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 프라하 출신의 크베타 파코브스카(Kveta Pacovska)는 전통적인 장르 개념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미술가)입니다. 책의 저자 소개에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래픽 디자인과 회화는 물론 개념미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작가이지요. 사실 현대미술의 복잡한 미로 속에서 개념미술(conceptual art)만큼 개념잡기 어려운 미술도 드물 겁니다. 하지만 개념미술의 그 '개념'이란 의외로 간단하여 미술과 문학(특히 ‘시’)의 결합을 상상해보면 될 겁니다.
물론 일반 독자들(특히 어린이들)에게 크베타 파코브스카는 개념미술가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다양한 색을 활용해 즐거움을 주는, 종이조각(paper sculpture)을 이용한 북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활동이 명성을 얻은 분야도 그것이었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로 국내에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며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으로는 마법그림책 시리즈 <모양놀이>, <색깔놀이> 등이 있습니다.
지난 1998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꽃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Es War Einmal Eine Blume)』는 파코브스카가 북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맡은 책입니다. 널리 알려진 파코브스카에 비해 작가 사이드(Said)에 대해서는 국내 자료는 물론 영어권 자료도 구하기 어렵더군요. 아마도 주로 유럽(특히 독일어권)에서 활동해온 탓인 듯 싶습니다.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이란 출신으로 종교적 억압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작가란 점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W. 사이드와 혼동하지 마시길).
북디자인과 일러스트로 널리 알려진 크베타 파코프스카의 작품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흥미를 끌만한 다양한 색채와 마치 아이들이 직접 그린 듯한 느낌의 일러스트들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자신도 직접 참여해보고 싶은 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아티스트이자 북디자이너(북디자이너가 아티스트 아닌가? 흐흐)의 책답게 표지에 네모난 사각 창이 달려있는 것부터 대번 눈길을 끕니다.
『꽃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의 주요 내용은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 정원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 자기만 색깔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색깔을 준다는 무지개 나비를 찾아 미지의 세계인 정원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색깔 없는 꽃’ 역시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많은 인연들을 만납니다. 맨 처음 만난 사람은 경찰관이었습니다. 경찰관은 ‘색깔 없는 꽃’을 수상하게 여기며 “어이, 꽃! 너는 왜 아무 빛깔도 없지?”, “빛깔을 지니지 않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며 ‘색깔 없는 꽃’을 엄하게 윽박지릅니다.
‘색깔 없는 꽃’은 자신의 빛깔을 찾으러 가는 중이며 색깔을 찾는 대로 돌아와서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많은 곳을 헤매고 다니던 ‘꽃’은 어느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 플라타너스를 만납니다. 플라타너스의 멋진 빛깔에 반한 ‘꽃’은 ‘그 빛깔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플라타너스는 ‘언제나 이 빛깔이었다’고 말합니다. 혹시 무지개나비를 본 적이 있냐고 묻자 플라타너스는 하도 많은 나비들이 있어서 무지개 나비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꽃’은 플라타너스의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해보려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머지 새빨간 풍선이랑 부딪칩니다. 길 한복판에서 몸을 잔뜩 부풀리고 있던 풍선을 만난 ‘꽃’은 ‘너의 빛깔은 어떻게 생긴 거니?’라고 묻습니다. 풍선은 어떤 아이가 와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주어서 생긴 거라고 말합니다. 지금껏 색은 무지개나비가 주는 것이라 생각했던 ‘꽃’은 풍선에게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풍선은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풍선마저 사라지자 ‘꽃’은 외로웠습니다.
그 때 어떤 할아버지가 ‘꽃’을 보았고, ‘꽃’은 너무나 힘들고 지친 나머지, 색깔을 찾아 나섰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피어난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을 보여줍니다. ‘꽃’은 할아버지의 마음속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무지개나비를 만나지 못해서 ‘꽃’은 색이 없었습니다. ‘꽃’은 우울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해바라기가 말을 건넸습니다.
“네 빛깔은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내 빛깔이라고?”
“그래, 넌 네 빛깔이 마음에 안 드니?”
꽃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해바라기가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 빛깔을 서로 바꿀래?”
꽃은 도리질을 하며 더듬더듬 대답했습니다.
“난 내 빛깔이 더 좋아!”
“이제 나도 너희들이랑 놀아도 되니?”
‘나만의 빛깔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꽃’은 자신만의 빛깔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뒷 표지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이란 작가 사이드는 일관되게 ‘나만의 빛깔 찾기’란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때 나만의 ‘빛깔’이란 무엇일까요? 이란 출신의 망명 작가란 선입견 없이 보더라도 우리는 나만의 빛깔이란 정체성 혹은 종교나 신념의 문제를 상징할 수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색깔 없는 꽃’은 파수꾼이 지키는 작은 정원에서 누군가에게 무지개나비를 통해 자신도 빛깔을 얻을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무지개나비는 유일신일 수도 있습니다. ‘색깔 없는 꽃’이 자신의 빛깔을 가지기 위한 여행은 일종의 구도 여행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행일 수 있는 것이죠. 『꽃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에서 말하는 빛깔이 반드시 종교적 신념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건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지난 반세기의 냉전 기간을 통해 모두가 단 하나의 빛깔을 지닐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정원 안에는 파수꾼이 지키며, 혹시 이상한 나비가 날아와 파수꾼이 좋아하는 색 이외의 다른 색깔을 전하지 않을까 감시하고, 밖에서는 경찰관이 빛깔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빛깔을 가지지 않은 자, 나와 다른 자에 대해 감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눈에 비쳐질 나의 빛깔에 대해 염려합니다. 나와 다른 자는 모두 적으로, 혹은 수상한 자로 간주하도록 하는 사회는 공포와 협박으로 통치하는 사회일 겁니다. 또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신의 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여 대신 이루도록 강요하기도 하지요.
‘색깔 없는 꽃’이 지닌 빛깔이 꼭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나’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이 책을 읽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부모되는 분들은 우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색깔 없는 꽃’은 작은 정원을 벗어나고, 파수꾼과 경찰관의 감시를 벗어나 플라타너스와 풍선을 만나면서 색을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무지개나비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비슷한 면도 많습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제 나름의 논리를 주장할 때가 많더군요. 어느 순간엔 아이들의 정말 어른들보다 세상의 본질에 더 깊이 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의 성찰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어린들은 천재이자 시인으로 태어났다가 세상에 조금씩 물들고 맞춰가면서 본래의 천재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경험폭이 좁기 때문에 종종 자신의 논리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사실 그런 것은 우리 어른들도 똑같이 반복하는 실수이지요. 내가 틀렸거나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남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또 자신만의 색을 갖게 되는 일은 자기 스스로의 내면을 살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무엇보다 ‘색깔 없는 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자신의 색을 있는 그대로 살피고, 그런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타인과도 자유롭고, 당당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자신의 믿음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은 젊은이들이 머나먼 이국땅에 들어갔다가 일부는 목숨을 잃고, 일부는 많은 고초 끝에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온 사건을 겪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의 종교와 신념이 중요한 것처럼 타인의 종교와 신념을 존중해주는 일 역시 이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끝으로 크베타 파코브스카의 『꽃 한 송이가 있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몇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저는 그녀가 매우 유명한 북디자이너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책의 내용적인 기대 이외에도 책의 편집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서체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더군요. 첫 번째는 관용과 자신만의 색깔 찾기를 이야기하는 책의 내용과 이미지에 비해 각지고 날선 느낌의 서체가 사용되어 부자연스러웠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주로 저연령층 어린이들이 많이 읽을 책이라는 점에서 서체가 전체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전해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나지 않은 둥근 느낌의 서체가 좋았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 제 아쉬움이 크베타 파코브스카로부터 비롯된 잘못일까 싶어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의 원서 이미지를 검색해보았습니다. 자료는 많지 않았지만 원서의 서체 디자인은 애초의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둥글둥글한 느낌을 잘 살리고 있더군요. 그에 비해 국내 판본이 원서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명한 북디자이너의 수상작품을 광고하기에 앞서 편집자나 아트디렉터의 세심함이 좀더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비교해보시라고 원서의 이미지를 올려봅니다. 우선 원서의 표지는 손으로 쓴 것 같은 글씨체로 사각의 창 전체를 활용해 아트북 느낌을 주는데 비해 국내판은 손느낌이긴 하지만 원서의 조형적인 느낌에 비해서는 기계적인 느낌을 주지요. 혹시 책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같은 페이지를 펼쳐 보시면 아시겠지만 밑의 펼친 페이지에서 "Konnen"의 밑에 쳐진 줄이 국내판에선 본문과 따로 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이외에도 비록 한글 서체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또렷하고 둥근 느낌의 서체들 역시 있는데, 아마도 아래아한글에선 '크리스탈체'라 불리는 듯한 느낌의 서체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날선 느낌의 서체가 책의 이미지를 충분히 살려주지 못합니다.
국내 어린이 책 출판사 편집자분들이 고생하시는 건 알지만,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책의 내용 못지 않게 북디자인과 서체 역시 작품의 일부라는 점을 항상 함께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별넷 이상 못 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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