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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 ( 周恩來, Zhou Enlai, 1898-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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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벗, 주은래

 

 

 

 파울 요세프 괴벨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모택동

 낫세르

 수카르노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이 말은 중국 천안문(天安門:이하 중국 지명과 인명 표기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광장에 세워진 주은래의 추도 시비에 새겨진 글귀다. 우리나라가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놓고 격돌하고 있을 무렵인 98년 3월 5일은 모택동의 뒤를 이어 항상 제2인자의 위치에만 머물렀던 주은래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제2인자의 전통이란 것이 별로 없는 나라인데 반해서 중국은 그런 2인자의 전통이 확고하게 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가시밭으로 둘러싸인 제2인자의 길

주은래는 절강성의 소흥의 큰아버지 밑에서 초등교육 과정을 밟았고, 1913년 남개중학에 입학하기 위해 천진에 간다.

 

 

 

남개중학 시절의 주은래(1913)

 

 

 

젊은 날의 주은래 -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간 주은래는 1919년 5·4운동이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천진으로 돌아와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한다.

 

 

 

1920년 가을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살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7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 조직책이 된다. (사진은 독일 베를린에서의 주은래)

 

 

 

1934년 대장정을 계기로 주은래는 자신에게는 없는 지도자적 자질이 모택동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군 위원회에서 주은래는 이름없는 부하에 불과했던 모택동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 그는 이후 자청해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천안문 누각에 선 주은래

 

  워낙 광대한 땅덩이와 수십 억에 달하는 인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워진 전통일지는 몰라도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 권력자보다 더 유명하고 더욱 존경을 받았던 제2인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 중 전제 왕정 시절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세 사람을 들자면 아마도 삼국지의 영웅, 제갈량과 제를 춘추전국 시대의 첫 번째 패자로 키워냈던 관중, 100여년 뒤에 관중의 뒤를 이어 제의 재상이 된 안영을 들 수 있을 것이다.(제갈량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잘 아시고 계실 테니 줄이도록 하고 관중과 안영에 대해서는 『사기』관안열전 편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하다.) 그에 비해서 우리들의 2인자 전통이란 것은 (스스로를 깍아내려 좋을 것은 없겠지만) 보잘 것 없는 편이고,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더라도 사실상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가까운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이승만 정권 시절의 이기붕, 박정희 시절의 김종필 등등 우리 사회는 그 동안 2인자를 키울 수 없는 사회 분위기와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는 독재 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왔다. 권력이란 것이 어쩔 수 없는 '사회악'이라면 그 권력이 정점의 어느 한 인간에 집중되고자 하는 속성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2인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권력을 견제하고 그 권력이 유지하고 추진하려는 체제를 지속시켜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 역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 중국의 주은래란 부러운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은래를 우리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한때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상륙지점이 인천이 될 것임을 정확히 예견한 적국의 총리이자, 주은래의 4원칙이란 조항으로 인해 오늘날의 대우 사태에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고<4원칙이란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코로나 자동차를 생산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던 신진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는 당시 중국 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 자동차가 철수하면서 기술과 부품 공급이 끊어지자 단 한 대의 코로나도 만들지 못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중국 진출을 노리던 일본 기업들의 철수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GM과 합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독자적인 성장의 길이 가로막혀 현재의 매각 협상 단계까지 끌려 다니게 되었다>. 제3세계 비동맹 외교의 지도자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우리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의 업적이나 생애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고 그 덕분에 건국 50주년을 맞이한 신중국의 새로운 면모를 몸소 살필 수 있었다. 주요 방문 장소는 상해를 비롯한 절강성 일대, 소흥과 강주, 소주, 봉화 등이었으며 노신 기념관과 장개석 생가, 주은래가 성장한 소흥 일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은래와 모택동의 만남 - 그리고 신중국 건설

  주은래는 1898년 중국 강소성 회안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절강성의 소흥에 있는 큰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그는 1913년 천진에 있는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1917). 그러던 중 1919년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천진으로 돌아와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한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살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7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 조직책이 된다.

  1924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혁명(신해혁명-중국인들은 공화혁명이라고도 함)에 참가한다. 이 신해혁명은 손문의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협조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동에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무렵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자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등영초를 만나 결혼(1925)하는데 여담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중국 공산혁명 지도자의 부인 중 가장 못 생겼다고 한다. 주은래는 당시 장개석이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어 장개석과의 첫 번째 인연을 시작한다. 1927년 3월 장개석의 북벌군이 상해 외곽에 도착했을 때 주은래는 국민당 군대를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동원해 상해를 장악한다.

  그러나 상해에 입성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악명높은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를 동원해 공산주의자를 숙청하고 주은래는 간신히 무한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곧 무한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국민당 내의 좌파 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그 중에는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당 좌파인사들이 공산당과 결별하자 그는 남창봉기(1927. 8.)를 일으키지만 국민당군에 쫓겨 다시 상해로 도피하게 된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는데 당내의 주류는 혁명 전술 교리에 입각하여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도시 혁명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도시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큰 피해만 냈을 뿐 실패를 거듭했다.이 시기까지 주은래는 농민혁명을 주장하던 모택동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상해를 떠나 주덕과 모택동이 조성한 혁명 근거지인 강서로 옮기면서(1931) 모택동을 이해하기 시작하여 후일 죽을 때까지 모택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주은래는 정통 레닌주의에 따라 '도시에서의 노동자 무장봉기'를 제시한 데 반해 모택동은 '농촌에서의 농민 무장봉기'를 제시했다. 주가 소위 '전보 공산주의'를 통해 '중국 소비에트화 노선'을 철저히 추종했으나 장개석 정부의 소공작전에 쫓겨 중국공산당은 장정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1935년 준의 회의에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결론적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력히 지지하고 모가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장개석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 중남부의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이른바 '대장정'을 떠나게 된다. (이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이란 에드가 스노우의 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책은 삼국지나 수호지 못지 않게 재미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에드가 스노우는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의 남편이기도 하다.)

신중국의 깃발을 올린 모택동과 주은래

  모택동은 이 대장정 기간에 당을 장악하고 주은래는 그후 충실하게 그를 보좌하게 된다. 1936년 겨울 장개석이 서안(西安)에서 장학량(張學良)에 의해 연금되자 그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한 것도 역시 주은래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개석을 살해하지 말도록 설득하고, 그 대가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戰線)을 성립시킴으로써 항일전의 승리는 물론 그 뒤 중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1949년 신중국의 총리로 발탁되어 행정의 차원에서 신중국의 뼈대를 세운 것도, 1950년 중·소(中·蘇)동맹조약, 1954년 6·25전쟁과 월남전쟁에 관련된 제네바회담을 성사시킨 것도 역시 그의 공로였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주은래는 당시 38선 돌파를 한국군 단독으로 하고 이후 북진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면 중국이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를 경시한 UN군과 이승만 정부는 그대로 북진한다.

   중국은 미국의 참전이래 한국전쟁에 참전할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은래는 당시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맥아더의 상륙작전 대상지역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이 될 것임을 미리 지적하고 있었다. 1955년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성립시켜 중국이 제3세계에 대한 지도력을 확보한 것도, 1966년부터 10년 동안「문화대혁명」의 대광란을 수습한 공도 그의 차지다. 키신저와 교섭하여 1972년 미국과 중국의 대화해의 서곡인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키고 1975년 월남전을 종식시킨 파리회담을 성립시킨 공도 그의 몫이다.

  이와 관련하여 닉슨의 회고에 의하면 72년 첫 중국 방문 당시 주은래는 자신이 암을 앓고 있으며 언제 죽게 될 지 모른다고 말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미국과의 수교를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닉슨이 이에 감동받은 것은 물론이다. 중국이 현재와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그 초석을 깔아준 사람 역시 주은래였다. 그는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오늘날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초석을 놓아주었으며 그의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의 쇠락을 앞당겼던 제1차 천안문 사건의 발동 역시 주은래로 인한 것이었다.

강청, 모자를 벗어라.

   는 항일전, 국공내전과 중국통일 뒤의 전과정에서 정치·외교·행정·군사·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빼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신중국의 실질적인 건설자이다. 주은래는 신중국 성립으로부터 총리재직 26년 3개월, 준의회의로부터 41년 동안 부동의 제2인자로 우뚝 서 있었다. 모택동의 그늘에 가려있던 주은래. 25년여 동안 모 주석의 정치적 동료로 활약하며 수상과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주은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택동과 달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초만 해도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의 주요 당직을 맡으며 주목을 받고 있었고, 모택동은 그의 출세를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1934년 대장정을 계기로 주은래는 자신에게는 없는 지도자적 자질이 모택동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군 위원회에서 주은래는 이름없는 부하에 불과했던 모택동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 그는 이후 자청해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일까 주은래의 죽음에 대해 중국 인민들은 '광기의 시대였던 1966~69년(문화혁명) 당시 누구보다 질서와 합리성을 주장한 사람이자, 9개월 후 죽은 모 주석보다 중국 인민들이 더 슬퍼한 위인’으로 평가했다.

  주은래는 1973년엔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다.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불러 집무를 매일 했다. 퇴원 후에도 하루 평균 16-18시간씩 일하면서 병이 깃든 자신의 몸을 혹사했다. 그는 걱정하는 측근들에게 "나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긴 이들은 몇이나 될까?(예를 들어 총리의 근무 시간을 계산한 것이 있는데 그는 당내에서도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주 총리가 1974년 6월 1일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그해 1월부터 일한 시간을 정리한 것이 있었다. 1월에서 5월까지 총 139일에 서 12∼14시간 일한 날이 9일, 14∼18시간 이 74일, 19∼23시간이 38일, 24시간 꼬박 세운 날은 5일, 그사이 13일 동안만이 근 무시간이 12시간 내였다고 한다. 게다가 3 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 일반적인 업무처리 외에도 중앙회의에 21차례 참석했고 외교활동에 54차례, 기타 회의에 57차례 참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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