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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Mediterraneo, 1992. 이탈리아 )

 

 

감독:  가브리엘 살바토레 Gabriele Salvatores  
출연:  Diego Abatantuono, Claudio Bigagli, Giuseppe Cederna, Ugo Conti, Gigio Alberti, Memo Dini, Vasco Mirandola, Vanna Barba, Irene Grazioli, Claudio Bisio, Luigi Montini, Antonio Cat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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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피자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켄 로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랜드 앤 프리덤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다 이사오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요시프 브로즈 티토

멜리나 메르쿠리

미키 테오도라키스

에리히 프롬

 

  또 하나의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될 때 저마다 일기장에 갖은 맹세와 보랏빛 희망을 적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잔혹했던 20세기가 마감될 때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일기장을 꺼내 각자의 희망을 적듯 그렇게 21세기의 새로운 희망을 적었을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큼직하게 적힌 글자는 아마도 '평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대학생활을 남들보다 서너 해 늦은 92년도에 시작했다. 이 영화를 볼 무렵의 나는 고독했고, 심신이 피곤했다. 나를 지도하던 어느 교수님은 그 무렵의 내 눈빛이 '고독한 마라토너'의 그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이념의 시대는 저물고 사람들은 저마다 쓸쓸한 모습으로 세월의 뒤안길로 고독하게 사라졌다. 그런 시기에 개봉된 <지중해>. 역사와 이념의 하중에 짓눌리고, 청춘을 소모당한 채 남루하고 피폐한 심성만 남은 이들에게 <지중해>는 분명 그 물빛처럼 포근했을 것이다. "A Charming Comedy!"라는 이 영화의 광고 카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 꺼진 극장에서 혼자 우울했다. 마치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난 뒤의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영화의 탈역사적 혹은 도피적 관점이 내 마음에 다가오는 이 비루한 시대의 징후로 여겨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도피자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For those who "dedicated to all those who are running away."

                 - Henry Laborit, from <Mediterano>

 

전략적인 필요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의 작은 섬 '미기스티'에 파견된 몬티니 중위와 로루소 상사 - 그들은 잊혀진 병사였다.

 

 

 

 

그들을 싣고 온 구축함 가리발디호는 외해로 나가기도 전에 침몰당하고, 그들을 외부 세계와 연결해줄 유일한 수단인 무전기는 우연히 망가지고 만다. 그리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도 사람들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리베로, 펠리체 형제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바다는 난생 처음 구경하는 산골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미기스티 섬에서도 염소와 양을 치는 산꼭대기에 그들의 거처를 자진해서 정한다. 그리고 한 처녀를 두 남자가 사랑하는 ...

 

 

 

 

어느날 갑자기 돌아온 마을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의 조상은 하나라며, 그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바실리사와 파리나 - 두 사람의 사랑은 창녀와 군인이란 식의 접근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거기엔 우리 사회가 앞으로는 고결한 척 외치며 뒤로는 매매춘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직업으로서 창녀의 당당함과 더불어 그러므로 당당할 수 있는 남녀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 여성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월드컵 때 이탈리아 녀석들의 축구가 가장 더티해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쟁은 이미 3년 전에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병사들.

 

 

 

서구 열강이 임의로 정한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우스2세.(우측)

 

 

 

발칸반도 북부의 달마치아 지방의 무저항 여인네들을 죽인 후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웃고 있는 이탈리아 병사들, 그들은 추축국 점령군의 일부로 이곳에 있었다.

 

 

 

아테네의 시체공시소 - 추축군 점령하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3만 명 이상의 아테네 시민들이 굶어 죽었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추축국의 점령 통치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사진은 당시 그리스 게릴라 중 한 사람인 그리스정교회 신부이다.

 


  이유야 어쨌든 <지중해>는 따뜻했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별로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하나의 전쟁이 끝난 뒤 허탈한 마음을 다스리며 <지중해>를 떠올렸다. 전쟁은 참혹하다. 때로 너무나 참혹한 광경은 우리의 감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참혹함에 압도당한 나머지 전쟁의 참상은 어느 순간 허상이 되거나 형이상학의 공간으로 도피해 버리는 일이 생겨난다. 이 영화는 그런 도피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잊혀진 병사가 가장 평화롭다'는 명제

  제2차 세계대전의 중반을 넘어선 1942년의 어느 날 이탈리아 해군은 8명의 병사를 구축함 가리발디 호에 태워 그리스의 작은 섬 '미기스티' 에 파견한다. 그들은 앞으로 4개월간 이 섬을 점령하고, 주변 해안의 동태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을 내려놓고 돌아가던 구축함은 바다로 나가자마자 격침당하고 군 사령부는 이들이 무사히 섬에 내렸는지, 구축함과 함께 수장 당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면서 군 당국은 이들을 잊었거나, 이들이 미처 구축함에서 하선하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는지, 그도 아니면 복잡한 군 행정의 와중에 이들의 존재가 잊혀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결과 이들은 섬에 고립되고 만다. 게다가 본부와 연락상 반드시 필요한 무전기조차 실수로 망가져 버리고 만다. 이렇게 그들은 외부세계와의 연결이 끊긴 체 섬에 갇히고 만다.

  이 작은 분대의 지휘관인 몬티니(클라우디오 비가글리) 중위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사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다가 징집당해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의 톰 행크스도 교사 출신이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되어 규율을 유지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매일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낯선 섬 생활에서 병사들에게 군율을 요구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8명의 병사 중에서 가장 군인다운 척하는 사람은 로루소 상사(영화 <에스콘디도>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로 그는 북아프리카 전선을 거쳐 그리스에 파견되었고, 통신병 콜리산티와 매우 가까운 사이이다. 그리고 아내를 못 잊어 몇 번의 탈영 경력이 있는 로벤타와 리베로, 펠리체 형제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바다는 난생 처음 구경하는 산골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보다 노새를 더 사랑하는 스트라자보스코, 고아 출신으로 몬티니 중위의 당번병인 파리나(지우세프 세더나)가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레 마을 가운데로 들어가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낌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그들은 군인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했다. 매일 보초를 세워 망을 보았고, 마을 주변을 수색했고, 경계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적은커녕 그들을 적대시하는 마을 주민조차 만날 수 없는 며칠이 계속된다. 산골출신인 펠리체 형제는 섬의 중앙에 있는 바위산에 자리를 잡고, 나머지 병사들은 적당한 곳을 골라 자신들의 숙소를 삼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들은 갑자기 돌아온 마을 사람들로 북적이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전쟁을 가동하는 메커니즘으로부터 잊혀진 병사들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이사오의 TV시리즈 작품 <미래소년, 코난>에서 '하이하바' 섬의 ‘인더스트리아’ 병사들처럼 동화되어 간다. 남자들은 전쟁을 피해(사실은 파르티잔이 되어 추축국에 저항하기 위해)모두 피난을 떠났고, 마을에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늙은 그리스 정교 신부가 있을 뿐이었다. 아차, 중요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바로 창녀 바실리사(반나 바바)였다. 이 작은 섬에 갇힌 남자들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과의 마찰 없이도 해결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의 현실

  과연 이 섬을 찾은 이탈리아 병사들은 무슨 이유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을까? 이 영화는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국가가 부른 탓에(징집당하여) 전쟁에 나왔고, 그리스의 작은 섬인 미기스티 사람들과 무슨 원한을 진 것도 전쟁의 결과가 그들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서먹서먹했던 섬 주민들과 어울려 지내며 전쟁을 잊었고, 아버지가 떠난 마을에서 때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들과의 작은 축제를 경험한다. 이들을 투표를 통해 섬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한 사람 이탈리아 본토에 아내를 두고 온 남자 '로벤타'만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고, 때마침 섬을 찾은 터키 상인이 나눠 준 마약에 취해 모두가 잠든 사이 터키 상인의 배에 몰래 올라탄다. 물론 그런 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고 병사들의 목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총마저 빼앗기고 만다.

  총이 사라졌음에도 그리스 주민들은 무장해제된 이탈리아 병사들을 적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그리스 처녀와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고, 어부로 일하거나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나날들을 보낸다. 그들에게는 이곳이 바로 낙원이었다. 감독 가브리엘 살바토레는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운데 어째서 총을 잡느냐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시당초 이 섬에 불시착한 혹은 표류한 듯 보이는 이탈리아 병사들은 군인으로서는 낙제점으로 보인다. 사람보다는 노새 한 마리를 더 사랑하거나 자신이 쏜 총 소리에 놀라 총을 떨어뜨리며 군복보다는 민간인 옷을 입고 마을의 허드렛일을 도울 때가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관객들조차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몬티니 중위는 성당에 성화를 그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전쟁이 시작될 무렵 그리스의 명목상 지배자는 게오르기우스 2세였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인기 없는 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리스 사람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1863년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 투쟁을 벌이고, 유럽 열강의 협조를 얻어 해방되었을 때 유럽 열강은 서구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이 작고 가난한 신생독립국에 왕정을 수립한다. 그는 덴마크 왕실의 후손으로 그리스에 살면서도 영국식 사고와 의례를 고집하곤 했다. 마치 다국적 기업의 그리스 지사장이 발령되어 온 셈이었으니 어느 국민이 그를 반겨했겠는가? 그러나 추축국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그리스 수상이었던 ‘요하네스 메탁네스’는 과감히 이탈리아의 침공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발칸 반도의 북단 알바니아의 두레스항에 상륙한 이탈리아군 저격사단 - 알바니아 침공은 그리스 침공을 위한 전초전이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까지 넘보게 된다.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Ochi-Day의 시작

  1940년 10월 28일 새벽 3시. 그리스 수상관저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 주재 이탈리아 공사 에마누엘레 그라찌였다. 그는 '그리스를 무력이든 그외에 어떤 방식이 되었든 차지하고 싶다'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메탁네스 수상을 찾은 것이었다. 비록 메탁네스는 파시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를 통치하는 독재자이긴 했으나 나라를 통째로 이탈리아에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고,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탈리아군은 그리스 국경을 넘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연히 이 침공에 맞서기로 결심했고, 거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Ochi'는 이들의 슬로건이 되었다. 10월 28일은 이후 그리스의 국경일이 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무솔리니는 추축국 동맹의 히틀러와 아무런 상의 없이 그리스를 침공했는데 이것은 히틀러 앞에서 이탈리아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그는 그리스의 저항을 매우 가볍게 생각했지만 발칸 반도의 전투란 것은 지배 권력이 항복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있었음이 곧 밝혀진다. 더군다나 그리스 국민들은 자신의 고향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여성은 여성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이탈리아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고 한 달이 되기 전에 이탈리아군이 차지했던 그리스 전역을 회복하는 전과를 올린다. 당시 그리스는 인구만도 자국의 5배 이상 되는  이탈리아와 싸워 승리한 것이다. 어느 그리스 여인은 포로로 잡힌 이탈리아 병사를 보면서 "총 대신 만돌린을 들고 왔다면 환영해주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전세가 뒤바뀐 것은 추축 동맹의 패배를 보다 못한 히틀러가 독일군이 이 전쟁을 떠맡기로 결심하면서부터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발칸 반도의 빨치산 전쟁이라는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이 전쟁은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내니 그 사람이 바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그러나 승리는 멀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1941년 4월 그리스는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이탈리아 지분처럼 여겨져 군사적인 점령은 독일이 실질적인 통치는 이탈리아가 떠맡게 되었다. 추축국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연합군에 의한 공격이 강화되자 추축군은 아테네 등 도시로 공급되어야 할 식량 공급 체계를 군수 공급으로 돌리면서 아테네에서만 3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굶주려 죽고 만다.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발칸반도의 소년 파시스트 단원

지중해, 풍광 속에 묻힌 탈역사적 판타지

   외부의 현실은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낚시질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일 정도였다. 몬티니 중위는 그림을 그리고 로벤타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부칠 수도 없는 편지를 계속 쓰고 있다. 병사들은 마을의 창녀 바실리사(Vassilissa)를 통해 성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욕구를 해결하고 있었다(어떤 의미에서 이 작은 섬의 평화는 바실리사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몬티니 중위의 당번병이자 고아 출신인 ‘파리나’만은 바실리사와 동침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보다 당나귀를 더 사랑하는 스트라자 역시 바실리사 보다는 당나귀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다. 산꼭대기에서 행복한 뮤나론 형제는 해안을 경계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염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산을 찾은 마을 처녀를 동시에 사랑한다(나중에 보면 누가 이 처녀를 임신시켰는지 알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어쩌면 그것이 이 섬의 진정한 평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은 여느 때처럼 마을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그들 사이로 가벼운 고장을 일으킨 경비행기 한 대가 불시착하여 내린다. 비행기에서 내린 조종사는 그들의 전쟁은 이미 3년 전에 끝났고, 이탈리아는 항복했으며 이탈리아는 지금 한창 국가재건 중에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본국에 연락을 취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떠난다. 그들은 이제 이탈리아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한 심정이 된다. 본국에서 올 연락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시간을 떼우고 있는 어느 날. 바실리사의 집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파리나가 바실리사를 찾은 동료들에게 총질을 하고 있었다. 파리나는 이제 곧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면 바실리사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바실리사와 처음으로 같이 잤다. 그리고 자신이 바실리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동료들이 더 이상 바실리사를 창녀로서 찾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결국 바실리사와 파리나는 몬티니 중위가 완성한 성당의 벽화를 배경으로 온 마을 주민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제 이들의 휴가는 끝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다가 왔다. 모두들 이 섬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아쉬움을 품지만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실리사와 결혼한 파리나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올리브 통 속에 숨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로루소 상사이지만 그들의 행복을 위해 모르는 척하고 떠나 버린다. 징집되어 싸우려고 떠났던 마을 사내들은 돌아오고, 적으로 왔던 이탈리아 병사들은 떠나가는 기막힌 임무교대의 시간이었다.  

   만약 호메로스의 작품 <오딧세이>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트로이 전쟁을 위해 남편이 떠나간 뒤 10년간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저주 속에 헤매는 오딧세우스의 운명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오딧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유혹하기 위해 몰려든 약혼자들의 운명도 말이다. 10년간의 표류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딧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약혼자들을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살해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어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들이, 마을의 남자들이 돌아왔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 이탈리아 침략자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추억, 45년이 흐른 뒤

  전쟁이 끝나고 4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미기스티 섬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백발의 노신사가 된 몬티니 중위는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다시 찾는다. 그는 자신이 그린 빛바랜 벽화가 걸려있는 성당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고, 죽은 바실리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그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바실리사 레스토랑'을 지키고 있는 파리나,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나 결국 이 섬을 잊지 못하고 돌아와 파리나와 지내고 있는 로루소. 그들은 이제 늙어서 와인잔을 기울이며 말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 바다를 비추며 만년의 노인들은 늘그막에도 서로 군대 시절의 호칭을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의 작은 섬에서 전쟁을 잊고 살았던 한 군인이 쓴 수기 <나는 군대를 사랑해 Armanta Sagapo(I Love Army)>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모든 도피하는 분들에게 바친다’ 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中)

  르페브르는 일탈이란 결국 귀환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잠시의 탈출이라고 말한다. 모든 영웅들의 귀환 신화와 마찬가지로. 고대 영웅의 모험담은 그렇게 인간 성장의 신화이기도 하다. 영화 <지중해>는 어떤 의미에서 탈역사적 판타지로서, 탈이념적 역사의 현장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영화는 어떻게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가슴에 품고 있는 이들에게는 폭력일지도 모르겠다.

도피의 미학, 지중해

  도피(逃避). 백과사전에는 도피를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이를 피하려 하거나 적응하기 힘든 상황을 피하여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도피의 유형으로는 도피의 유형으로는 개인적 도피, 집단에의 도피, 문화에의 도피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개인적 도피는 개인이 어떤 대인관계에서 적응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이 상황에서 벗어나 고립되려고 하는 태도를 말한다. ‘개인적 도피’의 중요한 형태로는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고립적 경향, 대인기피현상, 인간혐오 경향, 공상, 퇴행현상 등을 들 수 있다.

 ‘집단에의 도피’는 개인이 자신의 신념과 책임 아래 행동하기를 불안해하거나 자신감을 잃고 집단이 강요하는 규범을 저항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집단행동이나 지도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가혹한 경쟁에 시달리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 적응할 방향을 상실한 대중들이 가족이나 민족, 국가로 도피하는 경향을 말한다. 결국 파시즘으로의 귀의는 이런 집단에의 도피 현상인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1941년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이런 현상을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 ‘문화에의 도피’란, 개인이 그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취미에 몰두하거나 대중오락을 추구하는 등의 경향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화란 때로 이와 같은 도피적 경향을 만족시키는 소비문화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사회적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인 '개인주의적 활동의 원리'에 주목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고정된 지위를 갖고 있던 중세 봉건 제도와 달리 자본주의적 경제 아래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전적인 책임을 지게 되므로 개인은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된다고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개혁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발전사와 일치한다. 가령 장원경제에 기반했던 가톨릭 교회에서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를 통한 구원이 우선시 되었던 반면에 막스 베버 식의 ‘프로테스탄트적 직업 윤리의 시대’가 된 부르주아 시대로 진입해가는 시대의 종교 개혁은 개인을 교회와 분리시켜 한 개인으로 직접 하느님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제 하느님의 권능 앞에 인간은 홀로 서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와 ‘적극적 자유('…을 향한 자유'(free to)’의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는데 소극적 자유는 중세 이후 서구 사회에서 개인 획득한 종교, 정치, 경제적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 자유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했고, 개인에게 고독과 불안에 대한 공포를 선사한다. 그 까닭은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세상의 중심, 모든 경제 활동의 목적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단지 개인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은 노동자건, 자본가건 모두 자본의 노예일 뿐으로 자본의 축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의 인간들처럼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45년이 지난 뒤 다시 섬을 찾는 몬타나 일행.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WORLD WAR2 - 빨치산과 게릴라』/ 타임-라이프 북스 편집부 옮김/ 한국일보/ 1990년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상신서1/ 에리히 프롬 지음/ 범우사/ 1993년 - 책 소개가 필요없는 에리히 프롬의 고전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필름스 <지중해> - 지중해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는 필름스 사이트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적극적인 자유를 찾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떤 강한 힘에 스스로를 종속시킴으로써 안도감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끼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즉 1차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2차적 속박을 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의 가족, 민족, 국가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적극적인 자유를 찾아가는 방식은 모든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뭉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유대감을 키워 가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중해>는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맞다. 그들은  총을 놓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삶의 도피를 선택했다. 그들은 억압자로서‘미기스티’섬에 도착했으나 총을 놓고, 피억압자의 삶 속으로 융화되어 갔다. 그들은 가족, 민족, 국가를 떠나 섬의 주민으로 살았다. 분명히 현실 속에서 우리들 모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도피의 마음만큼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망치고 싶다는 그 마음은 비록 저항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적극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부정’에 기초한 문제의식의 발현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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