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 소박했던 나의 소원은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 따위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보는 일이었다. 신해철에게 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지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 산처럼 웅크리고 있는 너른 등짝이었다.
당신에 대한 나의 기억은 대체로 앞서의 비유처럼 어둡고 서글픈 것들이다. 아버지는 결혼 생활에도 실패했고, 당신이 젊어서 걸었던 희망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신은 결국 이 나라를 떠나 먼 나라로 이민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몹쓸 병을 얻어 어린 두 자식을 남겨두고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내 나이 고작 아홉 살에서 갓 열 살로 넘어가던 해의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린 시절 내내 오래도록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산의 이미지였다. 제법 나이가 들어 다락에 놓여있던 아버지의 옛 사진첩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산악회 활동을 열심히 했었나보다. 사진 속에 담겨진 당신은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서 피켈을 들고 웃고 있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당신은 짙은 베레모를 쓰고 한 가닥 자일에 몸을 맡긴 채 암벽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한 쪽에 굴러다니던 책 한 권을 읽을 일이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집념의 마나슬루』였다. 이 책은 1975년 익문사라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책이다.
며칠 전 인천의 등산가들이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났다. 등반기술이 발달해 요즘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기사 취급을 받는 편이긴 하지만 해발 8,000m 이상의 고산지대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들을 모두 14개, 이들 산을 통칭 히말라야 14좌(座)라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좌(座)라는 말은 본래 앉는 자리, 지위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종교적 의미로 보자면 불교에서는 부처, 보살, 제천(諸天)의 상(像)을 모시는 자리를 뜻하고, 천주교에서는 주교의 자리, 천문학에서는 별자리를 뜻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8,848m인 에베레스트이고, K2가 8,611m로 두 번째이다. 그리고 마나슬루는 여덟 번째로 해발 8,163m이다. 인간에 의해 가장 먼저 등정된 8,000m급 산은 안나푸르나였고,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악의 참사를 기록한 산은 8,125m의 낭가바르트봉이고, 그 뒤를 칸첸중가가 잇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등정하기 어려웠던 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은 K2나 에베레스트, 낭가바르트가 아닌 마나슬루였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마나사(Manasa)이며, '영혼'이란 뜻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영혼의 산'이라 부른다.
1977년 김영도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한국원정대가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에 성공했다. 당시 산악인 고상돈 씨의 인기는 권투 선수 홍수환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속에 뼈를 묻어야 했다.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마나슬루 원정대는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친 원정에서 셰르파를 포함한 16명의 산악인이 희생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1차 원정에서는 김정섭 대장의 친동생인 김기섭 대원이 정상 등정 바로 직전에 설치된 7,800m 지점의 마지막 캠프에서 돌풍에 휘말려 40m 아래 크레바스에 추락해 숨졌다.
동생의 유지를 잇고자 출발했던 2차 원정대 역시 정상 등정 직전에 히말라야 사상 최악의 폭설과 눈사태로 역시 친동생인 김호섭 등반대장을 비롯해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 대원과 일본인 야스히사 대원을 잃는다. 김정섭, 김호섭, 김기섭, 김예섭 4형제가 모두 산악인이었는데 이중에서 둘을 마나슬루에 묻어야 했고, 막내동생 김예섭 씨는 조난 끝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두 차례 원정 실패의 기록을 담은 원정기이면서 동시에 3차 원정을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시도되었던 3차 원정 역시 기상악화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 다른 팀이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면서 마나슬루는 잊혀졌다. 책의 속지에는 아버지 이름과 저자의 사인이 담겨 있었다.
나중에 집안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모두가 그 집 식구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였고 함께 산에 다녔다고 했다. 얼핏 듣기로 당시 함께 갈 뻔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 아버지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2차 원정 당시 내 나이 불과 두세 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은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산과 친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곳, 바로 뒷산이 북한산이었고, 나중에 성장한 곳이 남한산 자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에 가지 않았다. 내 나이 마흔이 되어 얼마 전에서야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북한산의 품에 안겼다.
나를 산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버지의 영혼이었는지, 아니면 내 안에 흐르는 산사나이의 피가 나를 산으로 불러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산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을 거둬들일 수 없게 되었다. 산에 가게 되니 산에 대해, 산에 오르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싶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는 산과 좀더 일찍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산에 대해, 산에 오르는 일에 대해 알려주실 분이 계시지 않았으므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홀로 산에 대해, 산에 오르는 일에 대해 공부한다.
이 책 『등산교실』의 저자 이용대 선생은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한국의 원로산악인이다. 그의 손과 발로 개척된 북한산 인수봉, 노적봉의 암벽등반 코스들은 한국의 현대 암벽등반사의 고전으로 통한다. 그리고 이 책 역시 등반에 대한 고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계신 동안엔 당신의 손으로, 당신이 떠난 뒤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개정판이 출간되길 희망한다. 책에 대한 리뷰를 대신하여 개인적인 이야기로 채운 까닭은 한 가지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록을 통해 산에 오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시선으로 촬영된 사진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감히 등산(登山)이란 하지 않고 그저 산에 간다고 했다지만, 등산이란 자신의 발로 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자신의 두 발로 산에 오르지 않고 타인의 등에 업혀 오르는 것은 등산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자신의 두 발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조난이라 한다. 산에 오르는 일은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신체에 의지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산에 가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나 나처럼 산에 가고 싶으나 산을 잘 모르는 이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과서는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손에 넣게 될 것이고, 직접 읽어보고 실행에 옮겨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동네 뒷산부터 시작해서 영남 알프스, 지리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자신의 두 발로 경험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마나슬루에 형제들을 묻고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던 산악인 김정섭 대장은 앞의 책에서 도전의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히말라야의 정상을 향해 돈과 시간과 젊음의 값진 생명까지 바쳐가며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정상에 무엇이 있길래 그리하는가?'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허망하게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오직 그 무서운 자연의 횡포밖에... 그러나 우리는 그저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탐험이며 모험이기에 한사코 오르려는 의지요 집념인 것이다. '탐험과 모험', 이는 인류의 역사를 전진시켜 준 원동력이지 결코 헛된 희생과 헛된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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