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았다

에필로그 -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았다

사실 개인 홈페이지에 불과한 이 곳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문을 잠시 닫으면서 여러분에게 이런 고별사 비슷한 글을 쓰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지난 2년간 여러분과 제가 쏟아부은 애정이 넘쳐, 제 멋에 겨워 저러느니 하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민만 하면 무엇하랴, 한량 없으리란 생각에서 내린 결론이었답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고뇌의 연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 없는 생활.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이중에서 저를 가장 감동시킨 부분은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선이란 말그대로 '선함' 혹은 '선한 의도'를 작위적으로 가장하는 행위 혹은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랄 수 있는 '위악'의 개념도 '사기'라는 의미에서 크게 보면 결국 같은 태도일 겁니다. 젊음이란 것이 순수와 동의어였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다들 제 살 궁리에 바빠서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오로지 '부자' 될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혹은 기존의 운동세력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권위와 진지함을 백안시하며 '위악'을 떠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젊은이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태도에서 저는 그런 '순수를 동경하는 젊음, 위선을 증오하는 젊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태도는 소극적인 증오의 모습이었으며, 결국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을 그의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필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진 이가 나이들어 침상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는 약간 다른 맥락에서 위선에 대한 보다 명확한 태도를 발견하고, 크게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세희 선생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 나는 그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지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군사독재와 유신의 억압 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안으로 삭이고 삭여 검열과 통제의 눈길 속에 써내려간 덕에 우리들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못지 않은 우리들의 슬픈 우화를 갖게 되었지만, 작가는 그런 명작을 쓰기 보다는 그런 명작을 배태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사회를 갖고 싶었을 겁니다.

처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만들 때, 제 애초의 의도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20세기,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게 될 21세기의 뿌리가 될 그 20세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자는 단순한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의도 뒷켠에는 감춰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해결되지 못할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변두리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아웃사이더' 의식이랄까요.

꼭 세계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개혁 세력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이 애초에 말했던 주의, 주장과 달리 기성 정치 세력과 야합해 버리거나 그들보다 더한 수구 세력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지켜보면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 중 일부가 대거 투항해 버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새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애초에 제가 '망명지'를 만들 무렵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니컬함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죽은 사람들 이외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더랬습니다. 그러나 다시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가는 일견 무의미해보이는 순환 속에서도 해안선의 변화랄까, 사구의 퇴적과 침강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역사가 반드시 진보한다는 낙관을 가질 수 없다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자신이 역사의 극히 작은 일부에 끼치는 영향이 미미하다 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요.

언제까지나 철 들지 않고, 나이 먹기 싫다는 의식, 권력에 대한 혐오, 조직 생활에 대한 부적합자, 중심에 대한 무관심, 권위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 등등은 매우 멋있어 보이는 태도이긴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터프 가이'들이보이는 터프함이란 결국 끝나지 않은 사춘기의 연장이란 걸 생각해보면 '아웃사이더', '정치무관심'을 자처하는 행위 안에는 이 세상 만사 그 어떤 일에도 책임 지고 싶지 않다는 소시민적인 비겁함이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결국 태도의 문제이고, 그 사람의 말이 아닌 행동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우선 몸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의 영혼이 만나기 전에 먼저 몸끼리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은 억누르려고 합니다. 만남은 결국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겠지만, 만남의 육체성(현실성)이 없는 만남은 살아있는 만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그런 만남의 육체성을 얻기엔 다소 부족한 공간이기도 합니다만 망명자 여러분을 만나는 동안 우리가 한 시대를 같이 고민하며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20세기를 살아 왔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우리들이 모두 같은 '동시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얼마전 유리병편지에서『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란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세계 인류를 100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100명 중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죽기 직전이고, 15명은 비만, 이 마을의 모든 부 중 6명이 59%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 사람이며, 74명이 39%를, 20명이 겨우 2%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더군다나 지구라는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80명이 20%를 나눠 쓰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그 사람들은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 우리들과 동시대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만듭니다. 한쪽에서 지구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여 펑펑 쓰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기아 선상에 놓인 채 학살당하고, 강간당하며 살고 있는 21세기에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과 동시대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이 지구 마을 한 켠에는, 대한민국의 그늘진 한 켠에는 석기시대로부터 몇발짝 나가지 못한 삶을 사는 형제가 있고, 봉건적 질서로부터, 전근대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매들이 있습니다.

다시 조세희 선생의 말로 돌아가 그는‘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놓고 무리지어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다음 백 년의 시작, 21세기의 좋은 출발을 위해서라도 지난 긴 세월의 적들과 우리는 그만 헤어져야 한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문을 잠시 닫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저는 며칠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머리를 식혔습니다. 시원한 계곡에 들어앉아 신문도, 방송도 없는 세상에 소처럼 납죽 엎드려 세상을 잠시 잊고 지내고 싶었습니다. 오가며 막히는 길에서 한 번은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막히는 길이라고 돌아갈 수도 없음을 알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산사의 시간은 새벽 3시에 스님이 법고를 치면서 시작되어 저녁 공양이 있는 오후 5시 무렵이면 끝이 납니다. 나물밥 한 그릇 얻어먹고 들어앉은 산사의 좁은 방. 사방을 둘러봐도 쓸모없는 물건이라곤 작은 가구 하나 없는 텅빈 방에 들어앉았지만 방문을 열면 산사의 야트막한 돌담이 다만 세상과 나의 경계였음을 알게 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막힘없는 산과 하늘에 구름만 시시때때로 움직입니다.

산사에 숨어든 망명자처럼 조용히 숨죽인 채, 혹은 가벼운 술 안주를 앞에 두고 낯익은 친구들과 세상살이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으며, 익명의 게시판에 온갖 악다구니를 늘어놓는다고 해서 '세상에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산사의 세상엔 막힘이 없지만 길 위의 세상은 정체로 끈적입니다. 한 줄기 빗방울이 세상을 훑고 지나갑니다. 언젠가 저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더운 세상의 한 줄기 바람처럼 시원한 빗줄기처럼 서늘하게 적시는 그런 사람이 되자고. 가는 길은 멀지만 돌아갈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삶은 그저 묵묵히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조세희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억압하는 체제와 질서를 사회 대다수 구성원의 뜻과 힘으로 전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약을 통한 질적 전환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의 악은 더 야비해지고 강고해져 가고 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혁명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단언컨대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당신과 나의 손 끝에서, 발 끝에서 작지만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여러분 안녕! 2002년 8월 어느 흐린 날. 망명지기 바람구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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