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아랍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아랍인들은 비굴한 사기꾼같은 존재들로
여겼다. 그에 비해 사막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용감한 베두인의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간신히 사령부에
도착한 로렌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아랍 의상
때문에 대부분의 아랍인들이 영국인에게 당하는 것과 똑같은 괄시와
수모를
경험한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럽
전선에서의 전쟁은 갈리폴리와 솜강 전투의
지지부진한 참호전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베두인 전사들의 낙타 부대를
이끌고 단번에 난공불락의 아카바를 점령한
로렌스의 출현은 전유럽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그들의 엑조티즘을 충족시켜주는
사건이었다. 로렌스 못지 않은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었으며 새로 부임해온 사령관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vy)장군은 곧
로렌스와 그의 아랍인 부대의 중요성을 감지했다.
이들의 승전보는
곧 널리 퍼져 나갔으며 사람들은 로렌스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앨런비는 로렌스를 치하하고 그에게 군자금으로
2십만
파운드의 금화를 주었다.
좌로부터
호웨이탓의
족장 아우다 아부타이(Auda abu Tayi ,
안소니 퀸),
T.E.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하리스족 족장인 알리(Sherif Ali Ibn El Kharish,
오마 샤리프)이다.
로렌스는
유럽과 아랍, 터키인들 모두에게 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영국은 터키를 제압하기 위해서
아랍인들의 조력을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인도와
수에즈 운하의 유지를 위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연료원으로서 중동의
석유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집트 총리 헨리
맥마흔 경은 메카의 대종주 후세인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만약 아랍인들이 영국군에 협력하여
터키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후에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이름하여 '맥마흔 편지'였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이런 약속을 한 이면에
프랑스와도 밀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전후
터키(투르크) 지배하의 아랍인 지역을 두 나라가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밀약이 바로
사이크스-피크 협정(Sykes-Picot Agreement)이었다.
T.E.로렌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이미 알고 있었다.
로렌스의
반란과 다마스커스 입성
T.E.로렌스는
소령으로 승진했지만 영국은 아랍인들에 대한
지원 약속을 어기고 그들에게 최신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전후의
충돌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사막전의 영웅으로 떠오른 로렌스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인 신문기자 잭슨 벤틀리가
전선으로 찾아온다. 미국인 기자는 로렌스에게
묻는다. "사막의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매혹시키는가?"
그의 대답은 매우 짤막하고 단호한 것이었다. "깨끗하니까(Clean!)". 혹자는
이 대답이 사막 위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 서구의 단도직입적인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해석은 그와는 좀 다르다.
이 부분에서의 "깨끗하니까"라는
대답은 오히려 매우 솔직한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막에서의 삶과 전투를 경험하며 다른
일반적인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사막에
대한 엑조틱한 환상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밀약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사막의
삶과 아랍문화는 근대적 이성과 문명으로 거부할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자아도취적인 근대 문명과 제국주의의
더러움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서 사막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국군보다 먼저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여 아랍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로렌스의 반란이 설명되지
않는다.
로렌스는 터키군의 보급
열차를 습격하여 그들의 보급품을 탈취하는
게릴라 작전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알리를
비롯한 아랍인들은 아랍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영국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이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간다. 로렌스는 이런 루머들을 일축하기 위해 터키군이
장악하고 있는 데라에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터키군의 남색에 희생당하는 치욕을 당한다.
이
사건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두고
괴롭힌다. 데라에서의 사건 이후 로렌스는
이제까지의 모든 일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아랍을 떠날 생각으로 카이로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국인들이 보기엔 아랍인에
가까운 이방인이었다. 알렌비 장군은 그를
다시 아랍인들에게 돌려보내려 한다. 처음에
로렌스는 이런 명령을 거부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밀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국군보다
먼저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여 아랍 자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이제 영국의 이익보다
아랍의 독립을 우선하여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다마스커스로
진격하던 로렌스는 기계화된 영국군의 진격
속도를 앞지르기 위해 진격 도중 마주치게
된 터키의 패잔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버린다.
물론 그 바탕에는 터키군에게 당한 성적 모욕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로렌스의 독려 덕분이었던지 아랍군은 1918년
10월 영국군의 기계화된 기동력을 앞질러 그들보다
하루 반나절 정도 먼저 다마스커스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애시당초 아랍의
독립국가 따위는 허용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산업혁명의 에너지원이었으며 19세기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이었던 석탄을 대체할 에너지원으로서
석유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 여러 부족의 연합군대보다 하루 반나절
뒤에 다마스커스에 입성한 영국군은 아랍군대의
사기를 꺽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마스커스 시내를 입성하며 강력한 무력 시위를
보인다. 로렌스와 알리를 비롯한 부족장들은
다마스커스 시청에 아랍 연합의회를 설치하지만
오랫동안 부족 단위 이상의 정치의식을 발휘해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단위로서의 민족 의식의 각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사소한 문제들로 분열되어
결국은 하나 둘씩 다마스커스를 떠난다. 파이잘
왕자와 앨런비 장군, 프랑스의 고문은 함께
모여 협상을 시작하고 더 이상 필요없게 된
로렌스 역시 쓸쓸하게 회의장을 떠난다. 그를
태운 운전병은 로렌스에게 묻는다.
"고향으로 돌아가시나 보죠?" 로렌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T.
E. 로렌스가 보낸 환멸의 나날들
영국으로
돌아간 로렌스를 기다리는 것은 제국의 이익을
챙겨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대영제국을 이끄는 지도층 인사들은 이제 사교계의
즐거운 입방아에 오르내릴 충분한 화제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로렌스가 그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듯이 보이거나
상류 사회의 예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긴 하더라도 그것은 영웅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여겼다. 전쟁은 끝났다.
1919년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파이잘과 함께
참석하여 아랍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그는
열강의 회의실마다 찾아다녔지만 그의 아랍식
복장이 흥미를 끌었을 뿐 아랍의 권리 따위는
모두 안중에도 없었다.(헤이그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동방의 약소국에서 찾아온
조선 밀사들이 받은 대접을 떠올려 보라.)
이 무렵 영국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프랑스에게 약속한 키르쿠트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장악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란
막대한 희생을 치른 결과 마침내 페르시아만
일대와 이라크 전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20세기
초 영국의 무자비한 제국주의 확장 정책이
빚어낸 결과를 우리들은 지난 20세기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주체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걸프전 결과 오늘날 페르시아만
일대의 주도권은 당연히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로렌스와 함께 국왕 조지5세를 알현하는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 로렌스의 공훈에 대해 훈장
수여를 요청했다. 로렌스는 처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를 사양했다.(사실상
거절이었다.)
처칠은 로렌스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며 힐책했다.
로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랍인에
대한 약속 준수에 영국의 역사적 명예가 걸려
있다는 것을 국가의 최고 지도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습니다.
국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에 대해서
알 의무가 있고, 이렇게 하는 것외에는 그에게
알릴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영화. 진실과 예술 사이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의 작품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보기에 따라 서구의 한 영웅이
경험한 단순한 활극 모험담에 지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영화를 제작할 당시의 오리엔탈리즘 또한 엿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그런 혐의들만을 들춰내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매력에 대해서 '역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도그마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생각을
한다. 린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전작이었던 <콰이강의 다리>에서 그러했듯이
매우 복잡다단한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예술이
인간에 대한 것이며, 인간에 진지한 탐구이자
감상자와의 대화라고 했을 때 데이비드 린
감독 만큼 탁월한 재능과 업적을 남긴 예술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린
감독은 많은 헐리우드 스펙타클 영화들이 걸어갔던
길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시작했다. 단순히
첫장면에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에서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로렌스'란
인물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남긴 지적 유산들,
산업혁명과 근대적 이성을 소유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형태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로렌스란 인물이 사막이라는
'야만의 장소'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아마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낭만에 가득찬 영웅들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막이라는 '야만의
지적(知的)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그가 발견한
것은 문명의 탈을 쓴 야만, 제국주의의 실체를
발견한다.
이
영화의 여러 매력적인 장면들을 보자. 70밀리의
대형 시네마스코프에 펼쳐진 사막은 넓고,
그 안에서 롱테이크로 잡힌 인간의 모습은
그저 하나의 점으로만 보인다. 로렌스가 아랍
족장의 옷을 선물받아 영국군 군복을 벗고
아랍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장식용 단검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어린애처럼 비춰보고 즐거워하던
모습은 누구나 기억할 만한 명장면으로 생각한다.
이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유는 뒤이어
터키인들을 학살하고 피범벅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그 칼에 비춰보게 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장면 하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구태여 어려운 기법, 형식상의 기교
따위를 부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 이
소박하고 단순한 장면 하나에도 엄청난 형이상학적
의미들을 만들어 낸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장면 하나에도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한 의미들을 담아낸다.
로렌스보다
먼저 파이잘에게 군사자문관으로 온 브라이튼은
아립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결코
영국군 군복을 벗지 않는다. 이는 그가 문명으로부터
온 사람이며, 자신이 그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아카바를 점령한 뒤
사령부를 찾은 로렌스가 아랍식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수모를 생각할 때
로렌스가 아랍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갈 대목이 아니다. 린 감독은
언뜻 평범하게 구성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조차 뒤이어 등장하게 되는 장면들을
위한 복선으로, 혹은 상징으로 처리하고 있다.
아랍인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로렌스의 근대적
이성이라는 허울은 영국의 배신과 부도덕성이라는
내부의 모순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간다.
그는 문명과 야만, 근대적 이성과 자연의 야만이라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 던져져 있는 인물, 로렌스를
통해 제국주의의 야만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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