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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고흐(Vincent Van Gogh)

 

Okay, he slept with his girlfriend's adopted daughter.
Chaplin slept with teen-agers, too -- so I can't enjoy any of his films now, either?
Egon Shiele slept with his sister -- so I have to hate his art?
Socrates slept with little boys -- should I dump philosophy now, too?
- Woody Allen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인간으로서의 에곤 실레를 결코 좋아할 수 없다. 그를 왜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구구히 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아니므로 그의 인생과 예술 세계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판단을 여러분 각자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Self-Portrait, 1906, 목탄 ,45.5x35, 빈 알베르티나 - 에곤 실레가 16살 무렵에 그린 자화상이다. 그가 철도 공무원 집안 출신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스스로 기관사나 철도공무원을 꿈꾸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Wally with red blouse lying on her back, 1913, 연필, 수채, 템페라, 31.5x49, 개인소장

 

 

 

 

 

 

 

 

 

 

 

 

 

한껏 멋을 부리고 포즈를 취한 에곤 실레 - 그는 사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곤 실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두 권의 책을 샀다. 앞서 낙서장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에곤 실레』 /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시공아트 012/1999년>과 <『에곤 실레-에로티시즘과 선 그리고 비틀림의 미학』/박덕흠 지음/ 재원미술작가론 9/ 2001년>이 그것이다. 내 경우에는 약간 더 비싸기는 하지만 프랭크 화이트포드의 저술에 더욱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후자의 책보다 비평적인 면에서나 그밖의 면(표지, 내용, 도판 등의 면)에서 화이트포드의 책이 에곤 실레의 생애와 예술적 성취에 대해서 훨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화이트포드의 다른 책들까지 구해 보고 싶을 정도로 아주 좋은 내용이었다. 다만 몇 가지 옥의 티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편집자와 번역자의 실수로 생각된다.(예를 들자면 제1장 8쪽 밑에서 5째 줄에 보면 "1866년 프러시아와 이탈리아로부터 연이은 승리를 얻어내자 국가의 균열은 치유되지 못한 채"에서 1866년에 벌어진 전쟁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일명 7주 전쟁)'으로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프로이센이었다.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통일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두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

에곤 실레, 작품 세계의 뿌리가 된 제국의 몰락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황혼 무렵이라고 할 수 있는 1890년 6월 12일 도나우 강변의 툴린에서 태어났다. 에곤 실레는 비엔나 근방의 소도시인 툴린의 철도공무원 가문에서 태어났다. 실레의 아버지 역시 이 소도시의 철도 역장이었고, 그의 조부는 철도 기술자, 실레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큰아버지 역시 철도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민족 구성이 가장 복잡한 나라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가 원래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기 때문이다.(현대의 오스트리아는 과거 전성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10분지 1 정도) 그러나 이 대제국은 에곤 실레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복잡한 민족구성과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치 체제로 인해(나폴레옹 혁명의 반동으로 발생한 보수반동적인 메테르니히의 비인 체제 역시 오스트리아가 중심이었던 점에 주목하시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신성로마제국이란 명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원래 유럽 문명의 뿌리가 로마 제국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오스트리아란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제국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오스트리아였지만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해버리고, 이후 앞서 말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도 패하며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에곤 실레가 숨지던 바로 그날(1918년 10월 31일)에도 수도 비엔나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연합국 대표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에곤 실레에 대한 짧은 몇 줄의 글을 쓰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몰락사에 대해 글의 일부를 할애하는 이유는 그것이 에곤 실레의 삶과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나름대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두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일곱살 무렵엔 두툼한 노트 하나 가득 철도역의 기차를 드로잉 해 낼 정도로 실레의 미술적 감각은 탁월했다. 실레는 아마추어 소묘가였던 그의 조부와 부친의 재능을 이어받았지만, 그런 실레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실레의 아버지 아돌프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처벌로 실레의 드로잉 작품들을 태워 버린다. 실레는 엄격한 부친과 자신에게 냉담한 모친 사이에서 조숙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그의 나이 14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다. 매독은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흔한 병이었다. 제국이 몰락해 가던 시절을 빈에서 보냈던 유명한 전기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회상을 들어보자.

독신으로 지내는 친구들은 열이면 열, 창백한 안색으로 당황하여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어떤 이는 매독을 이미 앓거나 감염되었을지 모른다고 불안해했고, 또다른 친구는 여자가 가진 아이의 유산 문제로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세 번째 친구는 가족 몰래 치료할 치료비가 없어서였고, 네 번째 유형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돈을 지불해야할지 몰라서였다. 다섯 번째 친구는 윤락가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숙한 천재와 구스타프 클림트

  어느 제국이던 몰락이 다가오면 제국의 신민들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쾌락과 평온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미술과 무대 예술에 열광했으며, 거리의 건축물들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길 즐겼고, 중산 계급의 시민들(부르조아)도 귀족처럼 살려고 했다. 실레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사망은 청소년기의 민감한 실레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는 더욱더 사이가 나빠졌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친이 아버지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실레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매독의 병세로 인해 점점 더 기이한 행동을 보이다 결국 직장도 잃고 그의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이상화(자신의 재능을 탐탁치않게 여겼고, 드로잉들을 태워버린 아버지가 아닌가)시킨다. 실레가 아버지를 이상화시키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실레 자신이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실레 자신이 평생에 걸쳐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 것처럼 그의 모친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미망인으로서 충분한 슬픔과 애도를 표명하지 않은데 대한 사회적 수치심이 더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실레는 자신의 여동생 게르티와는 각별하였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하는데 그의 누이동생 게르티는 오빠를 위해 정기적으로 누드 모델이 되어주었고, 실레가 16살, 게르티가 12살 무렵엔 어린 누이를 데리고 트리에스테의 호텔의 더블룸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기까지 한다. 그곳은 자신의 부모가 신혼을 보낸 곳이었다.

  어쨌든 실레는 16세 되던 해 자신의 대리인이던 삼촌(백부는 미술보다는 음악 애호가였다.)과 무관심한 어머니가 마음내켜하지 않았지만 비엔나 미술학교로 보내졌다. 그는 이곳에서도 특별한 재주를 보였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자들은 그의 재주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스승은 실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악마가 너를 내 수업에 들여보냈구나. 어디가서 내가 너의 선생이라 말하지 말거라." 그는 이런 아카데미식 교육을 달가와 하지 않던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한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07년, 실레는 당시 비인 분리파의 수장격이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주변을 엿보며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는다. 그를 만난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을 작품을 보고 나서 "재능이 있군요. 너무 많아요."라며 그의 비상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이후 실레는 클림트의 막대한 영향(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실레는 클림트도 분명히 가보고자 했으나 결코 갈 수 없었던 영역까지 밀고나감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실레가 클림트와 달랐던 것은 클림트가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고 두리뭉실한 에로티시즘으로 포장한 것을 실레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여성은 비록 남성의 잘린 목(피가 뚝뚝 떨어져야 정상일테지만)을 들고 있더라도 정사 중인 여자처럼 만면에 홍조를 띠고, 몽롱한 눈초리로 타인에게 시선을 건넨다. 섹스 어필이란 점에서 만 보자면 클림트의 그림들은 후대의 핀업 걸(pin up girl) 사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실레의 그림들은 클림트에 비해 훨씬 더 도발적이다. 그는 여성의 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거나 심지어 수음을 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어쩔 수 없이 훔쳐보게 되는 입장에 처한 관객들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를 보라.(마치 '이 저질들아!' 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꿈의 간극 속에 감춰진 불안과 중산층 부르조아지들의 허위의식을 파헤쳐 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위선들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이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의든 아니든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추어 낸 사람은 어느 세계에서나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살아있는 내내 그런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고립되었다.

적대적 세계의 실체를 의식하지 못한 속물

  1909년 무렵까지 실레는 자신의 가족과 후견인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실레는 이 무렵부터(채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내기 시작했고, 세 명의 후원자들에게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후원자들은 그의 그림을 정기적으로 구입해줄 것이었고 그것은 그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주었다. 하지만 실레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니 스스로의 마음속으로는 만족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고흐(Vincent Van Gogh) 이후의 모든 화가들이 지니게 될 콤플렉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레 자신은 화가는 궁핍하고 고난에 처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가 화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법적인 보호자였던 어머니와 삼촌은 그 동안의 염려를 덜고 경제적 지원을 그만두었다. 실레 자신이 늘어놓은 이 시기의 경제적 고난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귀테르슬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에곤 실레는 보기 드문 미남인데다가 화가다운 데를 찾기 힘들었다. 머리는 단정했고, 하루도 수염을 깍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손톱은 항상 말끔하였으며 가장 빈곤할 때에도 궁색해 보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실레는 아주 우아한 젊은이로서 그의 세련된 태도는 당시 그의 서투른 그림 솜씨와 천양지차였다. 실레가 혁명 대중처럼 옷을 입고 천박한 아낙네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적인 일일 것이다.

  실레의 엄살은 사실과 달랐다. 실레가 궁핍함을 가장했던 것은 그가 중산층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거부한다는 코스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레는 말쑥하게 차려입고, 돈을 헤프게 쓰고 다니면서도 가난한 척 했고, 화가의 고단한 삶,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자신의 후견인이 누린 보다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원했다. 결국 자신에게 지극히 헌신적이었던 여인 발리를 버리고 부르주아 가정의 여인(에디트 하름스)를 선택하여 결혼한다.

  실레에 대한 글을 써 나가는 내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해는 하지만, 다만 그가 싫은 내 마음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란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줄곧 느껴지는 관객을 의식하는 포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부할 틈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스캔들 메이커 - 에곤 실레

  1912년 비엔나에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이렌바흐라는 마을에 비엔나의 어느 젊고 잘 생기고, 세련된 모습의 화가가 아뜰리에를 옮겨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화가는 행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비엔나와 뮌헨, 쾰른, 그리고 부다페스트 등 큰 도시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 만큼 유명한 화가라고 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에서도 파리 못지 않은 명성을 누리는 대도시 비엔나가 있는 나라였지만 문화의 비는 비엔나만 내렸고, 다른 도시들은 낙후돼 있었다. 그런 곳에 젊고 세련된 화가가 나타나 아뜰리에를 열자 비엔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신기한 듯 몰려들었다. 아이들이 화가의 아뜰리에를 들락거리는 것을 어른들은 좋게 보지 않았지만 특별히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화가는 어린 소녀들의 누드 드로잉을 그렸고, 그 그림들은 어린 소녀가 미처 성숙하지도 않은 자신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들춰 보이는 그런 것이었다.(아무리 인터넷 포르노가 범람하는 현재라도 그런 일이 걸리면 미성년자 약취 유인에 의한 법률로 당장 구속 수감에, 사회적 지탄을 면치 못할 일이다.) 실레는 그 일로 노이렌바흐 감옥에 20여일 간 수감된다. 어린 소녀를 유괴해 누드화를 그렸다는 죄목이었는데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져 풀려나긴 했지만 그의 아뜰리에에 걸려 있는 그림이 "청소년을 유혹하는 포르노물"이었다는 죄목으로 드로잉 한 점이 불태워진다. 일찍이 그의 부친이 실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실레의 화가로서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도 않았으며(당대의 오스트리아 사회에는 이런 류의 포르노성 사진, 그림들이 만연돼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히려 실레의 예술에 대한 순교자 의식을 더욱 자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에곤 실레』 /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시공아트 012/1999년
  
- 내 경우에는 약간 더 비싸기는 하지만 프랭크 화이트포드의 저술에 더욱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후자의 책보다 비평적인 면에서나 그밖의 면(표지, 내용, 도판 등의 면)에서 화이트포드의 책이 에곤 실레의 생애와 예술적 성취에 대해서 훨씬 더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화이트포드의 다른 책들까지 구해 보고 싶을 정도로 아주 좋은 내용이었다. 

 『에곤 실레-에로티시즘과 선 그리고 비틀림의 미학』/박덕흠 지음/ 재원미술작가론 9/ 2001년
  
- 국내 출판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앞의 번역서보다는 국내연구자의 저서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하고, 의미있는 접근이었다.

  에곤 실레 웹 이미지 갤러리
  
The Artchive 

  보스턴 미술관
  
Museum of Fine Arts, Boston  

  뉴욕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에곤 실레의 웹 무제움 Web Museum  
  
- 에곤 실레의 여러 작품들을 웹 이미지화 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영문)

  제1차 세계대전시의 예술
  Art of the First World War  
  
-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의 미술을 중심으로 한 전시예술을 볼 수 있다.(영문)

  아트센터 월드
  
- <에곤 실레 : 비엔나, 레오폴드 컬렉션 >이란 이름으로 뉴욕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실레의 전시회에 대한 글.(한글)

 


에곤 실레의 여인들

  에곤 실레의 여성 관계는 주변의 증언을 보면 그의 그림의 성적인 요소들에 불구하고 비교적 건전한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그런 증언들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이중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가차없이 속물로 지적하는 데에는 그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실레와 발리 노이칠 그리고 에디트 하름스와의 연애 과정에서 빚어진 실레의 이중적 선택의 문제였다. 발리 노이칠은 실레의 모델이자 동거 애인이며 도발적이고 요염한 면을 지닌 여자였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솔직한 여자였던 것 같다.

  발리는 원래 화가 클림트의 모델이었는데, 1911년 실레를 만나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실레가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발리는 실레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실레의 선정적인 누드 드로잉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심부름도 했는데, 그런 심부름을 할 때면 고객들의 성적 희롱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리는 순진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쉴레의 그림에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에서 그녀는 순진한 듯 하면서도 요염한 눈빛과 자세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아는 여자였다.

  실레는 자신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르주아 철도공무원 가정의 하름스 자매를 알게 되고, 발리를 시켜 그 집 자매에게 연애 편지를 전하게 한다. 물론 하름스 집안의 부모는 실레와의 교제와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지만 에디트 하름스는 실레를 사랑하게 되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레와의 결혼을 강행한다. 에디트 하름스는 동시에 실레의 곁에 그의 분신과도 같이 버티고 있던 발리와 대면하여 발리로 하여금 실레를 떠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실레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역시 그 다운 일이었다. 결국 발리는 실레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이런 발리를 실레는 마지막으로 만나 편지를 건네준다. 편지의 내용은 매년 여름 에디트 없이 함께 휴가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리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하고 떠난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실레 자신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실레에게 있어 발리는 실레를 실레답게 만드는 어떤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실레는 발리를 통해 억압되어 있던 자신의 성적 욕망을 분출할 수 있었고, 발리 역시 실레를 깊이 사랑했고, 그를 지켜주었고, 실레에 대해 나름의 헌신적인 사랑을 했다. 그러나 실레에게 있어 발리는 이미 클림트의 모델이었고,(클림트는 자신의 모델과 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주기는 하겠지만 부르주아적 안락함을 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실레는 어려움없이 에디트를 선택했으며 에디트의 사랑을 이용할 줄 알았다.

에곤 실레과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다

  에곤 실레가 드디어 본격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할 무렵 오스트리아는 세계의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워낙 다양한 인종의 도가니와 같았던 오스트리아인지라 발칸의 위기는 곧 제국의 위기로 불거졌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각축장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유럽의 성인 남자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유럽 문명의 위기 속에서도 에곤 실레는 전쟁에 거의 전혀라고 할만큼 관심이 없었다. 대전 초기에 그는 징집을 피할 수 있었으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그도 징집의 그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일이었다. 그는 에디트 하름스와 함께 병영을 돌아다녔고, 그의 상관에게 자신이 비엔나에서 얼마나 유명한 화가인지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노력의 결과 그는 전투부대에 배속받지 않고, 후방에서 편안한 근무를 하며 군대 창고의 일부를 아뜰리에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번진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이 10월 비엔나를 휩쓸었다.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 하름스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실레는 그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의 뒤를 따랐다. 실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실레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자신의 사후에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 전시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는 우리들이 그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것은 그가 유명해지기 애썼던 그런 몸부림이 아니라 그의 재능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들 자신의 내재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출세에 대한 욕망, 안락함에 대한 희구, 명성에 대한 갈증, 성적인 쾌락, 관음증, 롤리타 콤플렉스와 같은 것들 말이다. 에곤 실레는 감추려 했는지 몰라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중성과 관객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오늘날 그의 회화가 전세계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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