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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한 해가 될 듯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500만 표 차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저 역시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지겨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기분은 씨랜드 화재 참사로 어린 아이들이 떼죽음 당한 뒤 이 나라를 떠난 어느 금메달리스트 어머니의 기분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느낌은 해마다, 철마다 반복되는 절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때 이른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스스로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차라리 냉소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익할 터인데, 어째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제가 10년 넘게 냉소만으로 일관하며 지내본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냉소주의는 여전히 제게 매력적인 삶의 태도이긴 하지만 차가운 미소는 저 홀로 공부할 때만 머금을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에라도 선택하고, 실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겠지요. 살아가려는 자에게 냉소는 자신을 비춰볼 때만 꺼내보면 족한 거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의 500만 표 차는 물론 어느 일방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투표율이었지요. 이번 촛불 시위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에는 물론 이명박 후보를 진보라 생각하고 투표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명박이 진보?” 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으나 질문을 바꿔 “노무현도 진보?”라고 반문해봅시다. 더 나아가 당시 “민주노동당이 진보?”라고 질문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지난 대선이 최악의 대선이었던 까닭은 ‘대의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의 대다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과연 ‘대의민주주의’는 우리가 거리의 촛불시위 현장에서 매일같이 불렀던 노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잘 반영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대의민주주의’를 현대의 복잡해진 사회에서 대중의 정치적 의사를 실제 정치에 반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OECD국가 노동자들 가운데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임 대통령은 더 열심히, 더 많이 노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국민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 되면 다시 거리에서 밤새 촛불을 들고 시위를 벌입니다. 이러다 국민 노동자들이 과로사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국민들이 이렇게 촛불을 들고 나선 까닭은 물론 표면적으론 30개월 이상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검역주권을 손쉽게 포기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인 원인은 낮은 투표율, 다시 말해 지금 거리에 나선 시민들 대다수가 지난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란 점입니다. 즉, 국민 대중의 정치 의사를 현실 정치에 반영(대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진 다들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대중이 단순히 “보수 대 진보”의 구분과 그에 따른 정치 인식만 존재한다면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저는 단순히 대한민국 국민이 우매해서 혹은 그간의 역사와 교육 등의 문제로 인해 자신의 계급성(의식)에 기초하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판단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해왔지만 저는 이토록 영리하고 전략적인 대중이 사는 나라는 도리어 드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감각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다는데 다들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진보를 말하는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가 물러나고 정권을 넘겨준다한들 과연 권력을 잡을 능력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학자들이나 문화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한국인들의 피에 유목민적인 기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과연 촛불 시위 진행 과정이 유목적인(철학적인 '노마드' 말고라도) 방식이라는데 동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순 있어도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고. 결론적으로 말해 촛불 시위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고,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촛불 시위에 대해 많은 분석이 있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의 혁명”(한 총리가 물러나든 아니든 현 정부가 보여줄 만한 것들은 이미 다 나왔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전반기에 인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잠식당해 권력의 주인들을 정치상품(정당)의 소비자로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대의민주주의란 민주주의 시스템은 겉보기엔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놓고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정치시장에 진열된 상품들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을 등에 업은 독점적인 카르텔에서만 생산된 상품들만 가득하다는 겁니다. 이들은 비록 다른 상표명을 하고 있긴 하지만 유사한 품질, 유사한 기능의 상품들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주권재민이란 민주주의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투표 거수기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권력의 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당 대신 야당에 투표하거나 투표를 포기하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같은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선 진보 세력이 대중의 회의와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생활 진보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석유’ 없이 산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든 것이 생태주의의 공덕이라면, 진보는 ‘시장’없이 혹은 ‘자본주의’ 이외의 체제로 산다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석유’없이 사는 것을 상상하는 일 보다 ‘시장’ 없이 산다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더 큰 공포로 느껴진다면 민주주의는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집니다. 지난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사회주의가 ‘시장 없는 민주주의’의 유사품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인민이 권력의 주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치명적인 독소가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깨우치기보다 그 독소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와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누구나 은연중에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의 선택일 겁니다. “촛불 이후”의 우리가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자”들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 자”들이 될 런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적 급진화의 길’과 ‘급진적 민주주의의 길’이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강한 민주주의의 원천은 내가 걱정하는 것 못지않게 타인도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과 우리가 함께 할 때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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