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라스무스, 『격언집』, 김남우 옮김, 부북스, 2014
진영논리가 판치는 시대,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탈진실의 시대를 오늘날 현대만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지극한 오만이다. 서구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는 ‘교회개혁’의 시대야말로 극심한 진영논리의 시대, 내 편이 아닌 자는 죽여도 무방했던, 죽어야만 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출생 배경에 대해 평생 민감하게 여겼을 테지만, 이런 일이 그 자신에게만 생겨난 특별한 불행이라고 여긴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부친은 에라스무스를 성 레빈 문법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14살 무렵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의 후견인은 에라스무스를 수도원에 맡겼다. 문법학교와 수도원에서 라틴 고전학문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살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어 1492년엔 캉브레 주교 베르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주교의 후원에 힘입어 1495년부터 1499년까지 당시 유럽 최고의 대학이었던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베르겐 주교의 후원이 흔들리면서 그는 스스로 부유한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는데, 가정교사로 인연을 맺은 몽트조이 공 윌리엄 블룬트와의 인연으로 1499년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영국의 휴머니스트들은 파리대학에서 건너온 젊은 수도사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고 싶어 했다. 에라스무스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 윌리엄 그로신, 존 콜레트를 비롯해 미래의 헨리 8세와 만났다. 이들과의 만남, 특히 토머스 모어와의 만남은 그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어 에라스무스는 라틴문헌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 문헌들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무렵 에라스무스가 고대 그리스 문헌에 대해 보였던 관심의 결과물이 『격언집(Adagia)』이다. 오늘날 입시나 교양을 위한 고전강독이나 다이제스트들이 유행하는 것처럼 당시의 인문주의자들 또는 그런 교양에 목마른 이들에게 라틴 고전이나 그리스어 고전문헌들은 필독서였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지만, 고대 그리스어 문헌들은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인용한 격언들을 모아 세상사에 대한 간단한 논평을 곁들인 『격언집』은 꽤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 특히 에라스무스의 논평은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그의 명성을 전 유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에라스무스가 『격언집』으로 명성을 얻은 뒤 펴낸 책이 유명한 『우신예찬(Moriae Encomium)』(1511)이다. 당대의 지식인과 지배집단 모두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이 책은 출간 직후 금서가 되었고, 때마침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못 박는 사건(1517.10.31.)이 발생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공개서한을 띄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박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교회개혁에 대해서는 루터를 지지했지만, 그 이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루터의 견해(은총, 자유의지, 예정설 등의 중요한 교리에서)를 지지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나는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라며 자신이 루터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루터와 교회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은 에라스무스에게 보다 명확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으며 루터의 편에 설 것을 종용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들의 기대에 반하는 편지를 띄웠다.
에라스무스는 기성교회에 매인 사람도 아니었지만,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기성교회에겐 루터에 대한 관용을 요구했고, 루터파에 대해서는 중용과 관용을 통한 교회개혁과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요구했기에 양측으로부터 모두 낙인찍혔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거세지던 1934년 무렵 유럽에서 에라스무스 평전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를 표현했다.
● 나는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이 그 편에 가담해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상인이 내게 대답했다. “에라스무스는 늘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죠(Erasmus est homo pro se).”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끝내 엇나갔고, 마침내 유럽은 종교전쟁의 불구덩이로 빠져들었다. 에라스무스는 마치 이런 시대가 올 것이란 사실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격언집』에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전쟁이 달갑다(Bellum dulce inexpertis)”라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농부가 밭을 갈면서도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스어로 된 복음서를 라틴어로 옮기고 주석을 단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복음)이 권력자(종교지도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이를 민중에게 돌려주고 싶어 했다. 에라스무스에게 지식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 해방의 문제였지만, 루터에게 지식은 종교의 문제이자 동시에 권력의 문제였다.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이시여!”였는데, 그의 영원한 벗이었던 토머스 모어의 목이 떨어진 것은 그보다 한 해 전이었던 1535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예전에 토머스 모어를 다룬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s)》(토머스 모어 경에 대해 다룬 로버트 볼트의 희곡 "A Man for All Seasons"를 바탕으로 한 1966년 영화)의 제목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가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을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사계절의 인물(Omnium horarum homo)’이란 “진지하면서 동시에 재미있는 사람이면서 다른 이들이 그와 가까이 어울려 지내길 바라는 사람”을 두고 옛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엔니우스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 말에 끌려 악을 행할 위인이 결코 아닌 사람.
사소한 악이라도 전혀 악하지 않으며 동시에
학식과 신의를 갖춘 유쾌한 능변의 인물.
자족하며 행복하고 영리하며 때에 맞는 걸
말할 줄 알며, 유익하고 말수가 적은 사내.
옛것을 지키며, 땅에 묻혀 종종 세월이
이룩한 것을, 신구의 풍속을 지키는 이를,
신과 인간의 많은 옛 법도에 밝은 이를,
말할 줄도 침묵할 줄도 아는 이를 지키는 사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