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사건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싱겁기 그지없는 명언도 있지만, 생물이 진화됨에 따라 무성생식에서 유성생식으로 암수 쌍을 이루어 사랑을 나눈 역사 속에 인류 역시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당완과 육유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에게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지난 1999년 신중국 건국 50주년에 즈음해서 중국의 소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소흥은 중국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기로 유명한 곳이므로 당연히 수없이 많은 명승이 있다. 그곳엔 루쉰, 저우언라이, 왕희지의 난정, 그리고 소흥주가 있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중 하나는 바로 심원(沈園)이었다. 심씨의 화원이란 말을 줄여 그냥 심원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가서 보았을 때는 중국의 다른 정원들처럼 기암괴석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남원의 광한루 비슷하게 아담하고 고졸한 맛이 있는 그냥 그런 정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평범한 대중가요도 사랑의 추억에 사로잡히면 세상 더할 나위없는 명곡이 되듯, 이곳 심원은 그 자체의 고졸한 풍취보다는 남송 시대의 시인 육유(陸遊, 1125-1200)와 그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여인, 당완(塘婉)의 고사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육유는 금나라에 대한 철저한 저항을 부르짖은 우국충정의 시인으로, 만여 수의 시를 지은 시인으로 역사에 남겨져 있지만 동시에 한 때 아내였던 당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시로 지어 남긴 탓에 더욱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다.
육유와 당완은 어렸을 적부터 함께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당완은 육유의 외사촌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서로 시를 짓고 나누며 지낸 사이로 정이 들어 육유의 나이 스무살에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금슬 좋은 부부로 서로를 매우 아끼며 사랑했다. 그러나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 <애너벨 리>처럼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돈독한 탓이었을까. 육유의 어머니는 며느리인 당완을 매우 미워했고, 어떻게 해서든 이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어 했다. 육유는 어머니를 설득해 당완을 받아들이도록 간구하였으나 모친의 고집은 너무나 완고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육유는 형식상 당완과 이혼하였지만 그녀를 멀리 보낼 수 없어 이웃마을로 피신시키고 어머니 몰래 당완을 만나고 오고는 했다. 그러나 이들의 불운한 애정행각은 멀지 않아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노발대발한 육유의 어머니는 당완을 겁박하여 그녀를 멀리 쫓아 버리고, 왕씨 성을 가진 여인을 새로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당완 역시 조사정(趙士程)을 만나 새로 개가를 하고 만다.
육유는 어렸을 때 송과 금 사이의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소년 시절부터 금나라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담대한 포부를 품었다. 1163년에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북벌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곧 면직되었다. 1170년에는 사천과 섬서성에 가서 항금(抗金)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낙향한 육유는 당완과 헤어진 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이곳 심원에서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때마침 당완도 남편 조사정과 함께 심원으로 유람을 와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당완을 발견한 육유는 당완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었지만 남편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당완에게 말을 걸 수도, 아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때 자신의 몸과 같고, 마음의 일부였던 사람을 서로 마주보며 모른 척하고 지나쳐야 하는 마음은 당완도 육유 못지않았다.
옛정에 가슴이 미어진 육유는 통곡하는 심정으로 간신히 시 한 수를 지어 당완에게 몰래 전했다 한다. 그것이 바로 <釵頭鳳(차두봉, 비녀머리의 봉황)>이었다.
그대는 부드러운 섬섬옥수로(紅酉禾手)
나에게 황주를 부어주었지(黃呻酒)
성안에 넘친 봄빛 실버들로 늘어질 때(滿城春色宮墻柳)
동풍이 사나워 인연이 깨졌으니(東風惡 歡情薄)
그리움과 한에 사무친 가슴(一懷秋緖)
외로운 나날로 몇 해를 보냈던고(幾年離索)
아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여(錯 錯 錯)
봄은 예나 다름이 없건만(春如舊)
사람은 보람 없이 여위어만 가니(人空瘦)
연지 묻은 손수건 눈물에 젖는구나(痕紅 鮫靑透)
복숭아꽃 스러져 화원마저 쓸쓸하니(桃花落 閑池閣)
사랑의 맹세 변함없건만(山盟雖在)
정을 담은 편지 그 누가 전해주랴(錦書難託)
아아, 안돼, 안돼 어쩔 수 없는 내 신세야(莫 莫 莫)
과거엔 서로 지극히 사랑한 가시버시였으나 이제는 각자 새로운 인연을 맺어 보아도 보았다, 마음이 있어도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 그 비통한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이런 마음을 달랠 길 없던 당완은 용기를 내어 남편 조사정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여 동의를 얻고, 사람을 보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송별주를 나누어 마시고 헤어지며 <차두봉>에 대한 답시를 남겼으니 이것이 <차두봉에 부쳐>라는 시였다.
<차두봉에 부쳐>
세상 물정 박정하고(世情薄)
세상 인심 모질군요(人情惡)
비 뿌리는 황혼에 꽃이 쉬이 떨어지듯(雨送黃昏花易落)
새벽바람 불어와도(曉風干)
내 마음 젖고 싶었으나(痕殘 欲箋心事)
난간에 기대어 서서 혼잣말 할 뿐이네(獨語斜欄)
아아, 어렵고도 어려워라!(難 難 難)
사람은 각각이 되어 버렸고(人成各)
지금은 어제가 아니네(今非昨)
병든 마음 그네 끈처럼 길기만 하구나(病魂長似秋千索)
뿔피리 소리 차갑고 야밤의 빗장 비스듬히 걸려 있는데(角聲寒 夜岸珊)
사람들이 물어볼까 두려워(酷人尋問)
눈물 삼키고 즐거운 척하였네(咽裝歡)
아아, 모두가 거짓이로다!(瞞 瞞 瞞)
시가 이토록 애달프게 느껴지는 것은 천년이 족히 지났음에도 그 마음이 오늘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리라. 당완은 이렇게 육유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다시 남편에게 돌아갔으나 이 날 이후로 시름시름 앓아눕기 시작하더니 결국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실 송대 이전의 중국 사회에서도 여인들이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송대에 이르러 유교가 사회의 내적인 규율로 받아들여지면서 여인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육유가 당완을 사랑했음에도 모친의 강요에 못이겨 결국 헤어진 것도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굴한 결과였을 것이다. 당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육유는 오래 살아 96세까지 장수하였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오래 살았던 육유를 탓할 일은 아니나, 옛사랑과의 예기치 못한 재회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당완을 생각하면 육유가 오래 산 것이 다소 원망스럽기까지 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원래 남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좀더 잔인해지지 않는가.
육유 역시 그후로도 오랫동안 당완을 잊지 못했다고 하는데, 만년에 이르러 다시 심원에 들러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다.
沈園(심원)
陸遊
夢斷香消四十年
沈園柳老不吹綿
此身行作稽山土
猶弔遺蹤一泫然
꿈이 깨지고 향기마저 사라진지 사십년
심원의 버드나무도 늙어 솜털 날리지 않네
이 몸은 가서 계산의 흙이 되리
아직도 남은 자취 잊지 못해 눈물만 흘리네
城上斜陽畵角哀
沈園非復舊池
傷心橋下春波綠
曾是驚鴻照影末
성 위로 해 기울고 피리소리 애달픈데
심씨의 정원은 결코 옛 연못과 누대가 아니네
슬픈 것은 다리 아래 푸른 봄물인데
일찍이 놀란 기러기가 그림자를 비추었네
가끔 자는 사람을 깨워 “날 얼마나 사랑해?“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라는 말에는 이미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 싶다는 불순한 욕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랑에 대해 저는 묘한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꼬집힘을 당하면서도 귀에 단 이야기 한 번 변변하게 못해주는군요. 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사랑과 정(情)에 더할 수 없는 정의를 내리지만 정의되는 순간 이미 사랑은 빛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제게 사랑은 병들거나 상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괴로우나 행복하거나 그저 오래도록 함께 해주는 것, 같이 세상을 견뎌주는 일 같습니다.
나 세상을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많이 아팠노라.
많이 버림받았노라.
사랑한 죄치고는 너무 가볍지 아니한가.
이제 곧 여인네들이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는 추석입니다. 제사니, 차례니 박정하게 걷어치우자는 말 같은 건 솔직히 못하겠습니다. 대신에 밥 먹기 전 함께 와서 앉을 수 있게 불러주는 일, 전 부칠 때 못하는 솜씨라도 거들어 주는 일, 아내보다 조금 더 빨리 밥 먹고 일어나서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나 도와줘야겠습니다. 다녀온 뒤에는 뭉친 근육 풀어주는 마사지나 해주고요.
그간 유리병편지가 많이 적조했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시고, 무사히 귀환하시길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