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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구두 (2019-12-18 10:14:25, Hit : 301, Vote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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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철 - 밥 먹는 풍경

  
밥 먹는 풍경

- 안주철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 안주철, 『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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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불빛이 십원, 달은 손잡이가 떨어진 숟가락, 잘못 뱉은 침이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나와 엄마는 밥을 먹고 있다. 사람이 밥을 먹으면 꼭 똥을 싸게 되어 있는데, 자식은 모두 부모의 섹스로 태어난 것인데, 우리는 똥 싸지 않는 사람처럼, 한 번도 섹스하지 않은 사람처럼 시치미를 뗀다. 그나마 남들 앞에서도 보이는 일이 밥 먹는 일인데, 다른 사람이 밥 먹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입에 똥이 들어가는 것처럼, 똥을 듬뿍 떠서 입 안에 처넣는 것처럼 겸연쩍어진다. 연신 입 속으로 들락거리는 수저는 말 그대로 생식기(生殖器).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먹는 일이 자유롭지 않다. 나와 엄마가 마주 앉아 밥 먹는 일이 자꾸 방해 받는다. 밥 먹는 일이 부끄럽다.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밥이나 처먹어라! 밥줄이라도 끊기지 않고 살려면 존엄(尊嚴) 따위 잠시 내려놓고 수저를 높이 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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