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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ta Hari: beautiful exotic dancer turned espionage agent

 

 

 마타하리 ( Mata Hari,1876 - 1917, 네덜란드 )

 

 

이 페이지에서는 본문 속 포스터 그림만 확대됩니다.

 

 

 Inner Link

 

팜므 파탈(Femme Fatale),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모험녀 - 마타하리

 

 

 

에밀 졸라

이승만

에멀린 팽크허스트

크리스틴 킬러

알프레드 드레퓌스

피아노(영화)

갈리폴리(영화)

영광의 길(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영화)

 

  므 파탈(Femme Fatale) - '치명적인 여인' 혹은 '위험한 여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리스와 트로이간의 전쟁을 촉발시킨 헬레네,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로마를 잃게 만든 클레오파트라, 당 현종을 몰락시킨 양귀비와 경국지색으로 일컬어지는 서시,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프로퓨모 스캔들(Profumo scandal)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틴 킬러(Christine Keeler)에 이르기까지 팜므 파탈의 주인공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팜므 파탈의 대명사가 되는 동안 남자들은, 시대는 아무 잘못도 없었던 것일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미(美)는 때로 경배와 관용의 대상으로, 때로는 치명적인 유혹이자 죄악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 이래로 지속되어 온 여성의 원죄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최근 이와 관련한 몇 가지 사례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트렌스젠더 하리수와 KAL 858기 테러사건의 주역. 마유미(김현희) 등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이다.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은 인간인 이상 본능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란 허울 뒤에 사실은 인간이기 이전에 먼저 동물이란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시 프랑스의 재판관이 "그녀가 빼낸 정보는 연합군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할 만한 것이었다"고 판결내릴 만큼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모험녀"였던 마타 하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타 하리의 핀업 사진은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마타하리의 1905년 사진)

 

 

 

 

 영국은 마타하리를 전혀 다른 인물로 오인해 연행하기도 했다. 1916년 11월에는 스페인에서 출발해 영국을 거쳐 네덜란드로 향하는 증기선 상에서 마타하리를 연행한다. 당시 영국은 그녀가 또 다른 독일 스파이인 클라라 베네딕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리브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커다란 갈색눈을 가진 다소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훗날 그녀 자신이 남들 듣기좋게 꾸며낸 그녀의 출생에 대한 거짓말을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어줬다. 그녀는 스스로를 "인도네시아 태생으로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나의 할머니는 마두라의 총독의 딸이었답니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고급 장교였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어쨌든 그녀는 '여간첩 중 가장 고혹적인 외모를 갖추 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7년 10 월15일 아침.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 설치된 처형대에 오른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눈부신 알몸을 드러낸 채 찬란한 햇볕 아래 섰다. "제 3 군법 회의의 판결로 M.G.젤러를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한다" 는 선고문이 낭독되고 12명의 사수가 마타 하리를 향해 정렬했다. 사형집행인이 그녀에게 나가가 눈가리개를 씌워주려 하자 그녀는 "내게 손대지 마세요. 눈가리개도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12자루의 소총에서 발사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등졌다. 이때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마타 하리의 주검은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되었다.(정말 그녀가 체포될 때 알몸이었는지, 사형대에 올라설 때도 알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은 후세의 호사가들이 그들의 즐거운 입방아를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타하리 - 물랭루주에서 최초의 스트립쇼를 추다

  타하리의 본명은 M.G.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로 그외의 내용들은 사실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가 네덜란드 레바르댄의 출신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1876년생으로 네델란드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부 네덜란드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독일 혈통이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미모의 소녀였던 젤러는 올리브빛 피부, 검은 머리카락, 커다란 갈색눈을 가진 다소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훗날 그녀 자신이 남들 듣기좋게 꾸며낸 그녀의 출생에 대한 거짓말을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어줬다. 그녀는 스스로를 "인도네시아 태생으로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나의 할머니는 마두라의 총독의 딸이었답니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고급 장교였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어쨌든 그녀는 '여간첩 중 가장 고혹적인 외모를 갖추 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공상하길 좋아했던 이 평범한 소녀의 나이 13세 되던 해 부친의 사업실패가 연속적으로 겹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어려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던 젤러는 이때부터 가난과 결핍이란 단어를 배워야 했다. 그녀 나이 19세 때(1895년)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주둔군 장교 C. 매클라우드(어떤 자료에는 '루돌프 맥네오드')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생활해야 했던 젤러는 어느날 신문에 신부감을 구한다는 인도차이나 주둔군 장교의 신부구함 광고에 응했던 것이다. 영화 <피아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때 식민지 경영에 참여하는 남자들은 본국의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이렇게 광고를 해야만 했다. 젤러는 지긋지긋한 떠돌이 생활과 가난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남편의 근무지인 인도네시아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남편은 자주 바람을 피웠고, 그나마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이어주던 아들까지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은 결국 7년만에(1901년) 끝나고 말았다.

  이혼녀가 된 그녀는 1902년에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젤러는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마게리의 정부가 돼 동거에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모를 내세워 무희로 나서게 된다. 그녀의 춤 실력이 과연 얼마나 뛰어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노출만은 확실했던지 그녀의 자바춤(발리 댄스)는 파티 석상에서 인구에 회자되기 이르렀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흥행사의 눈에 띄어 정식 댄서가 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젤러는 1905년 몽마르트 클리시거리에 새롭게 개장한 물랭루주(Moulin Rouge)에 나타나 프렌치 캉캉과 함께 명물이 되었다. 그녀의 춤은 정통 발리 댄스라기 보다는 일종의 스트립쇼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국적인(exotic) 풍광에 목말라 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겐 큰 흥미거리가 되었다. 젤러가 스스로의 이름을 마타하리(Mata Hari)로 바꿔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작은 살롱의 어두운 무대,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무대 등지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댄서로서의 인기를 구가했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인기는 점점 높아만 갔다. 그녀는 보석으로 장식한 브래지어와 허리띠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여 스트립 쇼나 다름없는 선정적이고도 관능적인 춤을 추어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매료시켜 버렸던 것이다

"내가 네덜란드 시골에서 태어난 평범한 집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내 명성은 하루 아침에 시궁창 신세가 될 거야."

  마타 하리가 된 젤러는 인도네시아의 배꼽춤을 곁들인 에로틱한 춤을 통해 숱한 남성들을 사로잡게 되는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유럽의 번영과 진보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었던 세기초의 희망과 문란한 사회질서는 파리를 유럽 최고의 도시가 되도록 했다.

계속되는 불운의 눈동자 - 마타 하리

  '마타 하리.' 인도네시아어로는 '낮의 눈동자', 즉 '태양'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점점 어둠이 깃들었다. 마타 하리는 독일의 황태자, 네덜란드의 수상을 비롯해서 당시 유럽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었던 파리의 외교관, 고급 관료·장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일종의 고급 콜걸이었던 셈이다. 마타 하리는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의 파리에서 타고난 미모와 누드에 가까운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고, 프랑스 사교계 고위층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댄서로의 인기를 바탕으로 파리의 상류사회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웃음과 몸을 파는 일은 그녀에게 고되고 그만큼 피곤한 일이었다. 마타 하리는 영양가 없이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니 확실한 물주 하나를 꿰차기로 했다. 마타 하리는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어느 은행가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지만, 하필이면 그 은행가의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도리어 빈털털이가 되고 만다. 다시 댄서가 되려고 했지만 그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들이 돌았기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마타 하리에 대한 좋지 않은 풍문들 - 가령, 품행이 방정치 못하던지 하는 - 도 그녀에게 유리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모든 인간에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세월이 그녀에게도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 더 큰 탓이었다. 이제 그녀의 아름다움도 시들어가고 있었다. 마타 하리는 새로운 경제적 후원자를 찾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한창 떠오르고 있었지 만 문화적 세련미로는 아직 파리를 따라가지 못한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녀는 이곳에서 재기를 노렸던 것 같다. 1914년 베를린에 도착한 마타 하리는 이곳에서 경찰과 교제를 가졌는데 중부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에 대해 민감한 첩보 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는 그녀가 독일의 스파이로 포섭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때부터 받기 시작한 의심으로 그녀는 훗날 스파이로 영국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한다.

  재기를 꿈꾸며 베를린에 갔지만 베를린에서 마타 하리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독일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녀는 예전 한창 때의 인기를 누릴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떠나간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었다. 이 무렵 마타 하리는 프랑스군에 근무하고 있는 러시아계 장교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이미 독일측으로부터도 스파이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전포고 당시 베를린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행적은 의심받게 되고 그녀는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한다. 이때 전쟁에 참전 중이었던 그녀의 연인 블라디미르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녀는 프랑스를 위해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녀가 프랑스나 독일을 위해 제공했을 지도 모르는 정보들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정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수준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그녀가 독일에서 한 활동이란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사소한 경험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스파이로 활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후일 그녀가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는 원인이 될 줄은 아마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타하리 -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들을 당혹시킨 여자 스파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사실 이 무렵의 유럽은 외견상 너무나 평온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미래에 대해 더할 나위없는 낙관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해날 것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프랑스는 비록 식민지 경쟁에서 몇 차례 영국에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기는 했지만 유럽 대륙 최고의 육군군이자 강대국으로 자부하고 있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e - Prussian War)에서 독일에 맛본 역사상 최초의 패배를 되갚아주고자 했다. 어쨌든 이런 분위기는 다가오는 세계 최초의 국민총력전에 대한 경계심을 잃게 만들었고 예술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부르주아 국제 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너도나도 앞다퉈 참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생쥐와 진흙탕에서 함께 먹고자야 하는 지독한 앉은뱅이 전투(참호전)였다.

  그들이 기대했던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전 기간 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벌어지지 않았다.(영화 <갈리폴리>, <영광의 길>, <서부전선 이상없다> 등을 참조하시길) 연합군과 독일군의 무능한 수뇌부들은 교착상태에 놓인 전선에서1m를 전진하기 위해 병사들로 하여금 무리한 돌격을 감행하게 했고, 공세를 취하는 측은 방어하는 측보다 더욱 많은 희생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세는 다음날에도, 다음날에도 계속 되었고, 죽은 시체를 뜯어 먹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쥐떼들이 질척한 참호 안을 돌아다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이 무능하고 비도덕적인 전쟁의 책임을 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전쟁의 최고 책임자들 중 그 누구도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어쨌든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마타 하리는 혼자서 쓸쓸히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늘 날 그녀는 어떤 독일 고관의 조언을 받아들여 1915년 12월 영국을 경유하여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가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영국을 경유할 때 마타 하리는 폴크스톤 항에서 영국 방첩요원들에 의해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마타 하리를 면밀히 심문했으나그들이 밝혀낸 것이라고는 그녀가 당시 연인이었던 네덜란드 중령을 만나러 가기 위해 헤이그로 가던 길이란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심문을 맡았던 영국정보국 S.S.딜론 대위는 "그녀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매우 적대적인 인상을 주었다""그러나 그녀를 오랫동안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더 이상 아무 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영국 정보부는 마타 하리를 체포해둘 만한 아무런 이유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당시 영국 정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심문을 받으면서도 매력적이고 대담하며 의상에서도 당시 최고의 패션을 자랑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는 마타 하리가 헤이그에 도착한 뒤에도 지속적인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곧 한 정보원의 제보로 그녀가 독일대사관에서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고, 그녀가 프랑스와 벨기에의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증거는 불명확했지만 마타 하리가 독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받고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파이일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젤러는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마게리의 정부가 돼 동거에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모를 내세워 무희로 나서게 된다. 그녀의 춤 실력이 과연 얼마나 뛰어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노출만은 확실했던지 그녀의 자바춤(발리 댄스)는 파티 석상에서 인구에 회자되기 이르렀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흥행사의 눈에 띄어 정식 댄서가 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젤러는 1905년 몽마르트 클리시거리에 새롭게 개장한 물랭루주(Moulin Rouge)에 나타나 프렌치 캉캉과 함께 명물이 되었다. 그녀의 춤은 정통 발리 댄스라기 보다는 일종의 스트립쇼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국적인(exotic) 풍광에 목말라 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겐 큰 흥미거리가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시작된 1894년 무렵의 유럽은 군부가 전례없이 강력한 정치적 파워 집단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 경영의 전면에 나섰으며 점증하는 군사적 긴장과 사회 불만 세력에 대응하는 집단으로 권력을 얻었다. 이런 현상들은 국가의 병영화를 꾀했던 프러시아(독일)에서 특히 강했지만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부의 강화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강화로 이어졌고, 이는 때로 범 게르만주의, 범 슬라브주의란 이름의 팽창전략과 맞물려 돌아갔다.

또한 이 무렵의 유럽은 발달된 기술력의 확보로 여론('매스 미디어')이라는 것이 새로운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전쟁전의 여론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조작된 스파이 혐의를 발견해냈지만 전후 정치인 및 군부에 대해 혐오의 감정이 싹튼 여론은 동시에 전쟁의 참화를 책임질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프랑스 군부는 마타 하리를 그 희생양 중 한나로 선택했다. 여론의 등장은 19세기 전반까지 일부 특권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치를 일반인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정치 체제가 보통선거에 가까워진 덕분이긴 하지만 20세기 초반에 이르기 까지 거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았다.(재산에 의한 제한선거는 미국의 각주(各州)가 1820∼1850년, 프랑스가 1848년, 스웨덴이 1907년, 이탈리아가 1912년, 영국이 1918년에 철폐되었고, 성별에 의한 제한선거는 미국이 1920년, 영국이 1928년, 일본이 1945년, 프랑스가 1946년에 철폐되고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한국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보통선거를 채택)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Double Agent? One Truth - 간략한 글과 마타 하리의 사진 한 장 - 라디오 네덜란드 (영문)

BBC News - 영국 BBC 방송의 온라인 페이지에 수록된 마타하리 관련 페이지이다.(영문)

제1차 세계대전의 선전포스터와 카드 - 마타 하리의 선전용 포스터와 사진 엽서들이 있다. 이 페이지에서 가장 많은 사진들을 가져왔다.(영문)

도이치 카페 - 바람구두연방의 망명자이기도 한 종현님의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은 사이트이다. 연표 부분에서 마타 하리가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바람구두가 다루고 있는 이번 마타 하리 편의 인명 표기는 두산 엔사이버 백과 사전 표기를 따르고 있으므로 다른 사이트 표기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란다.(한글)

모든 것은 이브로부터 시작되었다/ 리차드 아머 지음/ 이윤기 옮김/ 시공사/ 2000년 - 코믹역사북 시리즈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번역에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저자의 경박함과 저속함인데, 이 저자의 이 시리즈 몇 권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읽을 때마다 재미와 함께 욕이 나온다. 재미를 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건들에서, 욕은 진지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경박함에 대한 것이다. 굳이 추천할 의사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마타 하리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이 조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소개하고 있다.

 


사상 최악의 여간첩, 마타 하리의 최후

  타 하리가 만약 독일로부터 고용된 여간첩이었다면, 그녀는 그다지 유능한 간첩은 아니었던 듯 하다. 영국 정보부에 체포된 뒤, 그녀는 묻는 말에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시키지 않은 말들까지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자신을 좀더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다시 댄서로서의 흥행에 도움을 얻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벨기에 장교로부터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프랑스 영사가 자신에게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 스파이가 되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녀에게서 스파이 혐의의 증거가 될만 한 그 어떤 증언도, 물증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타 하리는 1917년 2월 17일 프랑스당국에 체포된다. 체포된 후 마타 하리는 자신이 독일인으로부터 돈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스파이 활동 및 정보 제공의 대가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프랑스 군부와 정보부는 그녀는 독일 스파이 'H21'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마타 하리가 독일을 위해 프랑스를 배신한 스파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녀가 다국적 고객들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애인들 중 유명한 사람들은 프랑스 장관 줄르 캄프론, 프로이센 황태자, 네덜란드 수상, 브론스위트 백작, 독일 장교 폰 카레 등이 있었고, 그녀 자신도 마음만 내키면 남창을 사들여 섹스 그 자체를 기꺼이 즐기는 여인이었다.

  일설에는 마타 하리가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될 당시 호텔 소파 위에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입가에는 요염한 미소까지 흘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체포 소식에 몸이 후끈 달아오른 것은 그동안 그녀를 즐겨찾았던 고객들이었다. 프랑스 정보부는 마타 하리가 프랑스와 연합국 진영의 정관계 고위 인사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독일에 팔아 넘겼다고 밝혔다. 그녀와 관계를 맺었던 많은 인사들이 재판정에 불려 들어왔고, 그들은 모두 자기 한 몸 살아남기에 바빴다. 그녀는 체포된 지 8개월만에 '마타 하리가 빼낸 군사 기밀은 연합군 병사 5만 명을 죽일 수 있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재판관의 말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는다.

  1917년 10 월15일 아침.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 설치된 처형대에 오른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리고 눈부신 알몸을 드러낸 채 찬란한 햇볕 아래 섰다. "제 3 군법 회의의 판결로 M.G.젤러를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한다" 는 선고문이 낭독되고 12명의 사수가 마타 하리를 향해 정렬했다. 사형집행인이 그녀에게 나가가 눈가리개를 씌워주려 하자 그녀는 "내게 손대지 마세요. 눈가리개도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12자루의 소총에서 발사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등졌다. 이때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마타 하리의 주검은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되었다.

마타 하리의 죽음, 그 이면

  타 하리는 체포된 후 자신은 절대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 주지 않았다. 이는 1894년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과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드레퓌스 사건은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유태계 프랑스군 장교가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 로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불분명하거나 조작된 것으로 억지로 스파이 혐의를 덮어씌우려 했던 사건으로 이 사건은 에밀 졸라의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로 시작되는 글을 통해 프랑스 조야를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의 극심한 국론 분열 상황까지 몰고 간 사건이었다. 공화제와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고,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드레퓌스에게 억울하게 덧 씌워진 혐의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들의 구명 활동에 의해 1906년 무죄가 인정되고, 같은 해 7월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마타 하리에겐 그런 신의 은총도, 지식인들의 지원도 없었다. 그녀는 쓸쓸히 혼자서 온갖 혐의에 맞섰으나 결국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무렵엔 에밀 졸라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 가장 큰 이유를 마타 하리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세계대전 당시 제작된 선전 포스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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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조심하라! 그녀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숙하지 않다. 부주의한 언행이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

 

…위해서, 그가 내일 항해한대요. 그녀가 말했다. 그 결과 벌어진 일. 부주의한 언행이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

  좌측의 포스터는 요염한 포즈로 앉아있는 여인을 둘러싼 고급 장교들의 대화를 여인이 무시하는 척하면서 엿듣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림 속의 여인은 마타 하리 처럼 스파이일지도 모른다. 우측의 포스터는 수다쟁이 부인이 자신의 남편과 침대 머리맡 송사를 들고 나와 찻집에서 이웃집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스파이인 듯한 사내가 그녀의 등뒤에서 엿듣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듯 위의 포스터는 여성을 두 가지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streotype)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나는 유혹과 배신, 다른 하나는 수다와 부주의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희생양은 늘 부주의하고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46년의 일이었다. 마타 하리가 살아있을 무렵 프랑스 여성들은 정치적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여성들이 20세기 초엽의 끔찍한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질 만한 일이라곤 사실상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한 불쌍한 여인에게 전가한 것이다.

마타 하리의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 정보부(MI5)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문서에는 마타 하리가 그 어떤 군사 정보도 독일 측에 넘긴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측의 주장은 마타하리가 'H21'이라는 암호명으로 프랑스 정관계를 암약해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를 독일측에 팔아넘겼다는 것이었다(영국은 마타 하리를 프랑스 정보부에 넘기기 전까지 3차례에 걸쳐 심문했었다).

  그녀는 독일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당시 우연히 독일 베를린 현지에 있었다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기 시작했다. 그후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스파이 의심을 받게 된 까닭은 그녀가 뒤늦게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다. 입국이 거부당한 상태에 놓여있던 마타 하리에게 끈질기게 애정 공세를 펼쳐 온 남자는 러시아 제국 제1 특수연대의 소속의 비행기 조종사 블라디미르 드 마슬로프였다. 그는 마타 하리보다 20세나 연하였지만 마타 하리에게 끈질긴 구혼 공세를 펼쳤다. 그러던 그가 1916년 여름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자 마타 하리는 프랑스 비텔에 입원 중이던 자신의 연인을 방문하기 위해 조르주 라두(대위)에게 프랑스 방문 허가를 받아내고자 했다. 라두는 당시 프랑스 정보부의 중요 인사였다. 라두는 마타 하리에게 프랑스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할 것을 요구했고, 마타 하리는 이에 동의했지만 그전에 먼저 독일측으로부터도 그와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녀는 자신이 독일의 돈을 받기는 했지만 독일을 위해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실제로 전쟁 기간 중 그녀는 프랑스 고위층 인사들과는 거의 만날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부터 자신의 출생까지 속여오던 일개 무희에 불과했고,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 까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직할로 여성들을 이용한 첩보행위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지속적인 스파이 행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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