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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윤식 지음 / 다인아트 / 2003년 10월
변산
김윤식
여기를 택해 죽으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것은 내포가 알고 있다. 가랑잎 같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전 10시를 조금 지나 도착해서 7억 3천만 장의 가랑잎이 바다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은 여자였다. 은빛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아련하고 서러운 듯한 숫자가 여자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물결처럼 스쳐 지나가고 구운 전어와 소주를 마신 뒤 하루 종일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적벽(적벽)에 얼굴을 대고 전생에 가랑잎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누울 곳을 보아두었다. 또 붉은 낙조였다.
달은 뜨지 않았다. 물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덜그럭거리는 자갈밭에서 들려왔다. 남자의 가죽 허리띠를 손에 묶고 물에 들어갔던 일이 있었다. 그때 폭포가 떨어지고 어느 절에서 동종(동종)이 붉게 욹었다. 밤새 같이 울었다.
죽지는 못했다. 서러워도 죽는 날은 다시 오는 것이다. 다음 날 오후쯤 오후 5시를 조금 지나 바다의 발 밑에는 모란이 져 버린 서역 어디쯤에나 휘날릴, 몇 억 만 장의 까마득한 그런 가랑잎들이 붉게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그것은 격포가 알고 있다.
<김윤식, 사랑한다는 것은..., 다인아트, 2003년>
가끔 저자에게 친필 사인이 든 책이 우송되어 올 때가 있다. 예전 어느 날이던가, 명동 거리를 지나다가 영화배우 정우성을 만난 일이 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긴 얼굴의 미남자가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높이 떠서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놈 참 잘 생겼구나.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둘껄 그랬나? 하며 웃는 옆의 친구에게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언젠가 저 친구가 내게 사인 해달라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 친구도 나도 그런 날들은 결코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설령 내가 유명해지는 어떤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일 확률은 우리가 그날 명동거리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그것만큼이나 불확실하다. 어느날 문득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이름없는 출판사의 이름없는 시인들의 시집이 놓인다. 검토를 위해 읽게 되는 원고들을 책상 위에 올여놓았을 때 나는 으쓱해지는 걸까? 젓가락질이 서툴러 종종 굴비의 허리를 부러뜨릴 때가 있다. 종종 책상 위에 놓여진 무수한 글들이 등뼈가 부러진 시인들의 비명처럼 들린다.
세상엔 무수한 글이 쓰여지고 있다. 하나하나가 비명이다. 여기 또 하나의 비명이 있다. 나도 잘 아는 시인이다. 서너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꼴로는 일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자리에서든 꼭 마주치게 된다. 솔직히 이 시인의 글을 종종 읽게 되는데, 이 사람의 시들을 정좌하고 읽은 것은 거의 처음이란 생각이 든다. 분명 그전에도 본 적이 있었을 텐데... 하며 턱을 쓰다듬어 보지만 기억이 없다. 시집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과 마음으로 쫓아간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이 내게 주어졌던 것은 지난 해 가을무렵이었던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시집 안을 가득채우고 있는 것은 붉은 가을 냄새였다. 온통 시뻘건 가을들이 활활 불타오른다. 그러나 낙엽을 긁어 모아 태워본 이들은 알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시들거나 연기만 한량없이 뿜어내다 소리없이 저물어가는 것을.... 어느 신문 기사를 보니 일년에 등단하는 시인이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결코 폄하하려는 마음은 아니지만 가끔 TV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욕지기를 느끼기도 한다.
그네들은 결코 장미 가시에 손이 찔려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오규원은 참 옳다. 시인도 시 먹고 살지 않고 밥 먹고 살아간다는 평범한 진리.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글 때문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죄가 너무나 크다. 어찌되었든 이 가을에 참말 어울리는 시집이다. 만약 이 시집이 지방의 이름없는 출판사가 아닌 서울 대처의 유명출판사에서 나왔다면 한동안 순진한 여성 독자들의 감성을 적셨을 것인데... 이 시집의 초판은 죄다 소화되었나 모르겠다. 이 가을에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 죄다 쓸쓸한 짓이다.
누구 한 사람의 가슴에도 머물 수 없는 글을... 누구 한 사람의 가슴에도 도달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름없는 이들... 그런데 난 이 시인의 가을을 되밟아가며 문득 들었다. 내 등뼈가 투툭하며 터져나가는 소리들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명하다는 것은 그 존재가 남들보다 월등히 우월하다거나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단지 남들보다 조금더 알려져 있음을 의미하거나, 상품성이 뛰어나거나, 그도 아니면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로 유명할 뿐이다. 만약 이 시집을 읽는 일이 망설여진다면... 그건 아마도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이 시집에 실린 비명들이 외면당하는 일은 아쉽다. 이 가을에 읽어보길 권하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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