분재되어 출판되던 때였다.) 이 무렵엔 그의 친구 칼 만하임이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으므로 그를 보증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대영도서관에서 알게 된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가 아놀드 하우저의 저작에 주목해 그의 출판보증인이 되어 주었다. (공교롭게도 허버트 리드와 아놀드 하우저의 입장은 정반대의 것이었지만… 아놀드 하우저는 예술현상을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에 리드는 형이상학을 좀더 중시했다. 그의 책은 국내에도 여러 권 출간되어 있는데, 열화당 - 『도상과 사상』, 『조각이란 무엇인가』, 시공사-『간추린 서양현대조각의 역사』, 현대미학사-『예술의 뿌리』 등)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책으로 출간되었고, 1954년 독일어판이 출간되면서 아놀드 하우저는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영국 리드 대학에서 전임 강사직을 얻게 되었고,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미국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한 이론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예술사의 철학』(1958)을 출판(국내에서는 1983년 돌베게에서 출판)했고, 그의 만년에 저술한 『예술의 사회학』(1974)은 자신의 예술이론과 연구방법론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국내에서는 한길사에서 1983년 출간했으나 완역은 아니고, 나머지 부분은 그보다 앞산 1981년 홍성사에서 『예술과 사회』란 제목으로 펴냈다.) 그는 『예술사의 철학』을 통해 20세기의 전자공학과 산업생산의 발달,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복제되는 대중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불행히도 아놀드 하우저의 저술 가운데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은 이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뿐이다.

3. 예술도 천재도 시대의 산물이다

  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아놀드 하우저를 문화연구(Cutural Studies)의 시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연구의 중요한 방법론 혹은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가 지닌 미덕들이 또한 "문화연구"의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하고 있다. 문화연구란 아직 미완성인 상태 - 만약 그것이 스튜어트 홀을 비롯한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비판적 이론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미완성 형태로 남아야 할 터이지만 -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문화연구가 국내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그러했고, 캐나다, 호주, 서남아시아 등의 사례 역시 그렇지만 문화연구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먼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문화가 이전의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연구되던 주제인 "사회"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란 학문은 특히나 실천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부터이다. 외국의 경우 학제간 연구로 활성화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대학원 과정에서만 일부 다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문화연구는 일종의 비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정치경제학이 담당했던 역할의 일부를 맡고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정치경제학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명제가 경제결정론(경제환원론)으로 비판받으면서 - 이 비판은 실제 역사 현실에서 노동자 계급이 늘 자신의 하부구조에 맞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며,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를 왜곡하고 변형하는가에 대한 비판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없고, 변혁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 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연구(고정된 '학문'이 아닌)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예술은 역사와 사회의 관계에 의한 것이란 주장"은 그가 처음 이 주장을 펼친 것이 1950년대 초엽의 일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술작품(현상)은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탄생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예술사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우저 이전까지 예술은 이데아의 모사와 같은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이해되었고, 예술은 천재들의 놀라운 업적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르네쌍스의 예술관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천재 개념의 발견이다. 예술작품은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고 자주적 인격은 전통, 이론, 규범은 물론 작품까지도 넘어서서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며 작품은 그 법칙을 이러한 인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이념,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자주적·창조적 인격의 소유자는 작품보다 더 풍부하고 심원하여 어떠한 객관적 형상으로도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이념이 그것이다. …<중략>… 천재란 곧 신의 선물이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타고난 창조력이라는 이념, 천재가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만 하는 독자적이고도 일회적인 예술의 법칙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천재적 예술가의 특성과 고집에 대한 합리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자유경쟁에 입각한 동적인 사회의 본질 때문에 중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보다 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지배자들이 그들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과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급규모로써는 도저히 예술시장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예술의 수요가 급증했던 르네쌍스의 사회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권, 94-95쪽>

  비록 아놀드 하우저 자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입장이나 실천적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마르크스의 동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바라본 예술사 속에는 마르크스 이론이 녹아있다. 하우저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세계를 지배해온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왜 그 작품이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마치 한 시대가 산출한 예술작품은 예술가 개인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작품이며, 예술이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계급의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문화연구가 문화적 관습과 권력과의 관계,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의 문화, 정치적 비판과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문화,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사회를 재구성하고, 근본적으로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변모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하우저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 외 옮김(200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창비.

아놀드 하우저, 최성만, 이병진 옮김(1993), 『예술의 사회학』, 한길사.

아놀드 하우저, 황지우 옮김(1983), 『예술사의 철학』, 돌베게.

지아우딘 사르다르, 보린 반룬, 이영아 옮김(2004), 『문화연구』, 김영사

교수신문(2003),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 20)』, 생각의나무.

 

  그러나 오늘날 하우저의 모든 관점이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그의 저서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 종에 불과하며, 이 또한 광고는 물론 수용자(독자)들 자신에게도 일종의 문화예술교양서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 잘 반증해주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우저의 생애와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그 자신이 다른 입장에서 비판한 T.W.아도르노처럼 유럽적 교양(지식)을 주된 입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저에게 있어 초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의 "형식주의적 전통 내지는 자율적인 예술적 구성물에 대한 내재적 고찰방식"에서 그가 탈피하게 된 계기가 '새로운 예술' 영화의 발견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발터 벤야민처럼 대중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 대중예술에 비해 고급예술(high art)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점 등에서 최근의 조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우저의 입장과 관점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대중문화론자들 매튜 아놀드, 리비스의 엘리트주의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우저는 과거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현대 산업사회를 소외의 시대로 보았다는 점에선 - 대중사회에서는 예술이 수용자에게 제기하는 요구들이 줄어들고 예술의 질적 수준이 저하됨에 따라 예술의 위기가 초래 - 대중문화론자들의 관점과 일치했으나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과거의 예술과 문화의 '독점 상황'이 사라지게 된 이상, 이제는 감상자 모두가 일종의 비평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매체의 다원화와 교육의 확산에 의한 매개활동을 통해 그러한 비평가적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매개활동을 통한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324-325쪽 중에서>

  하우저의 지적 작업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그가 서양의 문학과 예술 사조, 철학과 미학, 역사,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에 두루 통달한 박학다식(博學多識)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입장에서 "사회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학과 예술을 설명하고 양자를 변증법으로 꿰어내는 솜씨" 때문이다. 하우저는 사회적 조건이 변함에 따라 예술의 주체로서 작가와 독자가 다른 계급의식과 미의식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예술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마치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라가듯 정신없이 펼쳐 보인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전지식이 풍족하지 않은 일반인 읽어내기엔 분명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만한 지적 수준에서 이만한 지평을 대중에게 폭넓은 깊이를 획득하여 펼쳐 보이는 책은 현재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가야할 길

  놀드 하우저가 마르크스의 이론적 틀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과 경제환원론이 예술의 문제, 문화의 문제를 규정지을 수 있다는 입장에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은 문화연구의 입장과 흡사하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의 독일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영국의 문화연구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영국 내 신좌파의 반응으로 출현했다는 것과 묘한 일치를 보인다. 문화연구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계급간 헤게모니(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를 놓고 벌이는 대립과 충돌의 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문화연구에 대해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연구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과 더불어 성별, 인종적 혈통에 따라 불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문화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힘이 어떻게 사회구조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분석한다. 문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역사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연구는 역사와 경제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된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그의 시각이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구에서 출간된 많은 통사들이 그러하듯 실제로는 "서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제1세계의 문학사는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2세계의 문학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몇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던 문화연구가 점차 학제 내부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 역시 점차로 학문의 한 분야로, 학문제도와 권력구조의 일부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문화연구가 마치 서구(미국과 유럽이 제공하는)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중문화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문제). 그렇기에 문화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식민지화 작업에 봉사할지도 모를 앵글로색슨의 하위계급에 대한 연구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지역연구여야 하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구들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새로운 틀을 갖추어야만 할 때이다. < 2005. 9.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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