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럭셔리 신드롬
제임스 트위첼 지음, 최기철 옮김 / 미래의창 / 2003년 2월
프리티우먼이 된 제임스 트위첼 일가
제임스 트위첼은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청년사, 2001)을 매우 재미나고 인상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 후 가능하다면 국내에 번역되는 것만이라도 빼놓지 않고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저자이다. 대중의 문화와 소비란 측면에서 트위첼 만큼 인문학적인 교양 - 영문학 교수이기도 하기 때문에 인접한 다양한 분야를 인용해 독서가 한층 흥미롭고 풍성해진다 - 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글쓰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저자는 매우 드물다(특히 본격적인 문화연구 방면의 저서들은 번역하기도 어렵지만, 막상 번역된 책들도 난해한 편이다). 『럭셔리 신드롬』(2003)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듯 명품 소비 중독에 빠진 소비자들을 힐난하기 위해 쓰인 책은 아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우리는 지겹게 들어온 ‘근검절약’이라는 계몽의 서사를 또 한 차례 반복하게 될 테니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위첼은 베블런(유한계급론)을 감히 능가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결코 베블런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고 - 애초부터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 적절한 위치에서 타협했고, 그 덕분으로 우리는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엽에 이르는 현대의 명품선호 현상 혹은 숭배현상에 대한 가볍지도 그렇다고 매우 무겁지도 않은 수준의 괜찮은 에세이 한 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거의 500여 쪽(472쪽)에 달하는 분량이고, 익숙한 혹은 익숙하지 않은 명품 브랜드의 이름에 휘둘리다보니 - 거기에 제임스 조이스부터 스콧 피츠제랄드에 이르는 현대 영미권 문학의 대가들도 난데없이(?) 튀어나오곤 해서 - DVD로 치자면 이 책의 풍부한 서플먼트(supplement)들이 장점인 동시에 본영상보다 부가영상이 너무 많은 걸 하는 생각도 든다.
『럭셔리 신드롬』은 서론에 해당하는 제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부터 결론 「호사에 대한 은근한 변론」까지 포함해서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3장 「쇼핑을 하자」까지는 이 책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 까닭은 트위첼이 딸과 아내를 거짓 손님으로 꾸며 명품 브랜드 매장을 직접 방문해 점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화 <프리티 우먼(Pretty Women)>에서 거리의 여인 줄리아 로버츠가 처음 명품 브랜드숍을 방문했다가 점원들에게 무시당하는 광경을 재현하면서 명품숍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대접받는지를 체험 학습한다. 그 와중에 딸과 아내 역시 명품 브랜드에 현혹되기도 하는 과정이 사회현상으로 정착된 호사 취향에 대한 저자의 통찰과 함께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앞의 3장이 체험학습이라면 4장 「사치 호사품은 어디서, 누가 만드나?」와 5장 「호사품은 어떻게 필수품으로 변하는가?」, 6장 「셔츠에서 튤립에 이르기까지」는 명품의 역사와 이것들이 명품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혹은 명품으로 조작되고, 호명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이 녹아있다. 그리고 7장 「라스베가스 만세!」와 8장 「라스베가스에서 더 배울 것들」에서는 실제 물건으로서 명품이 진열되고 소비되는 공간 중 하나인 라스베가스란 도시공간을 분석하고, 다른 한 편으론 이 같은 호사현상이 실제로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체험을 소비시키고 판매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을 더불어 진행한다.
생산이 기계에 의해 좌우되면 광고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당신의 기계가 내 기계와 똑같다면 그 기계들이 생산해 낸 물건은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바꾸어 쓸 수 있고, 대체해 쓸 수 있다. 그런 물건들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생산한 비우, 담배, 베이킹 파우더, 약품, 신발이 당신의 제품과 다르다고 주장을 해야만 한다. 나는 이야기를 꾸며내야만 한다. 결국 나는 물건을 파는 대신 지어낸 이야기를 파는 것이다. <본문 255쪽>
위대한 개츠비와 조드 일가
베블런 이후로 유한계급들의 호사취미에 대한 경계 혹은 심리에 대해서는 새로운 분석이라할 만한 것 - 물론 이 분야에 대해 내가 전문가는 아니란 사실을 전제한다 - 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좀더 솔직하게 말해서 베블런의 연구가 학문적으로 대단히 면밀한 분석틀을 활용하고 있다거나 근거들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고전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그의 통찰이 대단히 정확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해두자. 다만 베블런의 시대(1857~1929)엔 확실히 지금의 인류보다 낮은 생산력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사치는 그야말로 유한계급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대한 개츠비’는 매우 소수였고, ‘조드 일가’(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족)는 흔해 빠졌던 시대였다. 하지만 오클라호마의 메마른 땅을 벗어나 포도가 익어가는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오키(오클라호마 출신 노동자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은 산업체에 고용되었고 -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여전히 착취당하면서도 - 차근차근 중산층으로 성장해 갔다. 때마침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1960년대까지 계속된 세계경제의 활황은 미국뿐만 아니라 서구 대부분의 국가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과거 베블런의 시대였다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재력이 서구 사회의 노동자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들 중 많은 수는 높아진 임금과 사회복지의 혜택 속에서 재테크에 열을 올렸다. 그들 중 상당수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사치는 대중화되었다. 지금 한국의 명품 열기도 이와 거의 비슷한 수순을 밟아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정도 분석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주간지나 일간지 기사에서 수두룩하게 발견할 수도 있는 수준이다. 트위첼은 여기에서 반보 정도 더 깊은 심도를 보여 준다(책값이 15,000원인데 그 정도는 해야 돈값을 하는 거라는 듯).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럭셔리 신드롬』의 백미는 6장 「셔츠에서 튤립에 이르기까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트위첼은 “간혹 어떤 물건이 날개돋친 듯 팔릴 때 그 이유를 캐 보면 그 물건을 다른 식으로 보게 하고 새로운 뒷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물건에 어울리는 새로운 환경을 설정해 줌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한 예시로 든 상품은 TV프로그램(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스펀지’가 아니었던가 싶은데)을 통해 우리에게도 제법 잘 알려진 사실인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이다.
네덜란드의 튤립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유럽의 대량 유통시장에서 최초로 각광받은 호사품이었다. 이전까지는 동양에서 부처의 사리 혹은 손가락 마디뼈가 사찰마다 모셔져야 하는 보물이었던 것처럼 서양에서도 성인들의 뼛조각, 십자가의 조각이라고 알려진 나무부스러기들이 광적인 종교 열기에 함께 대단한 수집 품목이었다. 물론 이들 중 대다수는 위조품 혹은 거짓이었지만 문제는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사실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거다. 어쨌거나 이 시기에 튤립이 호사품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요인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원예와 정원가꾸기가 취미 생활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전까지 식물을 기른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식용이나 약재용으로 쓰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16세기에야 비로소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그런 호사를 즐길 수 있었다. 다른 한 까닭은 당시 네덜란드의 문화풍토로 인한 것이란 것인데 정물화가 유행하면서 튤립이 그 대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튤립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꽃이 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정물화들은 오늘날 최고의 광고 CF가 되어 전유럽의 호사가들에게 튤립이 널리 홍보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튤립 열기의 전부라면 무언가 설명이 불충분하단 느낌이 든다. 경제학적인 분석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른바 ‘더치 페이’란 말을 만들어낼 만큼 합리적인 사람들이 튤립이라는 생육 가능한 작은 식물에 그토록 엄청난 돈을 투자할 만큼 열광적이었던 이유엔 뭔가 좀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하다. 트위첼은 그 원인으로 당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을 휩쓸었던 선(線)페스트에서 찾는다. 이 전염병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암스테르담 시민의 7분의 1이 사망할 만큼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은 사람들에게 먼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투자에 열광하게 했고, 튤립은 성공한 인생, 유한한 인생에 대한 하나의 기념품으로 모두가 소유하길 열망했다.
지금 우리들은 이 시대의 튤립 투기 열풍을 비합리적인 것이고, 순 엉터리로 손쉽게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구찌, 루이뷔통, 프라다는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 - 어떤 이들은 이 제품들이 장인의 손을 거쳐 생산된 훌륭한 수제 명품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 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파트, 부동산, 증권은 또 그만한 대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난 1997년 IMF경제 위기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건, 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무관심, 사회적 짜증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의 꿀벌왕국에는 어차피 대안이 없다
마치 선페스트로 당장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돈벌이와 명품에 열광하는 까닭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명품소비열기와 관련해서 늘 떠올리게 되는 우화 중 하나는 역시 네덜란드 사람, 의사이자 시인이며 나중에 아담 스미드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맨더빌(Mandeville, 1670-1733)이다. 맨더빌은 네덜란드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오늘날까지 경제학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까닭은 “개인의 탐욕이 경제의 활기를 만든다”는 ‘유효수요’의 개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꿀벌의 우화」라는 한 편의 풍자시를 지어 당시의 영국사회를 풍자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번성한 꿀벌의 왕국이 있었다. 이 나라의 정치는 엉망이었지만 강한 군대를 이용해 외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를 늘려나갔으며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모자라 빚까지 내가며 매일매일을 흥청망청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승이 이들 앞에 나타나 왕국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에 여왕을 비롯한 귀족 꿀벌들까지 모두 각성해 이날부터 검소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정말 호화로운 사치를 모두 금하고, 검소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검소하게 살게 되니 식민지를 통해 벌어들이는 금과 은도 필요 없게 되었고, 식민지가 필요 없게 되자 군대도 필요 없어졌다. 드디어 왕국은 군대마저 해산했다. 술집과 극장도 문을 닫게 되었고, 재판관과 재판정도 필요 없었고, 결국 경찰과 세리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이쯤에서 꿀벌의 왕국은 유토피아가 되었어야 했는데, 도리어 불경기가 닥치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국민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이 우화의 내용을 읽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IMF직후 부자들의 소비 증대만이 우리들의 살길이라고 외쳤던 때가 기억났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민간 소비가 부진하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경제 침체 상황에서 경기를 살리기 위해 유효수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들이 귀가 따갑게 외치던 주장들이기도 하다. 결국 그 같은 주장에 밀려 전국의 이름 높은 명산 중턱마다 연일 골프장 건설에 여념이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부자들에게 지갑 좀 열어달라고 정부와 국민 모두가 두 손 모아 간절히 호소하게 되었단 말이다. 트위첼은 이 책의 말미에서 맨더빌을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호사에 대한 은근한 반론」을 통해 호사품이 지닌 경제학적인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호사품 열기에 대한 은근한 반감도 내비추고 있지만 말이다.
『럭셔리 신드롬』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비판적인(진보적인) 사람들을 닦아세울 때가 즐겨 나오는 말인 “그래서 대안은 뭔데?”의 “대안”은 없다. 왜? 어차피 맨더빌의 우화는 결국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창출되는 유효수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도록,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도록 요구하는 것 이외의 대안을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더빌의 우화를 뒤집어 보면 흥청망청한 벌들의 나라가 굴러갈 수 있는 까닭도 이미 나와 있다. 그 나라가 계속 버틸 수 있는 건, 궁극적으로 우리가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 - 노동자계급도 좋고, 후진국도 좋고, 여성도 좋고, 이주노동자라도 좋은,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착취 가능한 지구 -가 존재할 때뿐이란 점이다. 가끔, “그 놈의 대안은 뭔데”라는 사람들에게 톡 쏘듯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말이 있긴 하다. 이미 대안은 여러 차례, 여러 경로로 나왔다. 다만 당신이나 나나 좀더 괴로워지기 전까진 그걸 실천하려 들지 않을 뿐이라고….
* 정신에 비해 육체가 열등한 것이란 인식 만큼이나 명품 소비광보다 한시를 읽고, 바흐를 좋아하는 취향이 좀더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편견이다. 그러나 한시를 읽고, 바흐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 역시 고매하고 선량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더욱 큰 편견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문화적 취향을 대변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선량한 것, 고매한 인격이란 타인의 눈물을 발판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지 않을 때 비로소 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품격이란 결국 정치적인 문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