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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바람의 투명한 꿈

내 나이 스물하고도 아홉.
그녀의 엄마는 스물 아홉에,
덜 여문 까만머리 둘을 남기고 가방을 챙겼다.
여린 손아귀에 파란 사과 한 알씩을 쥐어주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그 소리
그 딸에 그 어머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엔 가방을 왼손엔 파란 사과 한 알
내 나이 스물하고도 아홉

<- 누나가 자기 나이 스물 아홉에 가계부에 남긴 글.>

1.

몰운대!
난 외로와 미치겠어.
성민이가 갑자기 "형이 미쳤다는 것도, 외롭다는 것도 알어." 라고 말한다.
나는 창피했다. 들켜 버렸군.
이곳에선 절벽을 뱅대라고 부른다.
바람은 몰운대를 향해 불어온다. 구름이 쉬어 갔다는 전설 속의 그곳엔 아름다움이 있었다.
죽음의 서슬 퍼런 살기가 나의 육신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켜 준다.
아리아리한 아픔이 얼음 배인 발목으로 한기를 쉴새없이 지어 나르고 나는 그곳에서 얼어붙는다.
우리는 모두 잘못 살고 있어. 라고 바람은 나에게 미친 듯이 타이르고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혼자 바람의 계곡에 서 있다.
병 깊은 슬픈 세월이 내게 오지 말라 이르고 나, 이곳에 몸져누워 한 세월을 보낸다.
바람은 언제나 낯익고 그 바람은 내게 슬퍼, 슬프다 라고 귀뜸 해준다.
슬프지 않은 한 세월을 우리는 연민으로 맞이하고 있다.
눈 속에 내 청춘, 발목이 묶였다.
들리는가. 미친 바람의 노래.
흐르다 흘러 얼음이 되어 굳어 가는 이 강산의 눈물이 나는 보인다.
그리고 그 강가에 발을 담그고 엷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님을 깨우친다.
미친 바람은 불어온다. 어디에서 너는 흘러오고 있는지....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유배되어 온 바람처럼 이제 갈 곳이 없다.
마음이 없는 바람은 아무것도 불어오지 못하고 불어 가지 못한다.
다시 사랑을, 내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을까?

2.

몰운대, 소금강, 아우라지강, 정선 아리랑.
대한민국엔 소금강이라는 지명이 너무 많다.
모두 금강산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우리 나라 모든 땅은 죽기에 좋은 곳이다.
아름다운 땅.
죽음에 이를 만큼 너는 아름답다.
곳곳에 맺힌 슬픔이 꽃보다 예쁘게, 아니 꽃조차 슬프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청정한 바람 계곡.
얼음장 위로 이름을 써 본다. 돌멩이를 던져 본다.
모든 것은 침묵이다.
사랑으로 그대 침묵하고 있는가.
나 이곳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그대는 모르시겠지.
사랑으로 나, 이 강산을 훑어 가고 있다는 것을....
침묵의 아름다움은 바람이 알고 있다.
때로는 울부짖음으로 그리고 소리 없는 절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이 되고 싶다.

3.

할아버지!
많고 많은 만감이 교차하는 지점에 항상 할아버지는 서 계신다.
거구의 몸으로 이 땅에 두 발로 굳건히 뿌리를 내린 모습으로 그 분은 나에게 언제나 말씀하신다.
나는 그 분의 열매였다.
우울하다.
그 열매가 이 땅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하고 굴러다니며 곯고 상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4.

우리의 암호 전문을 적은 종이 비행기는 추락 중이다.
당신은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저로 하여금 꿈을 계속 꾸라고 하다니....
I'm a Dreamer. I'm a Hungry Fighter. O, Miserable!
문득 사랑이란 감기와 같은 질병이란 생각이 든다.
예방할 수도 없고, 약도 없다.
그저 앓을 만큼 앓아야 낳는 병이다.
그리고 한 번 걸렸다고 해서 체내에 항체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란 불치의 병이다.

5.

몸이 아프다.
신발을 신는 일조차 망설여진다.
차라리 피를 토하며, 서서히 죽어 가는 병이라면 좋겠다.
이 아픔은 목숨과는 상관없는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간혹 사치스러운 병처럼 느껴진다.
생각은 그렇더라도 고통은 견딜 수 없이 날 괴롭힌다.

6.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죽음을 향해 마냥 달려만 가고 있는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일이 나의 요사이 일과인 것 같다.
매일 술을 마셔야 잠이 든다.
술을 마시면 잘 잠들 수 있다.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다.
시간만 있으면 자고 싶다.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의 강보에 싸여서 나도 이 세상을 벗어나고 싶다.
언제나 슬픈 꿈들로 에워싸인 나를 벗어나서....
등장 인물은 언제나 나 혼자뿐인 이 꿈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살아갈 방도를 깨우치고 있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언제나 버림받는 일에만 익숙하다.

7.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현대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은 모두 언제나 미칠 준비가 되어 있다.
살며, 사랑하며, 지치고 그리고 우리는 죽어 간다.
아무 이유도 없이 새들이 페루 해안에서 죽어 가듯이.....
그리고 우리의 사체는 한 줌의 모래에 섞여 시들어 간다.
아름다운 꽃잎에서 생명의 열정이 빠져나가듯 우리의 육신도 그렇게 시들어 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찮은 식물보다도 더 조용히 죽어 가고 있다.
꽃조차 한 번 피워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생각이 끊긴다.
드문드문 인적 끊긴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갈 곳을 잊고 있다.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그 길을 안 적은 있었나?

8.

나는 등 떠밀려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나는 내 인생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무모한 짓이다.
나에게 저당 잡힐 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 데.....

9.

그놈의 기억들이 오래된 두통처럼 뒷골을 조여 온다.
두렵다.
살아가는 일과 사랑하는 일!

10.

그러나 때로 우리는 아주 낯선 장소에서 가장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슬퍼지는 것이다.
행복하다는 확신에 가득차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다.
알 수 없는 공허와 무력감에 짓눌려 창 밖을 본다.
대재벌의 공장에서 찍어내는 천편일률적이고 형편없는 디자인의 자동차와 그것들이 뿜어내는 숨막히는 매연과 가뿐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 놀라웁게도 그들은 두발로 직립 보행하는 짐승이다. - 사람들을 본다. 대도시의 일상은 지겹게 권태스럽다. 그들의 척추 맨 위에는 우리가 뇌라고 부르는 골이 있다.
우리가 슬픈 것은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며,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무심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는 언젠가 이 지상에서 파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처럼 나도 아주 쉽게 그 짓을 할 수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놈의 잘난 척이 문제일 뿐이다.
막상 진정한 글쓰기란 스스로를 진창에 던지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하루빨리 멸종되어야 할 종족이다.
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시켜가는 과정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자칭 예술가를 보면 난 솟아오르는 구토를 아직도 참을 수가 없다.
상처가 적은 탓이다.
예술이란 언제나 생명의 불꽃을 소진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걸고 그 작업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가 택한 장르는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치열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를 적으로 해서 싸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와 형제, 연인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그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킨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
-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는 타협할 수도,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울 것은 없다.
혼자라는 것에 겁먹을 필요는 더욱 없다.
우리는 혼자 망해 가고 있다.
그대 찬란하게 망가지도록....
아, 이 더러운 자본주의여!
그대의 젖가슴은 애인보다 더 탄력적이구나.
썩어 가는 고름은 한 송이 꽃보다, 솔로몬의 영화보다 화려하다.
- 난 망했다.
- 클클, 킬킬, 칼칼, 커억.(무협지에 등장하는 악당들이 내뱉는 가장 주목할 만한 의성어.)
-그래도 뭔가 해보구 싶어.여기에 뭔가 흠집을 남기고 싶어.

(지금 읽어보면 아주 유치찬란합니다. 웬 비명까지…. 그러나 이렇게 살았던 적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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