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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朴壽根 , 1914 - 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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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 - 박수근

 

 

 

이중섭

권진규

장욱진

오윤

김수영

20세기 미술사 연대표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

  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음에도 아니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번이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청년시절의 박수근(1930년대 후반)

 

 

 

결혼기념사진(1940년 2월 10일)

 

 

 

1952년 미군부대 PX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왼쪽에서 두 번째).

 

 

 

창신동 집 앞에서(1950년대 후반)

 

 

 

 

창신동 집 앞에서(1950년대 후반)

 

 

 

 

<나무와 두 여인> 1962. 130×89cm, 캔버스에 유채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낙담한 박수근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결혼한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운 부부의 전형을 꼽으라면 나는 이 박수근·김복순 부부와 김성칠·이남덕 부부(이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역사 앞에서』/창작과 비평사/1993 을 읽어보시길), 그리고 화가인 장욱진·이순경 부부를 들고 싶다.

박수근,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상처

  수근의 그림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부친은 광산사업을 실패하고 잇따라 전답마저 잃어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큼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인정을 받아 일본인 교장 선생은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16세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은 격려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볼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고, 그는 1932년 11회 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그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몸져눕게 되고 결국 그의 나이 21세 때(1935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수근은 이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지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위아랫집으로 살던 김복순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초에 직장 생활을 위해 본의아니게 별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우체부가 투덜댈 정도였다.) 남편 박수근은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편지에 그곳이 몹시 춥다고 쓰자 아내는 자신의 털실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텔 스웨터를 짜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짜보냈고 남편은 그에 감격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득문득 이 분의 살아온 행적들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그도 아니면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선한 이웃 어른의 모습들과 중첩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구김살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주는 자상한 아버지. 안으로는 세상의 모든 풍상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바깥 세상의 온갖 풍상들을 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의 모습. 박수근 세대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어려서는 식민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궁핍을, 해방 이후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들의 자식이 베트남 전쟁이란 외국의 전쟁에 파병되는 경험을 했다.

  실제로 박수근의 자식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연배 세대가 경험한 세 차례의 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겪어내야 했을 무수한 상처들 중 가장 두드러진 체험이였을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박수근은 동생 동근을 병으로 잃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 이르자 1944년엔 자신을 제외한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의 본가로 내려보낸다. 그들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맞이하는 첫 번째 이산이었다. 해방된 후인 1948년엔 맏아들인 '성소'를 '뇌염'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던 중 다시 가족과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그의 셋째 아들 '성인'이 죽는다. 박수근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은 일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서 남성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빨래터> 1950년대 후반, 50.5×111.5cm, 캔버스에 유채

나목(裸木) - 시대의 아픔을 체험하고 그린 화가. 박수근

  쟁 통에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은 박수근만이 경험한 일은 아니었다. 시인 김수영도 자신의 아내와 헤어졌고(경우는 많이 다르지만), 다른 많은 이들이 가족과 헤어지는 이산 가족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박수근은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 노동을 하면서 생활해야 하는 와중에도 붓을 놓치 않았고, 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무렵 다시 공산 치하가 된 금성에 남아 숨어 지내던 그의 아내가 어린 남매 인숙과 성남이를 데리고 남하하는 데 성공했고, 이 무렵(1952년) 박수근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처자의 남하 여부를 매일 수소문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재회에 성공한 박수근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혜화동에서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화방의 주선으로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기 위해 나섰다. 그러던 중 이상우의 소개로 1953년부터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작가 박완서의 소설『나목(裸木)』은 이 무렵의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본점 건물이 된 당시 미 8군 PX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수입이 훨씬 좋은 초상화를 그렸다. 이 때 여기에서 모은 돈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는 이 작은 집 마루를 아틀리에 삼아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에 대하여

화가는 화강암의 질감과 색조를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아마도 그가 강원도 출신으로 타지역보다 유난히 돌이 많은 산간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돌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것을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이끼낀 듯한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마티에르를 창안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상의 평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된 것이다."(「박수근」열화당)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가의 아호는 미석(美石)으로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조선미전 도록에 한 번 실린 적이 있을 뿐 별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박수근의 화강암 질감표현 과정

이러한 화강석의 질감을 내기 위해 화가는 여러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윤범모 씨가 이러한 과정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을 기초로 분석하였다.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이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제작과정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캔버스의 바닥 면에 기름을 섞지 않고 뻑뻑한 체로 물감을 칠한다.
둘째, 캔버스의 결을 따라 가로 세로를 번갈아 가며 제소를 바르지 않은 마대로된 캔버스에 올의 우둘투둘한 요철에 의해 질감이 나타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칠한다. 이 때 어두운 색깔로 10~15회 바탕칠을 반복한다.
셋째, 반복적으로 칠해진 물감은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마티에르(질감)을 형성하는데 마른 후에 나이프로 크게 뭉쳐진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본래의 고유색이 마모된 상태로 남는다.
넷째, 화강암의 깊이 있고 묵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암갈색으로 반복적으로 붓질을 하여 바 탕 처리를 한다.
다섯째, 그렇게 된 바탕 위에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색을 칠한다.
여섯째, 마티엘 간의 부조화 부분은 十자 모양의 붓질을 다시 하면서 마무리한다.

그는 실제로 화강석을 옆에다 두고 그 질감을 관찰해 가며 작품 속에 이를 재현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처럼 화강암에 애정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돌이며 수많은 조각이나 암각화의 재료로써 민족적 정서를 담고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귀한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이라는 흔한 돌멩이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박한 보습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밑의 참조 사이트에서 발췌하여 재구성>
 

 

 

<길> 1964. 13.×89cm,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연보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1932년 독학으로 선전입선
1932년 - 44년 평안남도청 근무, 평양에서 <주호회> 창립
1945년 금성여중 미술 교사
1952년 6.25 전쟁 중 월남
1953년 - 64년 <국전>에 출품하여 수회 특선
<국전>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195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서 미술전> 초대 출품
1958년 <한국회화전>(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초대 출품
1959년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전> 초대 출품
1965년 5월 6일 별세
198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1985년 20주기 기념전(현대화랑)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화첩기행 1.2/ 김병종/ 효형출판 / 2000년 - 사실 1권에는 박수근에 대한 글은 없고, 2권에만 그에 대한 기록이 짤막하게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을 여기에 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 책이 한 때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번쯤 읽어둠직한 충실한 내용들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 오광수/ 시공아트 28/ 시공사/ 2002년 - 화가 박수근에 대해 출판된 가장 최근의 책 중 하나이다. 그에 대해서 관심은 있는데 화집이랑 기타등등 여러 책들을 함께 구입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무리인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다. 거의 20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박수근 1914-1965/ 박수근/ 열화당/ 1985년

박수근 양구군립미술관 - 화가 박수근의 출신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양구군립 미술관의 미술 사이트이다. 그의 생애 및 작품 세계, 작품 갤러리들이 충실하게 꾸며져 있으므로 바람구두는 박수근 화백에 대한 별도의 갤러리 페이지는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보고 싶은 분들은 이곳을 즐겨찾기 하시길.....(한글)

현대갤러리 - 박수근에 대한 좋은 책과 사이트들은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곳으로 이 두 곳을 추천한다. 박수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유익한 비평과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한글)

 


창신동 집에서(1950년대 후반)

  1953년 박수근은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가을에 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國展)> 서양화부에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어 각광을 받았다. 전쟁을 겪으며 박수근의 화법은 그만의 독특한 것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수근은 소박하면서 단순화한 주제 전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과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그만의 표현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이해에 그의 막내 아들 막내아들 성민(成民)이 태어난다.

  박수근은 평양에서 잠시 도청 서기로 공무원 활동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업작가의 삶을 살았다. 1954년엔 그나마 벌이가 괜찮았던 PX 초상화 그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작업에만 전념하려 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가적 자존심이 그런 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막 끝났을 뿐인 당시에 그의 작품들이 생활에 도움이 되긴 어려웠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그가 1957년 그가 정성을 다해 출품한 100호 크기의 작품 <세 여인>이 제6회 국전에서 탈락하자 그의 충격은 대단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그의 음주가 심해졌고,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전해였던 1955년 제5회 국전 때에는 사상 초유의 국전 거부사태가 발생하는 등 미술계 전반이 어수선했고, 국전을 둘러싸고 미술계의 파벌 다툼이 극에 달해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20세기 미술사 연대표를 참조하시길)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수근에게는 여러모로 힘든 시기들이었지만 국전에서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 세계는 오히려 더욱 확고해진다. 이 무렵 그의 작품들은 박수근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들과 그가 애초부터 원했던 밀레의 그림과 같은 서민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때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후원하는 미국 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과 알게 되어 박수근의 작품 세계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많이 소개되고 알려지게 된다. 그의 작품이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되고, 뉴욕의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전시되었지만 정작 박수근은 57년의 낙선으로 <국전> 출품을 포기한다. 이런 기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당시 국내 미술계의 현실이었다. (이런 현상은 그후로도 가끔씩 국내 미술계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분야에서 빈발했다. 국내 평단에선 인정받지 못하다가 외국에서의 인정으로 다시 국내 역수입되는 현상 말이다.)

  박수근은 그 이듬해인 1959년엔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어쩌면 일종의 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4.19와 5.16을 겪으며 그의 건강은 서서이 쇠약해져 갔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작품성과 독특한 기법은 세인의 주목을 받았고, 평생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그에게 국전 측은 1962년엔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영광을 주었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했으며 불우해 보였다. 그의 과음은 여전했고, 과음 끝에 결국 신장과 간이 나빠지면서 왼쪽 눈의 백내장이 도지고 말았다. 박수근의 명성은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너무나 가난했고, 너무 가난한 나머지 백내장 수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던 끝에 백내장이 더 악화되고 난 뒤에 야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 경과는 썩 좋지 못했고, 결국 고통 끝에 재수술 결정을 내려 다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과정에서 그만 시신경이 끊어지고 말아 아예 왼쪽 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건장한 체구의 건강한 몸이었던 그의 몸이 과음과 혹사 끝에 망가져 이제는 안경을 써야 했고, 그나마 왼쪽눈은 보이지 않아 오른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좋지 않은 일로 오랫동안 정 붙이고 살던 창신동의 집을 떠나 전농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밀러 부인이 그의 개인전을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했으나 결국 열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지만 그는 작업을 전혀 멈추려 하지 않았고, 작업하는 동안의 과음도 계속 되었다.

  1964년 그는 국전의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를 출품한다(개인적으로 박수근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지만 이미 병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5월 5일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을 기다리게 되었다. 퇴원하여 집에 온 그날 밤 박수근은 6일 새벽 1시에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그의 주검은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우리들의 아버지

  가 박수근의 삶은 분명 신산스러운 것이었지만, 이중섭이나 권진규, 오윤 등 다른 여러 화가들의 삶처럼 극적인 긴장으로 가득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에 비하면 도리어 평범해보이기 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날 박수근의 그림을 가장 한국적인 유화의 세계로 인정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박수근의 작품들이 발산하는 가장 큰 힘은 "리얼리즘과 문인화적인 높은 정신성의 힘" 기인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평생을 거의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면서도 전업 작가의 길을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록 가족을 책임지는 생계의 부담을 지고 있었고, 이를 등한히 한 적도, 할 수도 없었으므로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PX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절박한 가난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되자 금방 이를 그만두고 만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태어나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을 겪으며 동생과 자식 둘을 잃고 만 아버지. 돈 벌이를 위해 자식들을 베트남의 먼 이역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아버지들. 난 화가 박수근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런 슬픔에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란 것이다.

  자식 잃은 어미 황소처럼 자신의 심장을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커다란 선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음머'하고 한 번 울음소리 한 번 길게 뽑고 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에서 선은 민화풍의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색채는 마치 문인화의 그것(묵화)처럼 회색조가 주종을 이룬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애써 푸르름을 가장한 풍성한 것이 아니라 마치 문인화의 대나무와 난초처럼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거나 각을 이룬 채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어쩌면 우리들은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수법에 현혹되어 그의 작품들이 담고 있는 문인화적 정신성의 힘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가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 여사는 "그이는 물건을 사실 때면 큰 상점보다는 노상의 손수레나 광주리 장사에게서 사셨다.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늘 애처롭게 여겨 그분의 그림의 소재가 모두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남편에 대해 위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이를 자신의 일처럼 상처받았던 화가의 생애는 민초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꼈던 참 선비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미술평론가 유준상은 박수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수근은 진정한 뜻으로서 한국의 화가이며 민중의 화가였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밟고 다니는 우리의 땅을 가리키는 것이며, 민중이라 함은 그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실체들을 가리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그의 미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모습과 그 위에 살고 있는 동포의 표정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그의 미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은 아니며 계몽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세대의 가장 슬픈 자화상을 남기고 떠난 우리 시대의 아버지. 제 민족, 제 동포를 하느님 같이 섬기고, 사랑하고 떠난 화가. 박수근의 모습에서 나는 늘 마음놓고 기댈 수 있었던, 그러나 정작 당신의 마음은 늘 상처투성이였을 아버지의 커다란 등언저리가 느껴진다. 그리고 당신의 그늘이 얼마나 크고 멀리 가는 것인지를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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