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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張旭鎭, 1918. 1. 8. - 199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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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 간 화가. 장욱진

 

 

 

만공 선사

나혜석

김은호

김환기

앙투완느 부르델

파블로 피카소

박수근

이중섭

오윤

권진규

마르크 샤갈

하비 콕스

 

   끔 동양의 '신선(神仙)'이란 개념을 서양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상상해본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좀더 다양한 의미와 진폭을 가진 개념일 '사부'나 '스승'이 그들에게는 'My Master' 정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면 분명 '신선'의 개념은 애니미즘의 일종이나 샤머니즘의 한 부류, 도가(道家)적인 느낌의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한국인으로 교육받지 않은 이들)에게 우리의 '신선'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신선'이란 '조선의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마을 뒷산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툇마루 한켠에서 곶감 이야기에 놀라 달아나는 친숙하고 어리숙한 대상이자 동시에 산을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짐승인 것처럼 매우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마찬가지로 화가 장욱진을 설명한다거나 설명하려는 시도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장욱진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자면 행복한 화가였다. 시대는 그에게 좀더 긴 삶을 허락했다. 장욱진에게는 이중섭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아내가 있었고, 박수근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살아 생전의 명예가 있었고, 김환기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고국에서의 삶이, 추상도, 구상도 아닌 동양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있었다. 장욱진은 생전에 아내와 가족은 물론 그를 사랑하는 제자, 친구, 수많은 지인들이 곁에 있었다. 그 점만 놓고 보자면 그는 우리의 시대적 한계와 주변의 무시 속에 숨쉴 공간을 얻지 못하고 사라져 간 조각가. 권진규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평안함이 있다.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라는 개념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에 의한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기독교가 신학적, 교회적 편견(이를테면 세상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으로 단정하고, 교회와 신학을 성서와 교회 내의 문제만을 다루도록 하는 태도 등)에 젖어 보수화되어 버린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대안 개념의 하나로 '교회의 세속화'를 부르짖은 인물이다(나중에 차차 다루겠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콕스의 이런 주장은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준다. 장욱진이 태어나 살아갔던 시대는 소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 민족이 5,000년 역사를 일구며 살아왔던 이 땅에서 호랑이의 씨가 마르고, 까치가 동네 어귀의 나무에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의 위치에서 쫓겨나 아파트 인근 공원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시기였다. 콕스에게 있어 '세속도시'란 신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다시 신에게 다가설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성립하는 '인간의 도시'란 점에서 긍정적이었지만 장욱진이 살아야 했던 시대는 까치 한 마리로 신의 세계, 인간의 영과 혼이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세속도시화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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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樹下), 1954, 캔버스에 유채, 33x24.7cm, 개인소장 - 장욱진은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 가족을 즐겨 그렸다. 위 그림을 보면 풍성한 잎사귀가 매달린 나무와 그 나뭇가지에 앉은 네 마리 새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편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면서 나무가 지닌 신비한 생명력에 감동하곤 했다. 그래서 나무가 자라는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사는 민족들은 저마다 나무에 대한 전설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신단수라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등장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이자 사시사철 변치 않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을, 철마다 변화하는 나무들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장욱진은 이런 나무와 새를 통해 생명에 대한 애정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사람은 나무 밑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오랜 명상 끝에 도를 깨우쳐 부처님이 되었다. 어찌보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벌거벗고 드러누워 그의 시선으로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같고, 어찌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득도한 뒤 득의만면한 미소를 띄운 채 잠시 쉬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저 하늘은 과연 어떤 것일런지.

 

 

 

 

 

 

 

진진묘, 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덕소로 돌아가 7일 낮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렸다는 아내의 초상화 그림이다.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림이 참 묘하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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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방, 캔버스에 유채, 22.0×27.0㎝, 1973 - 마치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처럼 단순화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내게는 꼭 남편과 아이는 밥달라고 보채는데 부엌에는 더 이상 먹을 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아 시름에 젖은 아내의 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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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1988, 캔버스에 유채, 35x35cm - 해와 달과 소와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각기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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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일명 보리밭) 종이에 유채 14.8x10.8cm 1951 

 

자화상(自畵像)의 변(辯)

"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고향에선 노모님이 손자녀를 거두시며 계시었다. 내려오라시는 권고에 못이겨 내려가니 오랜만에 농촌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 뿐이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나룻터」,「장날」,「배주네집」. 이「자상自像」은 그중 하나이다. 많은 그림들이 그 역경 속에서 태어났니 동네사람들이 가인이라 말하도록 두문불출, 그리기만 했던 것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 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畵廊 1979년 여름호>
 

 


  그렇다면 과연 장욱진은 신선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기원과 소원 성취라는 방식으로 상호교감하며 소통해왔던 개념, 인간과 자연이 강제로 구분되지 않던 시대의 인간으로서 세속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었겠는가를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다소 불경스럽긴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작품 <헤이세이 너구리대전쟁 폼포코>에서 인간에게 자연을 빼앗겨 도시로 숨어들어 살아야 하는 너구리들을 상상해보시길. 음, 아무리 생각해도 불경스럽긴 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경험하다 - 아버지의 죽음

  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백두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다 양 갈래로 금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으로 나뉘는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 전통적인 한옥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있었다. 앞으로는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이어지는 미호천이 흐르고, 안채 뒤로는 높다랗게 솟아난 나무 위로 까치집이 있는 이 한옥은 장기용, 이기재 부부의 살림집이었다. 장욱진은 이들 부부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선친 때부터 제법 재산을 모은 부유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농사 일을 거드는 틈틈이 스스로 병풍을 만들고, 거기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장욱진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에게도 틈틈이 습자를 하게 했고, 그 가운데 잘된 것이 있으면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켜보며 흐뭇해했던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아버지가 시서화를 즐겼고, 또한 멋쟁이었다고 회상하며, '흰 구두에 중절모 차림으로 마실 나가는 아버지의 저고리 한쪽으로 번쩍이는 회중 시계가 보일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참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어린 장욱진의 집에는 종종 이름있는 승려들의 내왕이 있었을 만큼 불교와의 인연이 깊었다. 그것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의 집안이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이 비교적 재산도 넉넉한 편이라 인근 사찰에 물질적인 시주도 종종했기 때문이다. 단지 물질적인 시주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고향 마을 부근의 명사찰인 수덕사의 이름높은 선승인 만공 스님의 제일 가는 신도 중 한 사람이었다. 화가의 아버지는 자녀의 신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시집 간 누이의 설득에 따라 일가족으로 모두 서울로 이사하게 했다. 이때가 장욱진의 나이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 화가가 일곱 살 나던 해인 1923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염병에 걸린 친척 문병을 갔다가 거기서 병에 옮아 고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혼자된 어머니와 장욱진의 가족은 서울에서 고모의 돌봄을 받아야 했는데, 막내 동생 시진은 유복자였다. 장욱진의 형제는 모두 4명이었다. 둘째로 태어난 장욱진은 아버지가 안 계신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맏형을 아주 어려워하고 따랐다. 그리고 밑으로 동생 성진, 시진이 있었다.

  그가 까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인류는 원형상징  체계에서 새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고가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어린 장욱진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징이라는 것이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까치 혹은 새가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장욱진에게 까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나무 가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였거나 자신을 세상에서 훨훨 자유롭게 만드는 존재였을 것이다.

호랑이 큰 고모와 화가로서의 입문 과정

  버지의 죽음 뒤 장욱진 가족의 살림살이는 고향의 둘째 큰아버지가 보내주는 살림과 호랑이같은 고모의 돌봄이 컸다. 큰 고모는 이들 형제의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장욱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자식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한 분이었지만 시누이인 고모 앞에서는 늘 시집살이하듯 살아야 했다. 남편 없이 아들 사 형제를 교육시키고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장욱진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 우리나라는 아직 일본의 식민지였다.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장욱진은 이때에도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하지만 그림이라면 당연히 그리는 대상과 꼭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들은 장욱진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미술 성적은 늘 병()에 머물렀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늘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이었지만 호랑이 같은 고모는 공부는 안하고 늘 그림에만 몰두하는 어린 장욱진을 야단치곤 했다. 그런 탓에 장욱진은 고모 몰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치 바흐가 그러했듯이 방문을 잠그고 몰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서 새로운 미술 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는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해온 선생님이었다. 그는 장욱진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소학생 미전'에 내보내도록 해주었다. 전국 소학생 미전이라는 것은 당연히 일본과 조선을 통틀어 미술에 재능있는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회였다. 장욱진은 이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상장을 수여받는 행사를 치렀다. 그는 훗날 상에 대해서 '어린 나이에 상을 주어 칭찬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은 좋지만 상이란 것이 예술가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상 실적은 미술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없는 교사들도 그의 그림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지 이후 그의 미술 성적은 거의 갑()이었다.

 장욱진은 14살이 되어서 경성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장욱진은 그다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3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일본인 역사 선생이 공정치 못한 일을 하자 여기에 대들어 따지다가 결국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역시 그 선생도 문제가 있었던지 만주로 쫓겨가게 되는데 나중에 감옥에 가고 말았다고 한다. 어쨌든 학교에서 쫓겨난 장욱진은 주변의 화가, 조각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의 아뜰리에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장욱진의 고모는 그가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림만 그린다고 장욱진의 종아리를 때렸다. 고모는 "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화가가 되면 모를까"하면서 때렸지만 장욱진은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좀 더 큰 세계와의 만남 - 만공선사

  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호랑이 같은 큰 고모에게 종아리를 맞은 얼마 뒤 장욱진은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해 장욱진은 가족들과 떨어져 예산 수덕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살 때였다. 그곳에는 옛날 그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던 만공 선사가 있었다. 만공선사는 경허의 제자로 일제 시대 때 조선불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분이었다. 만공은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불교 회의에서 당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반대하며 데라우치 총독이 듣는 앞에서 "전 총독 미나미는 한국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말할 만큼 민족의식과 기개가 높은 이였다. 장욱진은 수덕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만공선사의 방에서 머물면서 때마침 그곳을 찾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나혜석은 한때 함께 활동했던 일엽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던 차였다. 일엽은 본명이 김원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인 <신여자>를 만들었던 이로 기독교 집안 출신의 신여성이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출가한 이였다. 만공은 나혜석으로 하여금 경내에는 머물지 못하게 하고 일이 있을 때만 오가도록 했다고 한다.

  장욱진이 수덕사의 아름다운 대웅전(혹자는 몬드리안의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운 면구획이라고 평했다지만 보면 그 평과는 상관없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건축물이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만공과 나혜석을 통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나혜석은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좋다고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만공은 장욱진을 출가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뜻과 재능이 불도보다는 그림에 있음을 알고 "네가 하는 일과 불도에서 하는 일이 똑같다"는 말을 하며 출가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반년간의 수덕사 요양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36년 봄 양정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등학교) 3학년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양정고등학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출신 학교였다. 장욱진은 당시로서는 키도 컸고, 체격이 좋아서 높이 뛰기와 빙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장욱진은 운동보다는 그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7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학생 미전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이 가작상을 받았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때 심사위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고희동을 비롯해 조각가 김복진, 이당 김은호 등이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상이란 것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남의 평가보다는 자기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받은 상을 누구보다 내심 기뻐했던 사람은 그의 고모와 가족들이었다. 상금 백원을 받은 장욱진은 그 돈으로 고모에게 비단 옷감을 끊어 드렸다. 조카 장욱진이 최고상을 받아오자 결국 고모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세계에서 첫째 가는 화가가 되려면 모를까"라며 이때부터 화가가 되려는 장욱진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노력과 재능이 완고했던 가족의 반대를 무너뜨리고 일본 유학까지 후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동경유학생 장욱진의 조국

  1939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장욱진은 먼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형의 도움을 얻어 그 해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없애기 위해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이름과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제했다. 장욱진의 집안도 결국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욱진은 일본에 가서는 오히려 창씨개명 전의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 유명한 미술학교는 동경미술학교를 비롯해 몇 군데가 있었지만 장욱진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대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일본 역사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 의식의 발로로 일본 국사를 무시해 공부하지 않았고, 그림에 학력이 무슨 관계냐는 생각에서 일부러 제국 미술 학교를 찾았다. 더군다나 제국 미술 학교는 신진 학교였기 때문에 교풍이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예술은 자유로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학생들은 이 학교를 선호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장욱진에게는 제국미술학교의 교육 역시 답답했다. 이 무렵 일본은 자신들의 중국 침략 행위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로 인해 서구 제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이들과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점차 강화되는 군국주의 기운은 국수주의를 불러 일으켜 모든 일본적인 것이 가장 애국적인 것이라고 강요했다. 때문에 일본풍을 따르지 않는 장욱진의 그림은 일본인 교수들에게 늘 꾸지람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에 수많은 유학생들을 보내며 그들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은 서구의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들의 화풍과 사조를 따라가는 데 더 급급했고, 어떤 것은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이 자랑하는 서양화가들의 상당수가 오늘날엔 다만 서구 화풍의 아류로 분류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그것은 우리 미술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의 세계와 고향의 야트막한 언덕들과 군더더기 없는 우리의 건축 양식을 보면서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한 장욱진에게 꽉 막힌 것 같은 일제 시대의 대학 생활은 매우 고달픈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장욱진은 이런 괴로움을 나중에 자신의 제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멋대로 그린다고 일본에서 공부할 때 선생들이 지적했다. 그때 주위에서 내 그림에 일본풍이 안 보인다고 싫어했다."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장욱진과 그의 친구들인 조선인 유학생들은 민족 감정 때문에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늘 조선인 학생들만 경찰에 잡혀가야 했고, 심지어는 일본인 경찰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의 하숙방까지 수색하거나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무얼 그리고 읽는지 감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장욱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 교수와 동료 학생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조각가 앙투완느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와 기우치 요시 같은 이들은 장욱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제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장욱진은 이런 일본인 선생님들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앞서 자신의 제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멋과 그림을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혀 나간다. 그는 유명한 누군가의 제자로, 누군가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걸어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매우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가야하는 선구자에 대한 사회의 처벌.

전쟁의 슬픔에 취하고, 술로 휴식을 얻은 화가

  욱진은 일본 유학 중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이병도는 우리 역사학의 태두이자 우리 역사를 실증사학(어찌보면 싫증사학이지만)이라는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고정시킨(더욱 큰 문제는 사관이 없다는) 책임이 있다고 비판을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사관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할 때, 우리 학자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 '진단학회'였다.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학회를 이끌고 '진단학회보'를 만든 업적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늘 혼자였던 까치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장욱진은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일제 징용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징용에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 대한 장욱진의 반감은 매우 컸다. 그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외국 여행 중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해야할 때라도 자신은 일본말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은 찾아왔지만 아직 나라의 꼴이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고, 화가가 할 만한 일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장욱진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때마침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장욱진은 박물관 직원으로 개성과 경주의 고분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우리의 옛날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이건 순전히 추측이지만 그의 특징적인 회화 기법 중 하나인 캔버스에 밑칠을 해놓고, 그림을 그린 뒤 유화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식의 유화들에서는 어쩐지 고분 벽화의 느낌이 든다. 벽화가 프레스코 기법이랄 수 있는 회칠된 벽이 채 마르기 전에 색채 물감을 이용해 채색이 벽 안쪽까지 침투해 들어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캔버스에 밑칠을 한다는 것이 그렇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 캔버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만드는 것은 고분의 채색이 떨어져 나간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음, 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읽은 그와 관련된 서적이나 논문에서는 그가 고분 벽화 발굴 작업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한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추어 감상자인 입장에서 다만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아둔다. 누군가 미술평론을 전공하는 이가 있다면 한 번 연구해 주었으면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선조들의 공예품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감상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든 무능하다는 혹평을 들었기 때문이든 얼마 안가 자의로 박물관을 그만두었다. 그의 천성이 조직생활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일을 그만둔 장욱진은 동료 화가들과 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막 벗어난 신생공화국의 활기는 모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이때 그와 함께 활동한 화가들은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으로 이제는 모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었다. 장욱진은 좌우이념의 혹독한 대립 속에서 좌, 우 모두로부터도 손짓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먼저 피난보냈지만 자신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장욱진은 혼자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잠시 인공 치하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넥타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더 이상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이것이 장욱진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지만 당시 남한 사회의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았던 일부는 북에 대해서 혹은 북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에서 부러 피난을 늦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화가는 피난 시절 한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고, 전쟁 그림을 그리는 종군화가단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장욱진은 그때 종군화가상을 받았는데 상장은 버리고, 상금만 들고 와서 술이나 마시자고 외쳤다고 한다.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그리고 받은 상장과 상금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던 것이다. 화가 장욱진의 일생은 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그토록 폭주(爆酒)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부터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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