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발터 ( Bruno Walter, 1876∼1962, 독일, 미국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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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발터 ( Bruno Walter, 1876∼1962, 독일,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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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낭만주의의 계승자. 브루노 발터와 현대음악

토스카니니(맨 우측)와 함께 한 브루노 발터

SP시대로부터(그의 첫 녹음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1900년이었고, 카르멘 전주곡 등 3곡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스테레오 LP 시대에 이르기까지 브루노 발터는 많은 녹음을 했지만 그의 음반 중 녹음 상태가 좋은 것은 대개가 콜럼비아 교향악단을 지휘하던 때의 것들이다.

그는 온화한 품위와 인격을 통해 단원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 단원들을 통솔함에 있어 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조성해 연주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었지만 집중력만큼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연주자들 위에 군림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공감해주는 협력자였고, 그의 이런 재능은 특히 높은 난이도를 필요로 하는 모차르트와 말러의 교향곡들에서 빛을 발했다.

브루노 발터 ( Bruno Walter )

1876년 9월 15일 독일 베를린에서 출생
1886년 슈테른 음악원(현재 베를린 음대)에서 피아노 공부 시작
1889년 열세 살의 나이로 베를린 필과 피아노 협연
1893년 쾰른 시립 가극장 지휘자 취임
1895년 말러가 지휘하는 함부르크 국립가극장의 부지휘자 역임
1913년 뮌헨 가극장 음악 감독 취임
1923년 뉴욕 필 데뷔
1925년 베를린 시립 가극장 음악 감독
1929년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역임
1933년 나치를 피해 빈으로 망명
1936년 빈국립 가극장 음악감독 취임
1939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 필 등 지휘
1955년 여든 살의 나이로 은퇴
1957년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발족과 함께 지휘대에 복귀
1962년 2월 17일 심장마비로 타계

<조희창 지음/ 전설 속의 거장에서>

스위스의 성 아본디오 교회에 있는 브루노 발터의 무덤

많은 평자들은 브루노 발터 음악의 전성기이자 인생의 전성기는 그가 빈 궁정가극장의 악장으로 있던 시기이며, 이 무렵 그의 음악적 해석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20세기의 지휘자 중 3대 거장을 꼽을 때 사람들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말한다. 이 중 토스카니니가 1867년 생이고, 발터가 1876년생, 푸르트벵글러가 1886년 생이다. 어찌보면 동년배 같지만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의 나이차이는 19년에 이른다. 어쨌든 이들 세 사람은 유럽의 마지막 전성기가 시들어가는 19세기말에 태어나 그 때 인격과 음악관이 형성된 이들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대학의 고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당시 유럽 상류 사회의 인문학적 교양을 체득하기에 좀더 손쉬운 위치에 있었다면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 파르마의 가난한 양복쟁이의 아들이었고, 브루노 발터는 실크 상점의 점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걸 굳이 계급적으로 나눠보자면 푸르트벵글러는 부르주아, 발터는 쁘띠 부르주아, 토스카니니는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겠다.

브루노 발터의 음악을 나는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의 흐느낌"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음악이 전체적으로 슬프다거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음악에서 그런 어두운 그늘은 잘 느껴지지 않는 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물론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처럼 곡 자체가 풍기는 어두움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발터의 음악관이 형성될 무렵엔 아직 브람스와 브루크너가 살아있었으며, 말러와 R. 슈트라우스는 직무상 만날 수 있는 사이였었다. 발터는 단지 음악적으로 비중있는 인물들에게만 관심을 보였던 것이 아니라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1874-1929), 아르투르 슈니츨러 등 소설가, 시인, 극작가 등과도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많은 음악평자들이 그와 그의 음악을 가리켜 낭만적 혹은 로맨티스트라고 하는 것이 틀린 지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서도 못내 아쉬운 부분 한 가지는 브루노 발터는 분명 말러에 이르기까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고민했지만 그 이후의 음악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관심과 이해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터는 제1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두고 약 10년간 바이에른 왕립 가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전성기를 종결하는 마지막 방점이었지만, 그는 그 이후 음악의 새로운 흐름들에 대해서는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브루노 발터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에는 애착을 보이면서도 12음 기법에는 의혹을 던졌다고 한다. 그와 거의 동년배 지휘자들이었던 클렘페러, E. 클라이버(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아버지), 푸르트벵글러 심지어는 그보다 연장자였던 토스카니니가 보여주었던 파격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나는 물론 브루노 발터의 인격적인 면모에 반한 사람이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그의 계급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던 토스카니니가 독일 지휘계에 던진 파문이나,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푸르르벵글러가 현대음악에 보인 관심을 고려할 때(물론 푸르트벵글러의 주전공은 아니었지만) 브루노 발터의 이런 행동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나는 그가 현대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저어했던 까닭으로 그가 쁘띠 계급의 유태인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은 아닌가 유추해보고 있다. 같은 유태계인 구스타프 말러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긴 하지만 슐레징거라는 유태계 성을 버린 것도,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한 것도 비 유태계 출신 지휘자라면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브루노 발터의 음악 해석에 굳이 '계급적 한계' 운운하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더 이상의 현대 음악에 대한 관심을 멈춘 데 대한 혐의를 다른 곳에 둘 수도 없다.

작가. 토마스 만은 발터의 60세 생일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모든 것들은 그가 스스로 갈고 다듬은 영혼의 힘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그의 경이로운 음악적 재능, 그의 고매함과 인간적인 면 그리고 그의 사회적인 권위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브루노 발터가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다. 역사상 이름을 내보인 혁명가들은 대개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아니라 쁘띠 계급이었다. PT계급 출신은 생계 자체의 문제로 인해 혁명을 위한 소양을 쌓을 겨를이 없었고, 자신의 신분이 고정되어 있다는 의식을 품을 새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부르주아와 PT사이 계급인 쁘띠 출신의 혁명가들이 많다는 것이지만 모두가 혁명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브루노 발터의 그 부단한 노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위대한 인격, 정신의 소유자. 브루노 발터

신세기를 앞두고 월간『객석』에서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위대한 연주자와 지휘자를 10명씩을 선정하는 기획 기사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브루노 발터 편의 서두에 이런 글이 실려 있어서 나를 한동안 미소짓게 만든 일이 있었다.

한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물었다.“당신에게 두 발의 총알이 든 총이 있고 당신 앞에는‘지휘자’와‘히틀러’와 스탈린’이 서있다. 당신이 누구든 두 사람을 골라 마음대로 쏠 수 있다면 누구와 누구를 쏘겠는가?”

단원은 서슴없이 답했다.

"지휘자! 지휘자에게 두 발 다 쏜다." 위와 같은 농담은 물론 카리스마의 극단을 치달은 20세기의 지휘자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단원들의 지휘자에 대한 존경심 없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브루노 발터. 이 지휘자야말로 앞서 말한 두 발의 총알을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감사와 겸손과 존경의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단원들의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월간 『객석』에서>

오늘날 지휘자는 19세기말과 20세기 중엽의 거장들이 누리던 절대적인 권위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지점에 와 있다. 어찌보면 서구에서 문학이 누리던 권위의 실추와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변화의 원인이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푸르트벵글러 편에서 "오케스트라의 비약적인 발전은 근대에 이르러 교회와 귀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시민 계급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단원의 숫자가 늘어나고, 복잡하고 장대한 규모의 교향곡 같은 관현악곡이 만들어지는 등, 이때부터 오케스트라는 비좁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대규모 음악당과 오페라 하우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휘자는 비로소 신의 권위를 짊어진 교회와 권력의 정점이었던 황제와 귀족,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을 대신해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지휘봉 아래 두게 된다. 지휘자가 음악을 해석하고 창조해내는 절대적 권위는 어찌보면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거장들의 시대에 황혼이 내린 탓도 있겠지만 지휘자의 권위가 예전과 달라진 것에 대해 사회학적인 해석을 해보자면 역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접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버마스식으로 말하자면 노동력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시절의 논리였다면,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있어서는 과학과 기술이 잉여가치를 생성, 창출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고, 여기서 과학과 기술이 의미하는 것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나 상업적인 거대 메이저 음반사와의 관계를 살펴봄으로 가능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과 결부시켜 지휘자라는 것이 음악적 통일을 위해 오케스트라 구성원들을 소외시키는 우상적 존재라고 비판했다는 데,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케스트라 구성원뿐만 아니라 지휘자마저도 소외의 대상이 되었다.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지휘자의 지휘봉을 언제라도 스톱시킬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다. 스튜디오의 초보 녹음실 기사, 프로듀서라도 절대적 카리스마의 지휘봉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애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한 번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망명 생활까지 해야 했던 브루노 발터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오늘날 뮤즈의 신이 지쳐버린 듯 보이고 차가운 가을을 맞아 영혼의 꽃도 열매도 멈춘 듯 여겨지나, 비록 오늘날의 모든 재능과 수고가 물질주의와 기술주의로만 치닫고 있으나,
비록 우리 시대의 영적인 기후가 마치 지구 기후의 변화처럼 치명적인 형태로 변해 버렸으나,
나는 확신한다.
인류는 마땅히 이 질병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힘들이 고결한 샘물처럼 다시 흐르게 해야 한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그에 대하여 계급적 한계 운운한 것이 부끄러워진다. 그는 그런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인간존중의 마음은 그의 글과 그의 음악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의 이런 면모를 특히 잘 보여주는 음반이 바로 <연주의 탄생(The Birth of a Perfomance)>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린츠>의 연습광경을 무단으로 녹음하여 그의 허가를 받고 음반으로 발매했던 레코드인데, 대지휘자의 리허설을 레코드로 낸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다. 그가 모차르트를 해석하면서 오케스트라에게 특히 강조하는 것은 "노래하라!"는 것이다. 그는 음악이란 정서와 결부될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에 호소할 수가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음악의 주제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이 두 요소를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때 '언제나 노래하기 쉽게 하는'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자세히 소개할 수 없으니 이 음반을 틀어놓고 『이 한 장의 명반』에 번역 수록되어 있는 당시의 정경과 부르노 발터의 말을 비교해 가면서 들어본다면 매우 뜻깊은 음악 감상이 될 것이다.) 브루노 발터의 이런 인간적인 면모들에 대한 일화는 차고 넘칠 만큼 많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표현한 최고의 격한 발언은 침묵이었다고 회고한다.

지휘하는 브루노 발터의 손 - 그의 지휘봉은 유연하되 부러지지 않는 버드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상식 밖의 예술사』/ 정윤 지음 / 새길/ 1995년
- 예술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읽다보면 상식도 늘고 예술이란 게 복잡한 이론을 늘어논다고 해서 알 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대중적인 예술사 입문서적이다.

『전설 속의 거장 - 20세기를 매혹시킨 클래식의 천재들』/ 조희창 지음 / 황금가지 / 1998년
- 오랫동안 <객석>의 기자로 일했던 조희창 씨가 자신이 연재했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매혹적이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거장들의 이야기가 대중적인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강력 추천한다.(바람구두 실력 뽀록나게 하는 책이다.)

『이 한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 현암사 / 1999년
- 국내에서 클래식 음악, 음반에 관한한 고전 중 하나가 된 책이다. 클래식 음악 초심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길잡이다. 애호가들에게도 지휘자와 지휘자의 차이, 가수와 가수의 차이까지 식별하는 심미안을 키우는 데 유익한 길동무다. 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을 망라하면서, 한편 한편마다 곡해설은 물론 작곡가의 생애, 시대적 배경, 작곡과정에 얽킨 사연, 녹음과정, 다른 음반과의 차이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거장들과의 만남-마에스트로』/ 조윤용 엮음/ 예지각/ 1986년

위대한 지휘자
-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다양하게는 알 수 있는 사이트이다. 그 중에서 브루노 발터 페이지를 골라봤다.(영문)

소니 클래시컬
- 브루노 발터의 음반은 거의 대부분 소니 클래시컬에서 발매되고 있다.(영문)

브루노 발터의 홈
- 일어를 읽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은 홈일 것 같다. 사진 자료가 풍성하므로 가볼 만 할 듯.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지휘자가 브루노 발터이다.(일문)

음악을 신으로 받든 사랑과 겸허의 사제: 마에스트로의 마에스트로
- 브루노 발터의 말러와 모차르트

발터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시작한 작곡가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등을 열거한 다음 마지막으로 모차르트를 언급했다. 그리고 그는 어째서 모차르트가 가장 늦게 이해되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미를 이해하는 데는 성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오늘날 정격연주가 일반화되면서 발터의 연주에 대한 비판도 있긴 하지만 브루노 발터 역시 자신의 스승이었던 말러의 모차르트 연주를 규범으로 삼으면서도 그의 해석을 지나친 강조와 우아한 연주를 강조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오히려 이와 반대로 좀더 아카데믹하고 무미건조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정격주의자들의 비판은 그저 시대의 흐름에 묻어둘 일인지 모른다.

브루노 발터의 모차르트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매력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지휘자였다는 말은 그가 단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적당히 넘어가는 지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온화한 품위와 인격을 통해 단원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 단원들을 통솔함에 있어 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조성해 연주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었지만 집중력만큼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연주자들 위에 군림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공감해주는 협력자였고, 그의 이런 재능은 특히 높은 난이도를 필요로 하는 모차르트와 말러의 교향곡들에서 빛을 발했다.

구스타프 말러와 브루노 발터의 단순한 사제지간을 뛰어넘는 애정과 존경은 레너드 번스타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최고의 말러 해석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번스타인의 고국인 미국에서 말러 붐을 일으킬 수 있는 기본 바탕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브루노 발터였기 때문이다. 말러는 발터의 스승이자 벗이며 그를 키워준 은인이기도 했다.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초연을 브루노 발터에게 맡김으로써 그가 성장해나가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 브루노 발터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있을 당시 미국에서는 브루노 발터를 제외하고는 말러를 이해할 만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비록 국력은 미국이 앞서고 있었지만 오랜 문화의 축적이란 점에서는 유럽에 비해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러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기 다소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루노 발터는 자신의 연주회 레퍼토리 안에 말러의 곡을 빼놓지 않았고, 그의 이런 노력은 나중에 번스타인이 뉴욕 필을 맡으면서 말러 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56년 여든 살이 된 발터는 심장에 문제가 생겨 공식적인 지휘 활동을 중지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때마침 스테레오 녹음 방식이 개발되었고, 당시 CBS레코드는 그에게 새 녹음을 제안해 왔다. 그는 거절했으나 몇 번의 거듭된 간청 끝에 브루노 발터는 다시 지휘봉을 잡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향악단이 바로 콜롬비아 교향악단(1957년)이었다. 5년 후 죽기 얼마전 발터는 스스로의 생을 돌이켜보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통해 음악이라는 고마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내 인생을 돌이켜볼 때 나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1962년 2월 17일 심장마비로 85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나에겐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브루노 발터의 음반들이 있다.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의 음반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행복감에 젖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거장의 그늘 속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위한 것일 게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너무 한꺼번에 가지고 싶어 한다. 때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사람들은 소유라는 절대반지의 욕망에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의의 사고로 끝끝내 그 음악들을 못 들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신학자 카알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천사가 신을 찬미하려고 바하의 음악을 연주할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모였을 때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또 그러면 신도 기꺼이 그 음악을 경청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라고 말이다. 거기에 내가 굳이 몇 마디를 보탠다면 아마 지휘는 브루노 발터가, 피아노는 클라라 하스킬이 맡지 않겠는가.(물론 내가 그곳에서 그런 천국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겠지만서도.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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