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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빛과 그림자 - 그림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차용구 옮김 / 까치글방 / 2000년 4월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역사적 편견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말하라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미국 제일주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로지 유태인만 희생당한 것인양 포장하는 것, 아랍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유없는 증오, 멕시코 등 이웃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대책없는 교만 등등이지만, 그 중 하나는 분명 고대 로마에 대한 숭상과 더불어 중세에 대한 폄훼일 것이다. 고대 로마는 마치 태양과 함께 시작되어 태양과 함께 끝나는 시절로 그려지지만 중세는 축축한 습기와 어둠 속에서 그려지기 십상이다. 물론 그 부분엔 지역적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중심이 되는 로마의 기후적 분위기도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고대 로마는 콜로세움이나 원형경기장 건설을 자축하며 한달 동안 2000여명의 검투사들이 검투 경기를 벌이는 살육을 즐기던 사회였다.
그에 비해 중세는 종교, 이단, 마녀사냥, 흑사병 등이 창궐하는 마치 문명의 암흑기인 양 그려진다. 요근래 나는 중세와 관련된 몇 종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보훔의 루르 대학의 교수로 있는 페르디난트 차입트에 의해 쓰인 중세 유럽 역사에 대한 일종의 입문서이다. 대개의 입문서들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재미를 따지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입문서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안내서이다. 지도책에서 재미를 느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입문서는 입문서 나름의 장점들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길 안내를 하는 책자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갈림길에 대한 충실하고, 정직한 길 안내 책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이전의 미디어 리뷰들이 증명하듯 뛰어난 입문서 역할을 하도록 꾸며져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중세를 문명의 암흑기가 아닌 근대 유럽의 변화무쌍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던 뿌리로서의 중세를 바라보고 있다. 유럽의 도시와 농촌, 귀족과 평민, 교회와 왕권 등이 끊임없이 대결하거나 타협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에너지를 뿜어낸 활기찬 중세를 재현해내고 있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모두 7개의 중요한 테마를 잡고 있다.
1장 '중세의 뿌리'에서는 중세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중세의 정치적 권력이라 할 수 있는 황제와 권력계승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2장 '새로운 사회'에서는 고대 로마와 결정적으로 변별되는 특징인 봉건제와 기독교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다루고 있다. 3장 '농업혁명'에서는 중세의 경제적 토대인 장원 경제와 농업에서의 새로운 변화들, 훗날 중세 귀족사회를 붕괴시키고 단초가 되는 중산층(젠트리 계급)의 성장도 함께 살피고 있다. 4장 '종교적, 정신적, 세속적 모험'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 중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그것은 중세가 지닌 활력과 정신적 토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장이 다루고 있는 세 가지 모험은 종교, 대학, 기사에 관한 것이다. 기사 집단은 중세의 낭만적 전사계급이자, 동시에 게르만족의 야만성이 기독교 교회의 교양과 합일한 기묘한 모양새를 가진다. 중세의 대학은 고대 로마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면서 근대를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5장 '권력과 공간'에서 다루는 내용은 한 마디로 중세의 팽창에 대한 내용이다.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룩한 중세는 그 시선을 드디어 외부로 돌리게 된다. 그것은 십자군 원정과 백년전쟁 등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세 유럽은 국가의식, 민족의식이 성장하며 오늘날의 유럽이 되어간다. 6장 '위기와 혁명'은 중세의 붕괴 혹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중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세는 페스트와 유대인 학살, 종교개혁 등을 통해 혁명과 위기를 거듭한다. 이것은 앞으로 600여년 쯤 후에 닥칠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 민족적 증오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중세에 이미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로 그들을 불태운 경험이 있음을 이 책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7장 '일상 생활, 신앙 그리고 미신'에서는 중세인들의 삶과 슬픔, 신앙과 문화 등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중세에 살았던 유럽인들에 대한 입체적인 상상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다. 중세 사회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 기사, 신앙, 전설, 성인들, 마녀, 고문실에 대한 ...
저자인 페르디난트 자입트는 중세라는 한 시대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사로잡힌 중세인이 아닌 새로운 중세인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모든 입문서들이 지닌 단점이기도 하면서, 특별히 이 책이 지닌 단점이기도 하다. 일단 모두 7장으로 구분된 속에서도 다시 여러 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이어주는 핵심 부분이 다소 약하여 읽는 이로 하려금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한 마디로 읽는 재미란 측면에서 상당한 노력을 요한다는 것이고, 다른 것은 저자 자신이 독일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학자라 그런지 중세 유럽에 대한 서술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독일이 전체의 중심에 놓이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이 종교전쟁이나 기타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대한 서술에 비해 독일에 대한 것이 다소 많다. 다른 한 가지는 중세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슬람에 대란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 대한 입문서에 대체 중세 이슬람에 대한 서술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중세 유럽의 학문이 고대 로마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을 전수해준 것은 분명 이슬람의 학자들, 이슬람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덕이라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이 책의 장점은 그간 출간된 많은 저서들이 아날학파의 영향을 받아 주로 민중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이 많은데, 이 책은 일상사의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중세의 권력과 사회 구조, 종교와 일상 생활 등등의 부분에서 정통적인 역사서들이 채택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이 책의 다소 딱딱한 서술을 누그러뜨릴 만한 도판들이 비교적 충실하게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기 보다는 중세에 대한 입문을 위한 필독서로 읽어둘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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