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 시대를 읽는 문화적 코드

<동대신문> - 제 1345호 2002년 6월 3일 월요일자에 게재되었던 내용입니다.

영웅 - 시대를 읽는 문화적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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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더글라스 맥아더		대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우스개 소리 중 이런 것이 있다. 질문: 전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아야 할 때이다. 여기 3명의 후보에 대한 정보가 있다. 후보 A.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점성술을 가지고 결정을 하며, 두 명의 부인이 있고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내지 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두 번이나 회사에서 해고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도 있고 위스키 4분의 1을 마신다. 후보 C.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도 안 피우고 경우에 따라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겠는가? 후보 A :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후보 B : 윈스턴 처칠 후보 C : 아돌프 히틀러 물론 이 질문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진 정보만으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 그 시대와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가치나 시대 정신을 몸소 체현하고 상징하는 인간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영웅이란 코드(code)를 통해 그 시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가 상정하고 있는 영웅상은 매번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는 위의 질문과 대답을 놓고 뭔가 허를 찔렸다는 느낌을 받게 되며 경우에 따라 이런 방식의 질문과 그 숨겨진 의도에 매우 불쾌해진다. 그러나 때때로 영웅들은 저와 같이 필요에 의해 정보를 편집하거나 조작하는 불쾌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오늘날엔 모두가 지탄해 마지않는 히틀러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때 스탈린, 처칠과 같은 이들조차 "현명한 자", "천재의 화신"으로, 독일 민족에겐 인류의 구원자로 비쳐졌다. 히틀러가 그토록 각광받게 된 원인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전후하여 "유럽을 배회하는 하나의 유령(공산주의)"을 막고자 했던 부르주아 계급의 의도와 강력한 외부의 적을 통해 내부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와 맞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 역시 냉전의 치열한 각축 속에 필요에 따라 상징조작으로 여러 영웅들을 만들어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 바로 이승복 어린이와 무너지는 둑을 맨손으로 막아낸 네덜란드 소년 한스이다. 최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을 통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들은 어려서 맥아더의 전기를 읽고,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가를 배웠고 그가 계속 UN군 사령관을 지냈더라면 남북이 통일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통해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미국의 오랜 문민우위 전통에 도전한 군인이었으며,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즉각적인 핵폭탄 사용을 전제로 무려 26곳의 공격목표를 지정해 폭격을 요구했던 인물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냉전과 독재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는 안보와 번영이라는 미명 아래 이승복, 한스, 맥아더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영웅(운명과 맞서는 존재로서)의 이상적 모습은 그 효력이 다했다. 오늘날 각광받는 안티 히어로(Anti-hero)의 모습, 그것은 공동체의 이상, 신의가 사라진 세상에 대해, 개개인이 경험하는 세속도시에서의 일상이 고전적 세계와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는 인식에 따른 반응이다. 게다가 우리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던 영웅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영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존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최근의 여러 노골적인 광고들을 보면서 그 자리를 누가 차지했는지 깨우치게 되었다. 새롭게 영웅이 된 존재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나는 부자 아빠를 꿈꾼다.", "같이 쓰실 래요. XX카드." 과연 이들 광고에 등장하는 김정은, 배용준, 박찬호를 사람들은 영웅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영웅은 연예인, 운동선수,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가진 돈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헛된 구호만으로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영웅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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