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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Dr. Paul Joseph Goebbels ,1897-1945, 독일)
- 암울한 지식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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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배회하는 익명의 유령들, 극우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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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를 통한 위대한 정치가로 아니면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전해질 것이다.
We will go down as the greatest statesmen of all times or the greatest criminals. - 괴벨스

  터넷을 떠돌아다니다 보면 의외로 많은 밀리터리 사이트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런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많은 수가 제2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군 매니아층으로 이들 중 일부는 단순한 밀리터리 매니아가 아니라 그들의(Nazi,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정신을 옹호하고, 심지어는 히틀러를 찬양하는 홈페이지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의 거의 대부분은 '극우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쟁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라면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꿈꾸었던 영민한 왕 '정조'와 '하면 된다'의 박정희의 독재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어 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사실 히틀러나 나치당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꿈꾸었던 '천년제국의 실상'을 잘 알아서이기 보다는(잘 안다면 누런 황인종 주제에 게르만 민족주의를 그런 식으로 적극 찬동할 수 없을 테니까) 그들의 군복이나 대전 초반의 전격전 등의 매력에 빠져서 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치의 군복은 군에 대한 동경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히틀러의 특별한 지시에 따라 현재까지 독일 의류 고급 브랜드 중 하나로 통하는 디자이너 휴고 보스(Hugo Boss - 회사는 1923년 설립)에 의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휴고 보스의 의류나 그들의 향수 등은 지금까지도 예전 독일 군복을 제작하던 때의 디자인 개념을 잇고 있어 남성복에 특히 강세를 보이고, 그들의 향수 디자인 등도 과거 군대의 수통과 흡사한 디자인을 따르고 있다. 최근 이 회사에 색다른 소송이 제기되고 있어 잠시 소개해 본다.

Joseph Goebbels, center, was the Third Reich's propaganda minister. (1940 AP file photo)

 

 

 

 

 

 

 

열변을 토하고 있는 괴벨스 박사 - 그는 나치의 핵심 멤버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양친이 가계를 절약하고, 또 그가 서너 개의 가톨릭 장학금을 받은 덕택으로, 8개 대학에 재적하여 철학, 문학 및 예술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1920년대에는 수백만 독일 실업자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Sportpalast)

 

 

 

 

 

 

나치는 광범위한 상징조작을 통해 독일의 청소년을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조직해냈다.

 

 

 

 

 

괴벨스와 나치는 라디오에 주목했다. 라디오는 그 속보성으로 인해 당대 매스미디어의 총아로 부각하고 있었고, 선전 전문가로서 그의 동물적 후각은 라디오의 이런 기능에 주목했다. 그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 34-35년엔 국가 보조금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평균 급료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싼 라디오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런 라디오의 기능을 십분 활용했다.

 

 

 

 

 

 

선전선동의 명수 괴벨스가 레니 리펜슈탈과 함께 만든 선전영화의 걸작 <의지의 승리>.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 모습 -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내려고 했던 나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많은 의식은 고대 로마에서 차용해온 것이 많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장에서 - 나치당의 최고 권력계층이었던 괴링, 괴벨스, 루돌프 헤스, 리벤트로프, 슈페어, 히믈러 등은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여러 영역에서 중첩되는 권한으로 충돌했고, 서로 히틀러의 눈에 들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했다. 물론 히틀러는 이를 방조했다.(좌로부터 히틀러, 괴링, 괴벨스, 헤스 등)

 

 

 

 

 

에밀 놀데의 <최후의 만찬> - 나치에 의해 <퇴폐에술>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혔었다.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 예술 정신의 쇠퇴에 비관하여 자살하거나 국외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유태인들은 이 문구에 속아서 이곳이 강제노역장 정도인 줄 알고 있었다. 나치의 언어에 의한 기만술은 탁월했다. 그후 미국과 일본이 이를 이어받아 침략을 진출로, 원자폭탄을 리틀보이나 팻 보이로 표현하여 그 폭력성을 숨겨왔다.

 

 

 

 

 

수백만의 유태인, 슬라브인들이 강제노역 및 인종청소의 목적으로 살해되었다. 그들은 같은 백인 중에서 이들을 사회악적인 존재로 흑인종과 황인종을 인간과 비슷한 짐승 정도로 생각했다.

 

 

 

 

 

 

히틀러의 최후까지 함께 한 괴벨스 - 나치 통치 기간동안 우수한 게르만족 가정의 전형으로 떠받들어지던 그의 가정도 패전과 함께 가족 몰살이라는 잔혹극으로 일단락된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와의 염문으로 유명했던 체코 여배우 리다 바로바(86)가 2000년 9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이 회사의 창설자인 휴고 보스는 아돌프 히틀러의 엘리트 경비대인 히틀러 청년단(Hitler Youth)과 방위군(Wehrmacht)의 유니폼을 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인 포로들과 폴란드인 재소자들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데려다 옷을 만드는 데에 이용했다고 오스트리아의 잡지인 프로필(Profil)이 이미 1997년 8월 13일판에서 주장했"고 그로 인해 독일 패션 회사 휴고 보스AG는 학살 희생자들이 22개 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고발되었다고 소장을 제출한 변호사가 발했다.)

천년제국의 영광과 나치의 업적(?)

   <쉰들러 리스트>나 그외에 많은 영화들이 홀로코스트에 관해서 증언하고 있다.(물론 이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행하는 학살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독일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가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면 과연 그런 대학살이 오로지 나치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는가? 독일의 극적인 통합 이후 유럽과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점에 대해 그동안의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여러 증언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위에서 말한 '휴고 보스' 사건이고, 스위스 은행들의 나치를 위한 돈세탁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시기 유럽의 거의 각국에는 나치를 본딴 정당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혐오감 역시 뿌리깊은 것이었다.(대전 발발 후 수많은 독일점령지에서 나치 추종자들이 그들의 주구로 활동했었던 것 역시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제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회사들도 그들이 나치의 잔혹행위를 통해 이익을 취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이익의 내용으로는 노예 노동에서 유대인 재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치학의 몇 가지만 감안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대다수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단지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암묵적인 지지와 열광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은 순수 아리안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장애자, 정신박약아 등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좀더 순수한 게르만 혈통을 잇기 위해 그들이 무력으로 점령했던 노르웨이의 여성들과 점령군인 독일 병사들의 성관계를 장려하고 그들로부터 태어난 아기들을 새로운 천년제국의 주인공으로 키우기 위해 별도로 양육하는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그러나 독일의 패전으로 이 아이들은 성년에 이르기까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확실히 독일의 게르만 민족주의는 독특한 면이 있다. 그것은 과거 그들이 로마제국의 변방을 침입하다 격퇴당하고 다시 봉기를 일으키며 베르킨게토릭스가 '검은 숲의 대학살'을 일으키던 무렵부터 이미 형성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끝끝내 로마 사회에 동화하는 것을 거부했던 라인강 저편의 게르만인들과 카이사르에 의해 결국 로마 사회의 한 축으로 편입되었던 갈리아인들의 그것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독일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이 와중에 독일의 극우민족주의 정당이었던 나치당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일개 군소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그들이 사실상 전세계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소련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기간 내내 정권을 배앗기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다.

  결국 히틀러와 나치당이 단순히 폭력에 의해서만 통치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만 하지 않았더라도 독일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깊은 고통의 나락에 빠졌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국부(國父)로 기억할지 모른다고 한다. 그들의 업적을 살펴보자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잃었던 수데텐란트를 비롯해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통해 영토를 회복했으며 독일을 중서부 유럽의 패권국으로 성장시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인플레를 잡았으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보다 먼저 뉴딜 정책과 흡사한 국책 사업들을 일으켜 실업자 문제를 해결했고, 그 결과 독일은 현대식 고속도로의 선구인 '아우토반'을 건설할 수 있었다.

  게르만 민족 운동을 부르짖어 패전의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 젊은이들에게 국민 체조와 유스호스텔 운동을 장려해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민족 정신을 함양토록 했으며 이런 기반 아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하여 패전 후 완전히 달라진 독일의 면모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또한 그들은 당대의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전국민에게 보급토록 했고, 패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천년제국의 수도이자 전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도시로 건설해냈다. 국민차 '폴크스바겐'을 통해 독일의 가정마다 자동차 한 대씩을 선사하기도 했다. 거기에 덧붙여 베를린 심포니의 아름다운 음악까지도…. 이 모든 성과 앞에 어떤 독일인도 나치와 히틀러를 독재자로 부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성과가 누구의 힘에 의한 것이었던가?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박사!

  그를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 모든 성과가 오로지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사관 출신의 낙방생. 히틀러가 총통으로 있던 나치 정권은 총통의 최종학력과 나치당 출생의 한계 덕에 당 고위층에 엘리트라 부를만한 인재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히틀러 개인의 지식인 혐오증도 적지 않이 작용했을 것이다.) 헤르만 괴링(공군 장관, 귀족 출신의 배불뚝이), 루돌프 헤스(나치당 부당수, 뮌헨대학 출신, 상인의 아들), 히믈러(SS장관, 가톨릭 집안 교장의 아들), 에른스트 룀(돌격대 대장), 하이드리히, 슈페어 등등을 살펴보면 이들이 정치 깡패라면 어울리겠지만 한 나라의 통치자 그룹, 그것도 괴테와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라면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나치당에서도 군계일학격으로 뛰어난 엘리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괴벨스였다. 그는 또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히틀러와 함께 한 거의 유일한 나치당 고위 관료였다.

  루돌프 헤스는 영국과의 일전을 벌이려 하던 1941년 5월 10일 영국의 현상태를 존중하고 영국이 갖고 있던 식민지를 모두 돌려주기로 약속하는 대신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자유재량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평화협정안을 갖고, 비밀리에 스코틀랜드로 갔다가 전쟁포로가 되었고(이는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은 그 혼자만의 결정이었다.), 히믈러는 슈페어를 암살하는 등 권력투쟁에 앞장서다 못해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히틀러를 배제한 채 연합군과 강화를 맺으려다 결국 권좌에서 축출되고 음독자살한다. 괴링 역시 히틀러의 자리를 넘보다가 결국 축출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 의해 사형당하기 직전에 음독자살하고, 하이드리히는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괴벨스와 히틀러의 만남

  울 요제프 괴벨스는 아버지가 공장 사무원이었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괴벨스는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었으나 다리가 굽었기 때문에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징집관은 그의 다리와 작은 체격을 보자 그의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훗날 그의 정적들은 이것을 악마의 갈라진 발톱과 절뚝이는 걸음걸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에 대해 전투 중의 부상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만큼 그에게 다리의 장애는 큰 마음의 상처였던 것이다. 이런 장애는 어린 그에게 강렬한 보상심리를 유발함으로써 불운한 인생의 불씨가 되었을 것이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괴벨스는 문학·연극·언론계에서 거의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정치적 활동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더욱 뜨겁게 달궈진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시절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만나게 이에 경도된 듯하다. 그는 나중에 상류계급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계속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지켜나갔다. 나치의 악명높은 반유대 정책이 있었지만 괴벨스의 경우엔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고, 그 자신이 사실상 유대인이었던(나치는 부계던, 모계던 유대인의 피가 흐르면 개종의 유무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반()유대계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괴벨스가 이때쯤 정계에 입문했더라도 그의 정치행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나치스에 입당하게 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다. 괴벨스는 그러나 그들과 달랐다. 그는 뒷골목 건달도 아니요 하급 군인 출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불구 때문에 - 일곱 살 때 앓은 골수염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었다 - 군 문턱에도 가보지 못해서 나치 지도부에 진입하기 위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었던 경력조차 없었다.

  괴벨스는 어엿한 박사 출신이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문학과 역사, 철학을 공부한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갖춘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괴벨스는 문장에 능했다. 그의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여러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괴벨스의 또다른 목표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의 운명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 <방황하는 사람>이라든가 <고독한 나그네> 같은 드라마와 자전적인 내용을 다룬 <마하엘> 같은 소설을 여러 편 썼고 이를 유명 출판사에 보내 출판을 의뢰했지만 역시 외면당했다. 그때 괴벨스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나는 제로다. 그러나 위대한 제로다.”또 다른 일기장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결국 자본주의 아래서 노예로 일생을 마치기보다는 차라리 볼셰비즘 밑에서 평생을 바치는 편이 낫겠다.”1922년 6월 괴벨스는 히틀러를 처음 만났고, 곧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히틀러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는 나치당이 반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당과 히틀러는 반자본주의 정책 같은 걸 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히틀러 당수를 '쁘띠 부르주아와 히틀러'라며 비난했다.

  그것이 오히려 히틀러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정확히 구현해낼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천부적으로 달변이었던(발음이 부정확하고 장광설로 곧잘 흐르던 히틀러의 연설에 비해 괴벨스의 것은 훨신 더 조리있고 발음 역시 정확했다) 그는 이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의 엘버펠트 지구 사무장이자 격주로 발행되는 국가사회주의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1926년 11월 괴벨스를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29세 때 자기를 인정해준 사나이 앞에 섰던 마음을 이렇게 일기장에 고백했다.“그는 37세다. 아돌프 히틀러 …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제3제국의 건국자는 이런 모습일 것이다."

상징조작의 명수, 괴벨스
-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은 의심하나 계속하면 나중에는 믿게 된다

   NSDAP, 즉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창당되어 발전한 것으로 수도 베를린에는 당조직이 없었다. 괴벨스가 베를린 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NSDAP의 좌익인 반자본주의파 그레고르 슈트라서와 '우익'인 당총재 아돌프 히틀러 사이의 대결에서 현명한(?) 선택을 한 덕분이었다. 괴벨스는 내면의 신념과는 반대로 히틀러를 지지했다. 담대하고 위험을 피할 줄 모르는 성격인 괴벨스는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베를린에서 나치 세력을 강화해갔다. 1928년 히틀러는 이 유능한 웅변가이자 뛰어난 선전원이며 재기에 찬 저널리스트(그는 <공격 Der Angriff> 편집장이었으며, 1940-45년 <제국 Das Reich> 편집을 맡음)를 독일 전역을 총괄하는 NSDAP 선전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괴벨스는 이로서 새로운 악칭을 하나 더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디어 조작', '상징조작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정치가로서의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그는 미디어 조작을 통해 단 시간 내에 독일 국민의 정신을 지배했다. 이때 나온 유명한 일화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가 있다”고 호언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 풀기를,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괴벨스는 “그럼 조국은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만 사랑한다는 말인가”라며 그를 감옥에 보냈을 것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우리나라의 <모 일보사>와 아주 유사한 방식이다). 어쨌거나 그는 매우 정력적으로 이 일을 해냈다. 매일 아침 일찍 베를린의 각 신문사 편집자와 모든 지방신문 기자들은 선전부에 집합하여 괴벨스나 그의 조수들에게 지시를 받았다. 괴벨스는 편집자와 기자들에게 어떤 뉴스는 발표하고, 어떤 뉴스는 잘라버리고, 어떤 뉴스는 어떻게 쓰고, 어떤 제목을 달고, 어떤 행사는 취소해야 하고, 어떤 행사는 개최토록 하며, 그날의 논설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지시했다. 또한 이런 지시가 잘못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로 명령하는 것 말고도 매일 한 편의 서면지시를 했다. 아주 작은 지방의 신문과 간행물에 대해서까지도 전보나 편지로 지시를 내려보냈다. 위의 증언은 80년대 우리나라의 <보도지침>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히틀러 시대의 언론 통제에 대한 증언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시의 <보도지침>이 괴벨스의 언론통제와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은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들의 훌륭한 제자들인 셈이니까 말이다. 이런 언론통제는 독재정권에겐 필수적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은 가장 먼저 언론의 입을 막았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지 않고는 독재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비리와 비민주적인 실상을 언론에서 낱낱이 보도하기 시작하면 그걸로 독재자의 운명은 끝이다. 국민들이 그에 대한 저항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

괴벨스의 선전선동전술 -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그리고 박멸한다

그는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언어의 마술사요 선전의 천재였다. 다른 나치 당원들과는 달리 한번도 당 제복이며 군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박사'라고 불렀다. "선전은 정신적 인식을 전할 필요도 없거니와 점잖을 필요도 없다. 성공에 이끄는 것이 좋은 선전이다." 그는 온갖 매스미디어의 기술을 총동원해가며 현대 대중선동의 기본과 선전의 무서운 효과를 처음으로 보여준 교과서였다.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

  벨스는 영화보다는 라디오에 먼저 주목했다. 영화에 비해 라디오는 그 속보성으로 인해 당대 매스미디어의 총아로 부각하고 있었고, 선전 전문가로서 그의 동물적 후각은 라디오의 이런 기능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80년대 초반 우리 사회는 갑자기 컬러TV를 집집마다 들여놓고, 매일 밤 9시에 시작되는 '땡전뉴스'를 듣게 되었다. 주말에는 신설된 프로 스포츠 중계에 넋을 잃고, 더욱더 선정적이 된 TV 쇼프로그램은 밤무대와 경쟁했다. 룸싸롱이 전국의 주택가까지 급속하게 번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각 신문사들이 한 독재자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삐딱한 기자들을 축출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 34-35년엔 국가 보조금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평균 급료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싼 라디오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괴벨스는 국가선전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민계몽선전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고 신설된 제3제국의 '문화원' 원장도 겸임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국민 정신 함양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문화원 원장으로서 선전은 물론 언론·연극·영화·문학·음악·미술계까지 손을 뻗쳤다. 그러나 국외선전·출판·연극·문학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통제권만을 행사했는데, 그 이유는 관할권을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까닭이었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규제하는 데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교육과 같은 영역에까지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괴벨스의 문화정책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선동은 청중의 귀를 마비시킬 따름이라는 논리 때문에 선전 메시지들조차 제약을 받았다.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율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분서갱유와 퇴폐미술전

‘…/추방된 어떤 시인이 분서목록을 들여다 보다가/자기의 책들이 누락된 것을 알고/깜짝 놀랐다. 그는 화가 나서 나는 듯이/책상으로 달려가, 집권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그는 신속한 필치로 써내려갔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그렇게 해 다오! 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다오! 나의 책들 속에서/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와서/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베르톨트 브레히트 <분서>)

  틀러와 진시황의 공통점을 찾자면 바로 '분서갱유 사건'일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기원전에 생긴 일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차이일뿐 두 사건은 기본적으로 사상을 통제하려 했다는 목적에서는 같았다. 나치가 벌인 희대의 폭거 가운데 하나는 1933년의 분서사건과 그해부터 시작돼 37년 ‘퇴폐미술전(Entratete Kunst)'으로 정점에 이른 현대미술 탄압사건이다. 1933년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뮌헨에 '독일예술의 집' 건설을 생각했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소위 '국가주의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다.)을 고취하고 독일의 자유로운 예술의 숨통을 막아버리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괴벨스는 히틀러 정권의 선전상이 된지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3년 3월 13일 괴벨스는 중세의 장엄한 마녀재판을 부활시켰다. 독일의 모든 대학에서 괴벨스의 지휘 아래 이른바 '독일정신에 위배되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케스트너 등 131명의 책이 소각되는‘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1937년의 퇴폐미술전은 어찌보면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 까닭은 여기 포함된 화가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대개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영화의 적 1위'라 부르며 모든 프린트를 소각시키라고 지시했던 <커다란 환상 La Grande Illusion> (1937, 감독: 장 르누아르) 프린트가 발견된 곳은 46년 뮌헨에서 였던 것처럼 괴링을 비롯한 나치당의 수뇌부는 뒤로 그런 예술품들을 몰래 수집하여 그들의 지하창고에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앞으로는 도덕과 윤리를 말하면서도 뒤로는 호박씨 까고 있는 이 땅의 노블리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참고로 당시 '퇴폐예술'이란 낙인을 받아야 했던 화가들과 그 이유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오스카 코코슈카(기법적 연습의 결여), 에밀 놀데(흑인풍, 야만적, 신앙적이지 못함), 오토 딕스(독일 전통예술을 훼손한 죄), 게오르그 그로츠(볼셰비키 예술), 막스 베크만(아나키즘),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미풍양속 훼손),에리히 헤켈, 칼 슈미트 로도로프, 조각가 에른스트 발라하(기괴, 왜곡, 변형이 심한 예술, 독일민족정신 훼손), 쥴 파스킨,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수틴, 카슬링(유태계 예술인),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라이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 교수진(정신병원의 낙서, 어린애 장난에 속하는 풍자화) 등의 죄목이었다.

  그들은 '렘브란트'조차도 말년에 유태인촌에 거주했다는 이유로 기피했다. 실패한 화가. 히틀러다운 복수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그런데 그들이 내건 이유를 보라.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김민기, 한대수 등의 음반이 금지되고, 수많은 금서들이 있었던 시대를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독일 시인 하이네가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장차 사람도 태울 것”이라고 한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일으키기 100년전에 한 말이다. 이렇듯 괴벨스와 나치는 오늘날 우리가 중등학교 미술 교재에서까지 자주 인용되는 현대미술가들을 ‘박멸대상’으로 몰아갔다. 이 전시는 이듬해 뮌헨에서 함부르크 등지로 이어졌는데, 많은 날은 관객이 하루 4만명 이상 몰려 잔인한 조롱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런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브루노 발터, 클라라 하스킬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로, 프랑스로 망명생활을 하다 결국 서유럽이 그들의 군화발에 짓밟히자 영국과 미국 등지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미처 도피하지 못했거나 차마 떠나지 못한 많은 예술가들(푸르트벵글러, 케테 콜비츠)이 전쟁 기간 동안 갖은 박해를 견뎌야 했고 전쟁 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전범 취급을 받아야 했다. 물론 카라얀 처럼 그 시기를 출세에 이용한 이들도 있었다.

광기의 시대를 잘못 살아간 지식인, 괴벨스

  토록 대단해 보였던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7-38년 사이에 다소 약화되었는데 이 시기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던 탓도 있지만 대전 초기 무적 독일군의 신화의 상당 부분은 괴벨스의 선전필름에 의한 것이 많았다(실전에서 독일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당시 알려진 만큼 상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괴벨스에 의해 널리 유포된 선전 필름에 의해서 독일군의 전격전은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비로소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다. 괴벨스 직접 돌아다니면서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그것은 대중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유력한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버린 한참 뒤에도 괴벨스는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다. 이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그때까지 극히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다. 1945년 5월 1일 괴벨스는 베를린의 포위된 벙커(일명 '늑대굴') 안에서 초창기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심복으로 히틀러를 보좌하고 있었다. 이 재능있는 나치의 무대감독은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직후 자살하자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먼저 죽이고 뒤이어 동반자살 함으로써 가장 소름끼치는 잔혹극의 연출을 마쳤다. 전날 그는 히틀러의 뜻에 따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괴벨스의 뒤를 따르는 후배들

  가 오늘날 괴벨스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지식이 어떻게 독일 민족의 이성을 마비시키는데 사용되었는가하는 대목에서 반성을 구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좌파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가 어떻게 극우 민족주의로 돌아서는지 하는 대목에 주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

 

 제5공화국

 1. 뮌헨 폭동

 2. 독일 의회당 방화 사건 - 이 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 탄압개시

 3. 언론사 탄압 및 보도지침 하달

 4. 라디오 대량 보급

 5. 국민차 '폴크스바겐' 생산

 6. 아우토반 건설

 7. 베를린 올림픽 개최 - <올림피아> 영화 제작

 8. 퇴폐예술전 및 분서 사건 - 예술인 탄압

 9. 유스호스텔 운동

10. 유태인 탄압

 1. 12.12 쿠데타

 2. 5.17 확대 계엄조치 및 5.18 광주 민중항쟁 - 민주화 인사, 운동 탄압

 3. 언론인 대량 해직 및 공보지침 하달

 4. 컬러TV 보급

 5. 국민차 '티코' 생산

 6. 88고속도로 건설

 7. 88 서울 올림픽 및 미스 유니버스 대회 등 개최

 8. 국풍운동 및 금서 대량 배출 - 현실과 발언 동인 탄압 등

 9. 사회체육운동

10. 지역감정 심화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1-6』/ 이대영 지음/ (주)호비스트/1999년
  - '알기 쉬운' 이란 말과 플라모델 잡지를 출판하는 회사인 <호비스트>란 출판사에서 나왔다고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오랫동안 군부독재 하에 있었다는 경험과 문(
)숭상의 전통 탓에 우리나라는 전쟁에 관한 연구가 드물고, 제대로 된 세계대전사 하나 변변한 것이 없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읽을 만하다. 역시 알기 쉽게 서술되었고, 일반인이 저술했다고 해서 비전문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역사인식이나 관점이 기존의 군사문제 전문가라고 TV에 나오는 이들보다 훨씬 더 건전함을 느낄 수 있다.

『은밀한 사전/ 카탸 두벡 지음/ 남문희 옮김/ 청년사/ 2001년
  - 가끔 남의 배꼽 아래의 역사에 대해서 파헤친 르뽀 성격의 글들을 읽을 때, 그 사람이 점잖은 척하는 인물일수록 충격이 클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심리치료 카운슬러로 일하고 있는 카타 두벡이 서구 역사상 이름만되면 알법한 인물들의 배꼽 아래 역사를 추적해 사전처럼 엮은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그다지 애정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케네디의 경우,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느라 공무는 언제 보았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한다. 그러지 않고는 흥미위주로 전락하기 쉽다.(어쨌거나 재미는 있다. 가십은 항상 씹을 만하지 않은가? 미장원이든 이발소든 간에 말이다.)

『20세기- Great Ages of Man/ 조엘 콜튼 지음/ 타임 라이프 북스 편집/ (주)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0년
  - 인류사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를 목적으로 미국의 타임 라이프사에서 만든 시리즈 전 20권 <
Great Ages of Man> 중 한 권이다. 어렸을 적부터 굉장히 갖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어느날 헌책방에서 보고는 앞뒤 안 보고 덥석 집었던 책이다. 덕분에 출혈이 좀 크긴 했지만 출판 당시의 가격만도 11,000원의 비싼 책이었기 때문에 바람구두로서는 엄두도 못냈던 책이었다.

『반체제예술/ 사카자키 오쯔로오 지음/ 이철수 옮김/ 과학과 사상/ 1990년
  - 나치 독일의 퇴폐미술전을 포함해서 미술사에 있어서 체제에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미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판화가 이철수가 번역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아직도 수많은 그의 후계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사상을 통제하여 권력에 복종하는 맹신도를 키워내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여럿 있겠지만 바람구두가 생각하기로는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조셉 매카시와 헐리우드 영화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5공화국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괴벨스의 충실한 후예였다. 민중항쟁을 폭도의 소요로, 독재자를 민족의 구세주로 탈바꿈시킨 것이 과연 누구였던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나치 치하의 독일과 5공 시절을 비교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누가 어떤 나쁜 일을 했는가를 규명하는 과거 재평가는 어느 민족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나 인류에 대한 범죄, 민족에 대한 범죄의 진실을 밝히려 하는 것은 그같은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것을 가장 확실하게 깨우치고 있는 이들이 아마도 유럽인들일 것이다. 1943년 2월 둘째 주 독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영국군은 아프리카 북부의 튀니지를 가로질러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을 뒤쫓았고 이틀 뒤 독일군은 서쪽에 있던 미군을 공격해 퇴각시켰다. 같은 날 러시아군은 독일이 두 차례나 점령했던 로스토프를 재탈환했고 영국군과 네팔군은 인도를 지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버마 깊숙이 진격했다. 주말이 가까워 독일 뮌헨에서는 반나치 전단을 뿌린 대학생 단체 「백장미」의 한스 숄을 비롯한 주동자 세 명이 체포돼 처형됐다. 숄은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 『자유 만세!』를 외쳤다. 그 다음 날 요제프 괴벨스는 베를린에서 『유대인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 독일의 방침』이라고 연설했다. 괴벨스가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욱 총력적이고 치열한 전쟁도 치를 각오가 돼 있습니까?』 하고 묻자 독일 군중은 일제히 『예!』라고 소리쳤다. 결국 그들이 원하던대로 총력전이 펼쳐졌고 그 결과 다른 민족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참혹한 피해도 보았다. 함부르크와 쾰른, 베를린 등 주요 도시는 폐허가 됐고 수백만 명이 수세대에 걸쳐 살아왔던 정든 고향을 떠나 떠돌이 난민 신세가 됐다.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한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강간이 자행됐다. 그해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종전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학살이 이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가 그토록 엄청났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바보라서 나치 독일의 야욕과 비극으로 치닫게 될 미래를 몰랐을까? 그들에게도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공포가, 영웅심·충성심·사랑·애국심·휴머니즘도 있었다. 우리는 과거를 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보듯이 볼 수는 없다. 종전이 된 45년 이래 두 세대가 성년이 됐지만 반 세기란 세월은 2차대전을 역사책에 묻어둘 만큼 충분히 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먼 나라 이웃나라에서 벌어지는 '나치 전범 찾기'와 그들에 대한 재판 이야기를 듣게 되곤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비겁과 외면으로 인해 빚어졌던 대량 학살과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참회와 반복을 막기 위해 지금까지 애쓰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 걸쳐 자행된 이런 인류에 대한 범죄와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히틀러가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를 국가반란죄로 처벌했다면, 그가 수데텐란트를 무력으로 점령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응징했다면, 독일의 지식인들이 나치에 대해 좀더 격렬히 저항했더라면, 독일의 양심적인 정당들이 일치단결하여 나치당에 대항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당시 독일에서 나치당은 처음부터 거대정당은 아니었다. 공산당이 탄압받을 때, 사민당은 우리는 괜찮겠지. 사민당이 탄압받을 때, 기민당은 우리는 괜찮을 꺼야. 결국 기민당 마저 탄압받을 때는 아무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이유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그들의 후계자와 망령들이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회고전'이나 '박정희 기념관 건립문제' 등 우리는 이 유령들을 부활시키려는 세력과 맞서 여태껏 묻혀 있던 사실을 파헤쳐 밝히고 과거를 솔직하고 냉정하게 재평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왜 지금인가?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간신히 잦아들었을 무렵 우리는 독재와 사상탄압의 재발을 방지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기억을 바탕으로 세워진다."<알베르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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