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학부 졸업하고 지금은 유학 가 있는 제자가 뜬금없이 카카오톡으로 저런 질문을 한다.
Q. 인간은 차별 없는 세상을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으면서 왜 그런 세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미래에 언젠가 당도해야만 할 세상인 것처럼 말하는 걸까요?
A. 자유와 평등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세상을 모르는 몽상가들이자 이상주의자라고 말했던 건 발자크인데, 차별 없는 삶을 꿈꾼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기독교적인 망상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생시몽과 푸리에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주의를 현대에 와서 새로운 기독교를 과학적으로 창안하는 일이라고 믿었단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비판 받았지만, 그들 역시 사상적 뿌리에선 궁극적으로 지상천국(유토피아)을 꿈꾼 사람들이란 비판을 받지. 나는 사람들에게 가끔 ‘천국은 모호할수록 매력적이고, 지옥은 구체적일수록 매력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왜 그럴까? 지옥은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정(正)에 해당하는 것이잖아. 투쟁(反)하면 합(合=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할 텐데, 그렇게 해서 간 곳이 정작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라면 어쩐다.
오늘날 변혁이론과 운동이 동력을 상실한 이유 중 하나가 더 이상 그런 세상(유토피아)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그걸 믿지 않아서 그렇다고들 하더라. 하지만 난 너무 비관적인 인간이라 그런지. 그런 천국이 별로 재미없어. 인간 세상에 천국이 실현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선 더 이상 변증법적 긴장이 작동할 수 없는 세상이란 뜻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네버랜드는 즐겁고 신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성장이 없는 곳이란다.
성장과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정작 그런 세상이 올까봐 두려워하며 이렇게 사는 걸지도 모르겠어.
Q. 답변 감사해요, 교수님.
하루하루 일터에서 그리고 출근 전 새벽에 여는 빵집 구석에서 공부하다가 멍해지면서 느끼는 것은 직업이 생긴 이들이 얼마나 생활이 정해진 채 흐르고, 그리하여 곧 의문이 없는 삶으로 빠져들기 쉬운가에요. <매트릭스>에서처럼 어느 날 찾아오는 신호도 없는 공간, 어쩌면 누군가들에게 특히 개인에게 자본주의는 그런 잠깐의 천국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탈바꿈을 하잖아요, 조직이 대항할 수 없게, 이를 테면 노동형태도 다양하게 바뀌어가면서, 기존의 조직이 넓어질 필요를 계속 만들게 되면서 동시에 이전의 규합이나 비판의 힘이 줄어들기도 하고요.
서로 연결시킨다는 것이, 가령 평등과 같은 가치가 구체적일 수 없게, 손에 잡힐 수 없게만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지옥이라는 말씀에서 얼마나 한국이 컨텐츠(지옥)강국인가 라는 생각도 드네요. 되려 지금 세대는 모두 지옥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고 있는 것도 역설같습니다. 너무 재미있는 한국, 밖에만 있어도 그렇게 느껴지네요. 또한 예시되는 것은 지옥도 힘이라 더욱 빠져들 것 같아요. 차별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에 더욱 젊은 층은 정치적 동력으로 삼기도 하지만 요새는, 즐기는 것 같아요.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었는데 마음에 또 안 들면 어쩌죠? 계속 여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바꿀 의무가 없는 사람 같은 걸까요? 의무가 없는 사람이 바꾸어 놓은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떠날 사람이 뭘 해라고 하면 어쩌죠.
A. 노동해방이 해방노동이 되어버린 역설 같은 것이겠지. 네 글을 읽고 나서 오늘아침엔 ‘볼빨간사춘기’의 <초콜릿>이란 곡을 들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흘러간 시간의 길이가 기억 속에서 압축적으로 줄어든다는 의미다. 불과 1~2년 전쯤 본 영화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면 그 영화가 개봉한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갔더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하루하루는 얼마나 쉽게 흘러가는지, 24시간이 모두 의미로 충만했던 시간들이 있을까 싶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전혀 새롭지 않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점차 늘어난다는 의미다. 살아보니, 지내놓고 보니, 통장에 월급이 꽂혔다가 파도처럼 쓸려나가고 난 뒤 내게 남는 것은 결국 지난달과 똑같다.
‘자본주의’말고 다른 세계를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파시즘 직전의 세계를 살았던 사람들이 이상향으로 품었던 농촌공동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 파시즘 프로파간다 회화 작품들을 보노라면, 어릴 적 동네문방구에서 팔던 크리스마스 성탄 카드 삽화와 너무 똑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크리스마스가 주는 이상적인 가정과 마을과 사람들 말이다. 하얀 피부에 터질 것 같은 볼 빨간 산타클로스와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린이와 그 아이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모들, 따스하게 불타고 있는 벽난로와 그 난로 위의 장식 같은 것들, 파시즘 프로파간다 회화 속 사람들도 그렇거든, 오늘날 우리는 매일 같이 보다 세련된 프로파간다들을 만나며 살고 있지. 과거 내가 보낸 청소년기엔 그것이 모두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의 광고 속 인물들이 재현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엔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유튜브 속 사람들이 스스로 그렇게 자본주의의 광고를 제작하며 살아가고 있더라.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세상을 나는 ‘인민자본주의’의 시대라고 부른다. 현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학자들은 ‘천민(賤民)자본주의’라고 하는데, 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천만(千萬)자본주의’라고 부른다. 1950~60년대 시작된 주식시장 개방이 어느덧 개인들에게 깊이 침윤되어 오늘 서울 시내를 걸어 다니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주식하느냐고 물어보면 열중 팔구명은 틀림없이 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최대 성과는 노동자와 시민의 정체성을 자본가의 정체성과 결합시킨 것이다. 역사상 이보다 강력한 헤게모니를 찾아볼 수 있을까 싶다. 모두가 천국에 가길 희망하며 지옥 같은 세상을 버텨내던 시대가 사라진 뒤 사람들을 지옥 같은 이 세상에 붙잡아두기에 이 보다 강력한 통제장치가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이 우주에서 너나나나 그냥 흘러가는 여행자에 불과한 존재지. 나는 어느새 오늘을 살아가기 보다는 내일을 기약해야 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내 마음을 내 자식이 물려받을 수 있을까? 내가 꿈꾼 세상을 내 자식이 만들어줄 수 있을까?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한 사람으로서 도리어 자식에 대한 애틋함, 부성애 같은 그 마음이 매우 강력해야 할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생물학적인 자식만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분히 추상적인 관념이겠지만, 인간에게 마음이란 것이 생긴 이상, 그 마음을 물려받는 것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일 게다. 남는 건 사진뿐인 게 아니라 세상에 또 다른 생명을 보내는 일, 사람들이 고전(古典)이라 이름 붙은 것들을 놓아 주지 못하는 까닭이 있다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새롭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고전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부모의 일이겠지.
루이 아라공은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세대의 인간에겐 의무가 있지. 나는 한때의 지역감정이 그러했듯, 오늘의 세대론이나 성별갈라치기에도 일정하게 기득권세력의 음모란 생각을 품고 있다만, 그런 생각과 무관하게 각각의 세대는 만나고 헤어짐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이어주고 물려받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겠지. 너희 세대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우리도 그리 좋은 시절만 보낸 건 아니란다.
언젠가 떠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사람은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내가 늘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