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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N0.238. “God Save the Queen‘ soul.”
지난 방송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1952년, 스물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려 70년 214일간 재위한 여왕이었다. 영국 국왕으로는 역사상 최장수 기간 동안 군림한 왕이었고, 세계사를 통틀어도 루이 14세의 72년 110일에 뒤이어 두 번째다. 굳이 토를 달자면 루이 14세는 일찌감치 국왕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물론 여왕의 재위기간 70년 214일은 실감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이 대통령하던 시절 보위에 올라 대통령 윤석열 때 서거했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에서도 종종 여왕을(빅토리아 여왕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희화화시키는 장면들이 꽤 많이 나온다. 왕실은 자신들이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경우에 대부분 침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난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 영상에는 여왕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007(다니엘 크레이그)를 만난 여왕은 “굳 이브닝, 미스터 본드”라고 인사를 나눈 뒤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장면을 연출한 적이 있다. 이런 면모들은 우리가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확인한 것처럼 시대의 변화, 미디어의 변화 양상에 적응하기 위해 영국 왕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20세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21세기 영국의 군주로서 여왕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미디어를 대단히 잘,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다.
여왕은 한국 국민들에게도 익숙한 존재다. 비록 윤석열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영국 왕실에 의해 ‘국빈 초청’을 받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지난 2004년 故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빈 초청’을 받아서 영국 버킹엄궁을 방문했었다. 영국은 국빈 초청 횟수를 1년에 단 두 차례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국빈 자격 역시 ‘민주주의에 공헌한 사람’으로 인정되어야만 초대될 수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엘리자베스 여왕은 “내가 즉위할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으며 분단을 종식시키지 못한 끔찍한 전쟁에 참전하고 전몰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한다”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1999년 4월 여왕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과 여왕의 한국 방문의 이면에는 우리 정치사의 거인, 故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재직하면서 영국 왕실과도 교분이 있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내의 평가가 박한 것에 비해 김대중 대통령이 평생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은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인연이 겹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여왕을 초빙해 3박 4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것은 1883년 한영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영국 국가원수가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일이었다.
영국의 몰락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여왕이 제위에 오른 시점에서 영국은 과거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여왕은 ‘좋았던 시절’의 영국에 대한 국민의 상상력을 채워주는 존재이자 전후 대부분의 제국이 식민지에서 유입된 이주민 문제로 다원화, 다양한 갈등으로 분열하던 시점에서 국가통합의 상징이자 격동의 시기를 안정적으로 버텨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국가원수는 바티칸 교황청의 교황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여왕의 서거 이후 과거 어두웠던 시절의 대영제국과 식민지 문제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일단 이번 글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떠나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구의 여러 제국들이 있다. 영국을 제외하고라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 역시 식민제국을 통치했다. 이들 국가들 역시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과 흡사한 국제조직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프랑코포니, 스페인의 이베로아메리카정상회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제기구의 결속력과 규모는 영연방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영연방은 영국 이외에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등 2022년 기준으로 모두 56개 국가가 회원으로 가입(이중 15개 국가에서 영국 국왕이 수장)되어 있다. 영국 자체의 인구는 6,7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영연방 인구는 1억3천5백만 명에 이른다. 물론, 영연방의 수장을 반드시 국왕이 맡도록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감히 이 자리를 노리는 국가는 없다.
영국이 EU를 탈퇴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영연방과의 관계 강화에 있었다. 경제규모로 보았을 때, 미국의 경제규모는 20조 달러에 이르고, 그 뒤를 따르는 EU가 18조 달러인데, 영연방의 경제규모는 약 13조 달러로 세계 3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EU회원국으로서 EU규정을 따르는 동안,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에 대해 경제공동체로서 특혜를 주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 와중에 중국은 영연방 국가(주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그래서 “영국엔 여왕이 있지만, 중국엔 현금이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영국이 EU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중국은 영국을 대신해 새로운 국제 협력 파트너로 급부상했고, 2005년 이후 2021년까지 42개 영연방국가에 1천91조원을 투자했다.
영국이 EU를 탈퇴하고 영국 외무장관이 앞으로 영연방 국가들에게 해마다 13조원의 투자를 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그동안 영국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던 영연방 국가들에서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었던 어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왔다”고 보도한 것은 영연방에서 여왕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류의 정치사에서 공화정제의 역사도 이제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사실 유사 이래 인류에게 보편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정이이었다. 물론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군주정보다 공화정이 앞선 정치체제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을 표방하더라도 실질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들은 많이 있다. 게다가 『타임머신』, 『투명인간』 같은 작품을 썼던 H.G.웰스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을 가리켜 ‘왕관을 쓴 공화국(crowned republic)’이라고 불렀다. 명목상의 군주는 존재하지만, 결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힘 역시 국민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영국 여왕이 생전에 70%대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정치학자들은 영국 왕실이 누리는 높은 인기의 원인을 이른바 ‘복지군주제’ 모델에서 찾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다원화·다문화·다종교화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 역시 과거의 계급 갈등을 뛰어넘어 다양한 정체성만큼 다양해졌다. 사회가 요동치는 만큼 계급·계층·젠더 등 정당은 다양한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선거로 교체되는 정부나, 지지계층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당은 인기에 영합하여 정책이 바뀌거나 특정한 정치적 지향에 따라 소외시키는 국민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면의 작동 방식이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모든 국민을 대변한다는 형태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입헌군주정은 왕실이 정부를 대신하여 정부와 정책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 인기에 영합하여 조변석개하지 않는 대신 소외된 계층을 비롯한 온 국민을 살핀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실은 전후 노동당 정부를 도와 영국의 복지체계를 강화하고, 복구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지금까지 영국 왕실이 직접적으로 후원하는 단체가 모두 3천여 개 정도에 이르는데, 이런 지원은 정부재정으로 하지 않고, 왕실의 모금과 사재 출연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왕실은 이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데, 영국 왕실이 지출하는 복지 예산 규모는 연간 1억 파운드에 달한다. 이 금액은 유럽의 어떤 비영리기구(NPO)와 비교하더라도 단연 으뜸이다.
다만, 여왕이 사망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각을 세웠던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이면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다이애나 비가 과거의 왕실이라면 특별히 챙기지 않았을 분야,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 정체성 정치에 의해 편가르기가 일어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온 것과 달리 이런 분야에도 개입하기 시작한 것(대중의 지지 속에서) 역시 갈등의 요소였다. 다시 말해 영국 왕실의 존폐가 가장 우선일 수밖에 없는 여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세자비의 높은 인기는 그에 비례해 자칫하면 추락할 수 있는 위험도 함께 높아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왕세자비의 인기는 항상 찰스 왕세자(현재의 찰스 3세)보다 더 높았다. 여왕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학교 행사에 참석해 직접 달리기를 하고, 지뢰제거현장을 몸소 시찰하는 며느리 다이애나비의 모습이 어떤 의미에선 자신과 닮은꼴이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들 찰스 왕세자를 참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세자비에 의해 왕실의 치부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더이상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래의 국왕보다 왕비의 인기가 더 높다는 것 말이다. 항상 정무 감각을 잃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던 여왕이 유독 다이애나 비에 대해선 대중의 바람과 달리 냉정하게 대했던 것은, 이와 같이 용납할 수 없었던 개인적인 감정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왕 자신도 당시 왕실 기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여성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실 여성 최초로 군복무를 했고, 아버지 조지6세가 반대했던 필립 공과의 결혼도 자신이 적극 추진해 결국 관철시켰다. 그리스의 몰락한 왕실 출신의 필립 공의 누이들은 모두 친나치 인사들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추축국과 전쟁 중이었던 영국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여왕 자신도 필립공의 사생활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여러 차례였지만,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영국이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할 만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처럼 파격적인 면모를 보인 여왕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여왕은 대단히 보수적인 인물이어서 TV시대가 개막된 1950년대 여왕 즉위식을 TV로 생중계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한 시대의 역사를 풍미했던 여왕이 떠났다. 영국의 동전, 지폐를 비롯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날 테고, 또 어떤 것들은 여전히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God Save the Queen‘ soul.”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