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에서 창조가 어려운 이유
전성원(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가끔 세상을 바꾼 한 권의 책에 대해 생각하거나 묻게 되는 일이 있다. 그에 적합한 책들은 부지기수이지만, 동서양 문명의 경로를 바꿔놓은 책으로 1299년 세상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빼놓을 수 없다. 서구에서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책 중 하나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출현(1444년)하기 전이었지만, 오늘날까지도 140여 개의 필사본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서구 사회에 동방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욕을 한껏 부추겼다. 1492년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대장정을 떠난 콜럼버스의 선장실에는 그가 평소 밑줄을 치고, 주석을 달아가며 열심히 읽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도 마르코 폴로나 콜럼버스 못지않은 위대한 여행가, 탐험가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8세기경 불법을 찾아 인도와 서역(西域)을 기행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귀중한 기록을 남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그러나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약탈적 지식인이었던 학자 폴 펠리오에 의해 둔황(敦煌)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독자, 다시 말해 이용자가 없었기에 『왕오천축국전』이란 위대한 서적은 오늘날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당대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책이었던 셈이다.
인쇄문화에서 우리가 내세우는 자랑거리 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금속활자이다. 우리는 서구의 구텐베르크 금속인쇄술이 발명되기 70여 년 전에 이미 금속활자를 이용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인쇄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 이전)』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인 『고려대장경(1236~1251년)』과 세계 최대의 단일왕조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과 세계 최대 역사 기록물인 『승정원일기(3,243책)』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인쇄술이 근대를 촉발시키는 인쇄혁명을 일으킨 것에 비하면 우리의 인쇄문화가 사회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기제가 되지는 못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인쇄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전파(傳播)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지식을 기록(記錄)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인쇄문화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념과 맞물리면서 격렬한 변화를 촉발시켰지만, 한때 세계 최초를 자랑했던 금속활자는 더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으며, 지식과 정보는 널리 퍼져 나가지 못하고, 오래된 서고에서 깊이 잠들어 버렸다.
한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IT 강국이란 평가를 받으며 여러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어떤 이는 이것이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속도를 중시하는 IT와 접목된 결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싸이월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보다 앞선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선구적 모델이었다. 한때 싸이월드는 국내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글로벌 버전을 추진했지만, 영어판과 한글판의 기술적인 호환조차 불가능했고, 결국 세계화에 실패해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이용하는 SNS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포털사이트는 누가 뭐래도 ‘네이버’지만, 한글이란 언어장벽 뒤에 숨어서 대한민국 네티즌들을 가두리 양식하는 데 성공했을 뿐 그 자체로는 ‘구글’처럼 세계적 모델이 될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한때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유튜브’보다 앞선 토종 UCC 기업들도 있었지만, IT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으로 말미암아 국내시장에서조차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국내 메신저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해오던 ‘카카오톡’마저 정부의 검열과 사생활 노출에 대한 대중의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여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창조란 콜럼버스의 달걀이 그러하듯 발상의 전환으로 기존 체제를 깨고 나오는 고통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사회도 그와 같은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고통의 정도는 금기에 대한 도전을 그 사회가 관용하고, 허용하는 범위에 따라 현격하게 감소할 수 있다. 창조라는 가치가 수많은 장벽에 갇혀, 지나치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앞으로도 대한민국에서 창조란 더욱더 희귀한 미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간 『에세이』, 2014년 12월호> |
광장을 꿈꾸는 바벨의 언어<『리얼리스트(REALIST)』, 통권11호, 삶창(삶이보이는창) 2014.12.12> 
바람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