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겊 토끼의 눈물
마저리 윌리엄즈 지음, 윌리엄 니콜슨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4년 12월
1979년 12월, 서울 변두리 남한산성 바로 아래 마을엔 눈이 내렸습니다. 아직 건설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여기저기 공사 중인 집에는 할머니와 손녀, 손자 그리고 이민(移民)차 미국으로 떠났다가 몹쓸 병에 걸려 돌아온 아이들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겨울바람이 모질게 불어올 때마다 비닐로 막아둔 벽들이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때마침 성탄이라 외지에 나가있던 삼촌들도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좁은 방 안 아랫목에는 병든 아버지가 누워있고, 삼촌들과 할머니는 윗목에서 얼마 전 치른 할아버지의 장례와 곧 다가올 큰 형님이자 두 남매의 아버지가 맞이할 죽음에 대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해 겨울, 소년은 잠들기 전 머리맡에 양말 한 켤레를 걸어두었습니다. 아마도 이 밤이 가기 전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아니어도 삼촌들 중 한 명이, 아직 시집가기 전이었던 고모가 사탕 몇 개라도 양말에 넣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아직 먼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습니다. 소년은 갑자기 흔들어 깨우는 기척에 놀라 일어났습니다. 막내 삼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새벽에 한 고비를 넘기고, 시원한 약수 한 사발을 마시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므로 초등학교 3학년 어린 사내아이는 삼촌의 손에 이끌려 오토바이에 올라 탔습니다. 졸린 눈을 부비자 눈곱이 부스러져 떨어졌습니다. 소년은 삼촌과 함께 남한산성 산자락 아래 샘솟는 약수터로 향했습니다.
밤새 소복하게 내린 눈이 약수터 가는 길에 가득했습니다. 약수터 산길로 접어드는 데 삼촌의 오토바이가 눈밭에 빠져 버렸습니다. 오토바이 체인도 덩달아 빠지고, 삼촌은 소년에게 혼자서 캄캄한 산길을 넘어 약수터로 먼저 가라고 시켰습니다. 10살 짜리 소년은 혼자서 제 몸통만한 물통을 들고 산길을 걸었습니다. 천지사방이 컴컴했고, 소나무들이 잡아먹을 듯 가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달님도, 별님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요. 그렇게 홀로 산길을 달려 약수터에 도착했습니다. 살얼음이 낀 샘을 깨트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눈밭을 걸어오느라 운동화는 모두 젖었고, 양말 사이로 눈이 들어와 발이 시렸습니다. 바가지를 든 손은 저도 모르게 덜덜덜 떨렸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물들이 뺨으로 흘러내렸습니다.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은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물통을 질질 끌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소년은 절망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삶의 무게라고 생각할 만큼 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순간의 막막함마저 느끼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으니까요. 그 때 저 멀리 삼촌의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불빛이 보였습니다. 삼촌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소년에겐 지금까지도 등 뒤로 출렁이던 물통의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약수를 드셨고, 며칠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소년에게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씀은 지금도 수수께끼처럼 기억에 남습니다. “넌 개밥의 도토리다.” 그 날 이후로 소년에게 크리스마스는 해마다 빈 양말의 허전함과 대책 없는 막막함으로 먼저 기억되곤 합니다. 하잘 것 없는 개밥 속에 섞여든 한 알의 도토리가 세상이란 거대한 그릇에 담긴 소년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사랑’받지 못했다는 기억이, 소년에게 ‘사랑’을 더욱 중요한 무엇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그 말 앞에선 약해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소년은 어른이 된 지금도 사랑이 두렵습니다. 사랑에도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동화는 크리스마스 아침, 수많은 선물을 받은 다른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소년 앞에는 수많은 선물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소년은 잠시 벨벳 천으로 만들어진 헝겊 토끼 인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북하게 쌓여있는 선물꾸러미들에 넋이 빠져 헝겊 토끼의 존재는 잊혀져버렸지요.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속엔 진짜처럼, 아니 진짜보다 더 잘 만들어진 장난감 배도 있었고, 태엽장치로 움직이는 장난감, 정교한 기계 장치로 만들어져서 스스로 움직이는 장난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헝겊 토끼는 그저 천으로 만들어졌고, 뱃속은 톱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토끼 인형은 제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계장치가 달린 새 장난감들이 속속 들어와 쌓이고, 아이 방에서 뻐기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토끼 인형은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토끼 인형을 하찮게 여기고 말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장난감 중에서 토끼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은 나무로 된 몸에 털가죽을 붙여 만든 늙은 말뿐이었지요.
어느 날, 헝겊 토끼와 가죽 말 둘만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토끼가 말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자기만이 진짜라고 자랑하는데, 진짜라는 건 도대체 어떤 건가요? 몸에 태엽이 붙어 있는 것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 진짜라는 건 몸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이 아니야.”
가죽 말이 말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걸 말하는 거야. 만약 그 장난감을 갖고 있는 아이가 그 장난감을 그저 놀잇감으로만 여기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장난감은 진짜가 되는 거지.”
“진짜가 될 때 아프지는 않나요?”
토끼가 물었습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
가죽 말이 말했습니다. 이 늙은 말은 모든 일을 언제나 정직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진짜가 되면 아픈 것 따위에는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단다.”
“태엽을 감았을 때처럼 갑자기 확 변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조금씩 달라지는 건가요?”
토끼가 물었습니다.
“갑자기 확 변하지는 않아.”
말이 대답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거야. 아주 시간이 많이 걸리지. 그렇기 때문에 쉽게 부서지는 것이나 뾰족한 것,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어. 장난감이 진짜가 될 때쯤에는 대개 그 장난감은 그 때까지 너무나 많이 사랑받았기 때문에 몸의 털은 빠지고, 눈이 파이고, 몸의 마디마디가 느슨해져 아주 보기 싫은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걱정할 게 못된단다. 왜냐하면 일단 진짜가 되고나면 더 이상 겉보기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거든. 그런 걸 알지 못하는 것들은 보기 싫다고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본문 12-16쪽>
성인이 되어 읽었어도 여전히 감동으로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진짜가 된다는 마법이 어떤 느낌일까요? 진짜가 되려면 초라해지거나 눈이나 수염이 없어져야 한다는 건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 슬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참 수많은 말들을 합니다. 지난 한 해 저는 인간과 사랑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팽개쳐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라고 말했는데 지난 2008년 우리는 공포의 서막이 어떻게 열리는지 직접 경험했으니까요.
진짜가 된다는 것, 그것이 정말 사랑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헝겊토끼의 인형』을 다 읽고 나서도 반신반의(半信半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책의 결말이 꼭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생명을 지니지 못한 것이 생명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는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어야 하는 고행을 견딘 곰과 견디지 못한 호랑이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제페토 아저씨가 장작을 쪼개 만든 피노키오에 이르기 까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든, 단군신화든 세상의 모든 변신(變身)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과정은 고통의 순례 없이는 진짜가 되는 일, 변신은 성취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헝겊토끼는 자신이 누구를 본 따 만들어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 사실, 이 부분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세계관, 서구적인 신화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진 존재란 점을 상기해볼 때 말입니다. - 세상에 진짜 토끼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소년의 장난감 방에는 헝겊 토끼를 기죽일 만큼 화려한 장난감들, 진짜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들이 지천이었습니다. 헝겊 토끼는 '가죽 말'이라는 스승(mento)를 만나 진짜가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아픔이 뒤따른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은 ‘찰나의 마법’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세월의 마법’이란 것도 말이지요.
마저리 윌리엄즈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사랑 받는 이유는 이 그림책이 섣부른 해피엔딩 대신 성장(bildung)이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교훈은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만큼 배우기 어려운 교훈도 없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종교, 설화, 신화 그리고 오늘 밤 당신이 무릎 위에 앉혀놓고 아이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아마도 바로 그 것일 겁니다. 인생이란 강을 건너기 위해서 우리는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 한 가지를 전달하기 위해 숱한 이야기책을 사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같은 교훈에는 한 가지 딜레마(dilemma)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가르침을 전하려는 이유는 그 아이가 살아가면서 조금이라도 덜 고통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란 겁니다.
『헝겊 토끼의 눈물』을 다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서 마침내 진짜가 되었는데 결국 버림받는다면 진짜가 된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겁니다. 우습지요? ‘사랑’이란 말 앞에만 가면 우리는 철부지 어린 아이만도 못하게 됩니다.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심지어는 인생에 대해 말할 때도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이별’이 곧 ‘끝’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헝겊 토끼는 소년을 사랑했고, 소년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토끼는 진짜가 되었지요. 그러나 꼬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진짜가 된 토끼는 소년이 성장하면서 결국 버림받게 됩니다.
지난날들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어느 하루도 아름답지 않은 날들이 없었습니다. 꼬마가 꽃밭에 만들어 준 요정이 사는 집 같은 작은 굴, 토끼가 풀고사리 수풀에 웅크리고 있으면 개미가 자기 발을 넘어 달려가던 그 고요하던 저녁, 그리고 자신이 진짜 토끼가 되었던 멋진 날…….
또 토끼는 친절하고 지혜로운 늙은 가죽 말을 생각하며, 그 말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다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랑을 받아 털이 다 벗겨져 진짜 토끼가 돠었다 하더라도 끝내는 이렇게 내버려지고 만다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 진짜 눈물이 - 한 방울, 닳아빠져 보기 흉해진 작은 토끼의 코를 지나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본문 36-37>
마저리 윌리엄즈의 『헝겊 토끼의 눈물』은 1922년 처음 발표된 이래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꾸준하게 읽혀지는 이 분야의 고전 중 하나입니다. 이 동화의 원제는 “The Velveteen Rabbit(벨벳토끼)”인데, 국내에 번역되면서 원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 저는 토끼의 눈물에 주목하는 제목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후반부에서 다루겠습니다. - 국내에도 몇 종의 번역본이 있는데, ‘보물창고’에서 출간한 『사랑받는 날에는 진짜가 되는 거야』는 국내 작가의 현대적인 삽화가 들어있고, 웅진주니어판은 『토끼 인형의 눈물』은 일본의 유명한 일러스트 작가인 사카이 고마코의 아름다운 삽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룡소판과 북뱅크판은 원래의 삽화가인 윌리엄 니콜슨의 고전적인 삽화로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북뱅크(BB아이들)판을 가지고 있는데, 소설가이기도 한 김숙의 번역이 다소 딱딱하기는 하지만 원전에 비교적 충실하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많은 이들의 마저리 윌리엄즈의 이야기가 지닌 핵심을 ‘사랑을 통해 진짜가 된다’는 지점에 주목하지만 『헝겊 토끼의 눈물』이 주는 진정한 교훈은 그 누구도 고통 없이는 성장(bildung)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만약 헝겊 토끼가 소년과 이별하지 않았다면 헝겊 토끼는 가죽 말이 말했던 정도의 ‘진짜’에서 머물렀을 겁니다. 누군가의 사랑에 의해 진짜가 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주체적인 완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짜 눈물’이라는 아픔, 홀로 설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요. 자식을 아무리 사랑한다한들 자식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또 부모가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때가 되면 자식은 또 누군가의 남편이, 아내가 되기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지요. 서로 아무리 사랑하는 남녀라도 반드시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에도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설령, 우리 각자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개 밥그릇의 도토리에 불과할지라도 삶의 막막함과 쓸쓸함을 견디지 않고서야, 우리 스스로가 하나의 주체로 바로 서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진짜(어른)가 된다는 건, 눈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니까요. 어쨌든 동화는 헝겊토끼를 잊을지도 모를 동화 속의 소년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동화를 읽을 동화 밖의 소년, 소녀를 위해 쓰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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