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퍼스 단상 - 양재숙 http://my.dreamwiz.com/poemnote
중간에 두 번 이사를 하긴 했지만, 거기가 거기일 뿐 8살 때부터 지금까지 복현오거리 부근을 벗어나 살지 않았다. 8살, 그때부터 15살 때까지, 드물지 않게 경대북문으로부터 퍼져나오는 맵고 따가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중학생 때 내가 다녔던 학원은 경대북문 맞은편에 있었고, 학원 셔틀버스를 통해 집과 학원을 오갔으므로, 데모가 일어나면 그곳의 차량이 통제되어 셔틀버스는 멀리 다른 길로 돌아돌아서 학원에 도착하곤 했다. 데모가 시작될 것을 알리는 신호는 사물놀이패가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깃발과 어려운 구호를 적어놓은 현수막과 젊은이들의 물결과 전경들의 커다란 방패(?).
어른들은 그들에 대해 [부모가 뼈빠지게 번 돈으로 대학 들어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거리만 한다]라든가 [세상 물정도 모르는 것들이...] 등의 말을 하곤 했다.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학교 선생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선생님은 수업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학에 가면 다음과 같은 선배들을 조심해라. 술자리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다가 상대방이 거기에 동조하면 '우리가 바꿔보자'라며 미끼를 던지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한편 그들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문학선생님이 수업중 우리들에게 한겨레신문 1면을 보여주며, [이제까지 한총련이 잘 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엔 방법이 좀 지나쳤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때 신문 1면에 실렸던 사건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위 도중 학생들이 지나가던 애꿎은 사람을 경찰 끄나풀로 오인하고 구타했던 사건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엔 더 이상 매운 냄새를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운좋게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에 입학했을 땐, 예전처럼 시위가 지나치게 잦지도 않았고, 하더라도 아무도 다치는 일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옛날 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어떤 술자리에서도 '우리가 바꿔보자'라고 유혹(?)하는 선배는 없었다. 전쟁이 난 곳은 오히려 도서관이었다. 98년에 IMF가 터졌고, 내게 대학생이라는 라벨이 붙은 것이 그로부터 불과 몇 개월 후였으니, 발등에 불 떨어진 졸업생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까지 도서관에 박혀 취직준비를 하는 게 상식이었다. 뭔가 거창한 구호 아래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연대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생존을 위해 각개전투에 나선 것이다.
나는 그러한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흔히 말하는 '새내기의 환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학문탐구가 아닌 취업준비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취업문제에 열중한 나머지 사회적 연대를 도외시하는 것도, 자기만 챙기는 개인주의 성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80년대의 뜨거웠던 바람이 다시 불어왔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때때로 그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대체로 대자보와 현수막과 집회 연설의 메시지에 공감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총련에 가담해 직접적으로 활동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저 마음속으로 그들을 '소수의 지사(志士)'로 미화하고 환상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내 습작시는 어설픈 비분강개로 가득찬 것들이 많았다.
몇 년 지난
지금은
선배들도 동기들도 후배들도 그러지
운동? 그런 거 왜 해?
운동하는 무리들을 본다
그 몇년 전과 다른 풍경 -
최루탄 대신 플래카드를 들고
꽹과리 대신 구호를
외친다, 외친다, 외친다
그러나 사람들,
사람들이 그러지
자기 발 밑이나 보라고
- '캠퍼스 단상 15' 중에서
대다수 선배나 동기들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그네들은 감옥에 다녀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라든가 [국가보안법도 법이다. 법을 저촉하면 처벌받는 게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위법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등의 말들을 어렵잖게 들을 수 있었다.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어느 때인가부터 내 눈에 씌어진 콩깍지가 벗겨지고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천편일률적인 활동방식이었다. 대자보와 현수막과 전단지와 연설과 가두시위 외에 자신들의 메시지를 알리는 참신한 방식은 없었던 것일까?
또 하나 문제는 그 강렬한 계몽성, 그러니까 학생들을 자신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함께 교감하기보다는, '통일'과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폐지'의 중요성을 설득시켜야 할 '어린 백성'으로 보는 것이다. 한총련이니 학생회니 하는 것들은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고 대변하기보다는, '하나의' 생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다수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단체에 불과해 보였다. 하나의 생각 아래 대중을 모으는 것은 80년대에나 통했던 낡은 수법이지 다원화, 다양성의 시대인 21세기에는 부적합한 방식이다. 그들은 곧잘 굵직굵직한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사소할지 모르나 피부에 와닿는 절실한 문제들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어쩌면 소극적이란 말보다는 누구 말마따나 '무관심'이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모든 공동체행사 뒤의 술자리에서 오가는 한탄
<한때 우리 과가>로 시작해 <지금 이 꼴이 뭐냐>로 끝나는
대안 없는 한탄이 지겨워 등을 돌렸다
대학, 과, 공동체, 선후배 따위 단어도 지겨웠다
대자보는 여전히 정치적이었으나
- '나 대학생 맞아?' 중에서
2학년과 3학년 사이에 끼인 겨울방학 중, LT(leadership training)이라는 것을 갔다. 각 학과의 집행부 임원들이 모여서 효과적인 과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이 행사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들이 이해와 친목도모보다 계몽운동(?)에 종종 초점이 맞추어지듯이, LT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청을 받은 어느 지역인사가 강연중에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었다. 이는 미국도 알고 있다]라고 주장했을 땐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증거자료를 보이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더구나 김정일의 외교방식을 칭찬하며 우리도 그와 같은 배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린아이 수준의 사고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외교방식은 오히려 북한을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며 그 고통은 모두 애꿎은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육이오는 북침이라는 강연 덕에
운동권에 대한 환상도 버렸다
- '그 겨울의 추억' 중에서
이제 나는 그들이 [부질없이 마신 술을 모두 토해내]기를 바란다. [잔디밭에 널린, 엎드린, 찌부러진 꽁초며 병마개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보]기를 바란다. [책보다 사람을 더 자주 보]기를 바란다. [자유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게 프로포즈하는 숱한 자유의 정체를 다시 한번 캐내 보]기를 바란다. 통일을, 주한미군철수를, 국가보안법폐지를 외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계속 외치되, 학생 개인개인에게 절실한 대학 내 여러 문제들도 좀더 비중있게 외쳐주길 바란다. 이념보다는 사람에서 길을 찾기를 바란다. 한편,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는, 입으로만 떠드는 지성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캠퍼스 단상 2. 대학교육
공부
단상 1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새내기때의 나는 도서관이 취업준비의 전투장(?)으로 변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했다. [상아탑의 심장인 도서관에서 학문탐구의 즐거움을 누리는 청년] 같은 발상이 - 어른들이 주입시킨 낡은 '대학생관(觀)'이 - 머리속에 단단히 박혀있었을 때였다. 그러나, 뭐, IMF 전엔 대학 도서관이 취업준비가 아니라 학문탐구의 장소였었나? 자신의 희망과 적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일단 커트라인에 맞추어놓고 보는 게 우리 입시의 취약점 아니었던가?
뭐, 학문탐구라 불릴 정도로 깊은 수준의 공부는 정말 학문탐구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요즘 교수들이 취업난이라는 현실을 고려해 학점을 후히 주는 경향이라 해도, 비전공자가 물어보면 당황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기 전공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식견, 안목도 키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빌려보는 책의 대부분이 판타지, 무협물 등 한번 읽고 나면 끝인 오락물이라는 건 정말 생각해 볼 문제다.
강의와 시험
학생-교수의 관계에서 교수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교수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다름아닌 학문적 깊이다. 이러한 학문의 깊이는 강의에서 드러난다. 깊이 잘 알고 있으면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교수와 시간강사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른 교수라고 해도, 지각을 일삼거나 툭하면 휴강하고서 보강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일부 교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 지각을 당연시하고 휴강을 마냥 좋아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강의시간은 교수-학생간의 약속이자 예의다. 초, 중,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서는 많은 자율이 주어지지만, 그건 제맘대로 하라는 건 아니잖은가. 그리고 이건 등록금이 아까운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과처럼 사람이 적은 과는, 시험칠 때 컨닝이란 게 아예 불가능하다. 글쎄, 좁은 장소에서 한눈에 다 파악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컨닝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컨닝하지 않아도 학점을 잘 받는 방법이 있다. 족보다. 어제 시험을 치고 돌아온 동생이 '다행이다. 족보 그대로 나왔더라'라며 기뻐했다. 족보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편리한 길을 바라는 사람 마음과(당연하지, 지름길이 있는데 굳이 힘든 길로 가겠는가?), 해마다 똑같거나 비슷한 문제를 내는 일부 교수들이다. 족보는 벼락치기 공부를 낳고, 벼락치기 공부는 시험 직후의 기억상실증을 유발한다.
평가기준(즉 학점을 나누는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이는 단지 시험이 서술형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수가 절대적으로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논리정연한 글이라도 평소 그 교수가 내세우던 입장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세우는 답안은 가차없이 날려버린다던가, 어떤 강의는 교수가 워낙 인심이 후해서 학생들이 서로 들으려 하고 어떤 강의는 교수가 짠돌이라서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기피하는 현상 말이다. 시험 후에, 어떤 기준에 의해 학점을 매기는가를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비교사 교육
다른 대학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교수 대부분이 학교현장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예비교사를 가르치는 교수들부터가 이론과 실제(현장)의 괴리를 보이고 있으니 예비교사들 역시 막상 실습에 들어가면 이론은 이론대로 놀고 실제는 실제대로 노는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이론만 아는 교수와 이론과 실제를 함께 아는 교수가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제부터는 현장경험이 없는 교수는 뽑지 않는다 하니 다행한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실습기간이 짧다는 것. 외국의 경우 지식교육은 1, 2학년때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3, 4학년엔 몇 개월동안 실습을 한다. 우리는 5주간, 겨우 한달 남짓한 시간. 교대의 8주보다도 짧다. 재정적 여건상, 그리고 미숙한 실습생(교생이라고들 한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기간이 길수록 전체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진다는 믿음 때문에 실습기간을 늘리는 데 현실적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국영수처럼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의 경우 1달이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영수 외 과목은 어떨까? 짧은 시간 내에 현장으로부터 많은 것을 습득해야 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업의 기회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커다란 부담감을 안고 수업에 임해야 한다. 그러다가 겨우 뭔가 감이 잡히기 시작할 때면, 이미 실습은 막바지에 달해 있다.
누군가는, [사립대들은 임용에 많은 중점을 두고 있는데 우리는 국립대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교수들이 여전히 학문중심 강의를 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강의의 목적이 너무 임용으로만 치우치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상한' 체 하는 것도(그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한 예를 들면, 임용에 대비한답시고 시험문제를 완전히 그것과 같은 양식으로 만드는 건 무리지만(그리고 그런 일에 관해서는 대학보다는 학원이 앞서 있다), 채점할 때 문제에서 요구하는 답이 아니라면 그 문항의 점수를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쓰는 훈련'은 이루어질 수 있다.
캠퍼스 단상 3. 선배 후배 남자 여자
선배와 후배
사람들은 다 자기 입장에 유리한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약자가 어느순간 강자가 되면 약자였을 때의 입장을 잊고, 자신이 당해왔던 것들을 또다른 약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게 된다. 반항적으로 교사의 권위에 대항하던 학생이,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후배 관계는 특히 미묘하다. 선배에 대해 [자기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군대에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라는 식으로 불평하던 후배가 선배, 선배 소리를 듣게 될 때쯤이면 후배들에 대해 [요즘 것들은 예의도 몰라. 선배가 지나가면 인사를 해야지]라는 식으로, 자신이 예전에 선배들에 대해 '권위주의적이다'라고 비판했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선배가 후배에게 '과'와 '하나되기'를 강조하는 것은 80년대부터 내려온 그 무언가를, 선배가 후배를 굴리는(?) 것은 군대 문화를, 선배가 같은 학교 같은 고향의 후배를 아끼고 밀어주는 것은 학벌, 지역 연고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이런 것들은 많이 희석되었다. N세대니 X세대니 하는 것들을 거슬러올라 이미 신세대 담론이 유행할 때부터 개인주의는 확산되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90년대부터 대두된 젊은층의 개인주의 경향은 80년대의 영원한 종식을 의미함과 동시에,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진입을 예고하는 여러 현상 중 일부였다. 지금의 선후배 관계는 수직보다는 수평에 가까우며, 서로에게 강요하는 것도 적고, 체면이나 명분보다는 실리에 의해 인간관계가 짜여지는 경향을 보인다.
선배가 후배를 굴리는 일은 OT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으며, 술 문화도 강요가 아닌 주량껏 알아서 마시는 분위기가 정착되었다. 후배는 선배에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당당하게 따지고, 선배도 그것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권위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힘과 권위만 내세울 수는 없게 되었다. 선배는 그저 후배에게 퍼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후배가 선배를 존경한다면, 그것은 옛날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들끼리는 그다지 민주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모순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남자와 여자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남자 대학생', '여자 대학생'의 총칭이다.
대학 내에서, 머릿수대로라면 남자와 여자는 거의, 평등하다. 그러나 작고 큰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자는 배제된다. 중요한 이야기들은 늦은밤 술자리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오간다. 학과의 1년 운영을 도맡는 것은 2, 3학년들이다. 여자들이 그 학년에 해당할 무렵엔 남자 동기들은 거의가 군복무 중이므로, 과 일을 꾸려나가는 멤버들은 자연스레 여자가 더 많게 된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이다. 실제로 분위기를 주도하고, 압력을 집어넣는 것은 남자들 중에서도 고참 선배격인 복학생들이다.
뭐, 요즘 너나할것 없이 취업난에 시달리는데 복학생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그들은 사회로부터의 격리(?)기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사회와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많은 힘이 든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한 과의 분위기를 주도하게 될까. 직장에서 사회를 겪어본 사람들에게 그들은 풋내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재산인 군복무라는 경험을 후배들은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복학생들이 후배들에게 툭툭 내던지는 충고들은 자신들이 '후배'로 불려졌던 때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던지는 것들인데, 이것이 후배들의 시각에서는 꽤 대단한 통찰력으로 생각되어진다.
남학생들의 세 가지 코드, 스포츠, 술, 군대체험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정보망을, 정신적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다. 강의가 끝난 후 자기들끼리 농구나 축구, 하다못해 과방에 임시로 탁구대를 만들어놓고 탁구라고 하고(그것도 꼭 그냥은 안 하고, 술내기나 밥내기를 한다) 운동 후 피로를 풀 겸 술을 마시고,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꼭 들어간다. 그러다가 늦어지면 선배나 동기의 자취방에서 외박을 한다. 아무리 남녀평등 어쩌구 해도, 여자들은 그렇게 하기 힘들다. 밤길은 여자들에게 위험천만이지만, 밤길이 무섭다 해서 하룻밤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면 부모의 질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엄한 부모라면 외출금지령까지 내릴 것이다. 여자에 비해 남자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에서 훨씬 자유롭다.
여자들은 학점, 연애 등 좀더 개인적인 문제에 신경을 쓴다. 남자들의 패거리주의(일부 여자들이 남자들을 비난할 때 쓰는 말)나 여자들의 단세포성향(일부 남자들이 여자들을 비난할 때 쓰는 말)은 남성/여성 고유의 성향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환경을 통해 학습된 것이고, 케케묵은 문화적 규범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한 예로,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 여자들은 정치나 사회적 이슈를 더 많이 이야기한다. 우리 문화 규범은 여전히, 남자들이 뭉쳐서 큰 목소리를 내는 데는 관용을 보이지만, 여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때때로 군대 다녀온 남자들이 '여자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해'라고 마초같은 소리를 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군복무는 국민의 명예로운 의무이자 자랑거리로 여겨진다. 그런데,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일은 어떤가? 국가 생산력 증진에 공헌하는 일로 취급되는가, 아니면 직장에서 해고시킬 구실이 되는가?
똑같은 일을 해도 한쪽은 괜찮고(혹은 옳고) 한쪽은 그르다는 것이 바로 남녀차별이다. 위의 외박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흡연 여성에 대해 페미니스트니 되먹지 않은 여자라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남자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지]라든가 [여자들은 어떤어떤 것을 좋아해]처럼,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는 수많은 통념. 그 통념을 조장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일부(어쩌면 대다수) 여성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중요한 이야기들은 늦은밤 술자리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오간다. 분위기는 복학생이 주도한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가는 말의 대부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리고, 실천으로 옮겨지는 이야기보다는 다음 술자리 또 다음 술자리에서 반복되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나는 예전에, 술자리 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큰 목소리로 의견을 펼치는 여자 선배나 동기가 참 특별하게 보였다. 나 또한 통념에 사로잡혀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여자 선배나 동기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을까?
* 이 글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망명자인 양재숙님의 홈피인 <포엠노트>에 들렀다가 재숙님이 대학 4년 생활을 마감하면서 올리신 글을 읽고 양해를 구해 <유리병편지>로 보내는 것입니다. 얼마전 어떤 망명자 분께서 제게 한총련에 대한 의견을 물어오신 일이 있었는데, 저도 어느새 대학을 졸업한지 10년 세월이 흘러가는 중입니다. 그간 학생운동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탓도 있고, 지금의 흐름을 감 잡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그 대답은 뒤로 미뤄두고 말았습니다. 저처럼 이미 사회에 진입하신 분들은 과거를 한 번 떠올려 그때와 오늘의 현실을 가늠해보실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길 바라고,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분들은 선배의 충고라 생각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 분들은 역시 여러분의 미래일 수 있으므로 꼼꼼하게 읽어주세요. 뒷부분이 궁금하신 분들은 재숙님의 홈피를 방문하셔서 읽어주셔도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