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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열강의 각축, 걸프전

 

 

<계간 황해문화 - 2002년 봄호 특집으로 수록되었던 글 입니다.>

 

 

20세기 세계의 국지전 그 뿌리와 결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중심으로

 

 

 

 

바람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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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의 국지전 -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각축, 걸프전

 

 

 

아라비아의 로렌스(영화)

데이비드 린

아야툴라 호메이니

낫세르

 

  동의 국경선은 19세기 유럽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한 때는 서구 유럽이 아랍의 독립을 지원한 적이 있다. 우리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럽(그중에서도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아랍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아랍의 독립을 지원했다. 1915년 아랍의 총독이었던 맥마흔은 전후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917년 전쟁에서 유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민족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것이 발포어 선언이다. 한편 1916년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는데 이것은 전후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이 전통적으로 서구에 대해 갖게되는 반감의 뿌리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이기는 하나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는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중동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두 차례의 중요한 정치적 혁명을 겪었다. 1958년 이라크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대변하던 왕정이 붕괴되는 군사혁명이 있었고, 1979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정이 회교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후 고조되는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국의 석유자원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1951년 이란의 총리가 된 모하메드 모사데그는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 브리튼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이란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왕의 전제적인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이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3년 미국 CIA의 지원(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16)을 받은 장군 자헤디의 군부쿠데타를 통해 실각하고 만다. 그는 체포·구금되었다가 1956년 석방된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이집트 등에서 개혁 시도는 1차적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이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철저히 실천에 옮긴 일은 공산당 탄압이었다.

16) 2000년 3월 17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는 미국-이란 협회 연설에서 미국이 1953년 좌파 성향의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미 CIA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고,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17) 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와 연결된 지역에서 암암리에 원유를 뽑아냈다. 쿠웨이트 침공 일주일 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에프릴그라피스는 사담에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여러번에 걸쳐 거듭 밝혔다. 그리고 침공 이틀 전 국무차관 존 켈리는 "미국은 쿠웨이트 방위의 감시자가 아니다"라고 하원에서 강조함으로써 사담에게 청신호를 보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는 새로운 국경설정안을 포함해서 여러차례 협상제의를 했으나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이라크 군인 10만 명(그것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사망해서 모두 30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에 비해 동맹군은 미군 148명, 영국군 47명을 포함해서 모두 211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1/3은 미군의 오포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걸프전 후 국제연합식량기구(FAO)의 1995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는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식량부문과 농경지,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정문태, 「이라크 꼬마들이 죽어간다」, <한겨레21>, 238호, 1998년 57~58쪽

18) 걸프전쟁에 나타난 미국 언론통제전략의 실상을 연구한 룬 오트슨(Rune Ottoson)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3가지 언론통제전략을 처음부터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가능한 언론을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2)동시에 가능한한 오랫동안 취재,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3)최대한의 보도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 미군 당국은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쳐 미국과 세계에서 특파된 약 192명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미군기지에 주둔시켰다.  전세계 175,000명의 기자를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JF)은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기자풀제는 명백한 언론 자유 침해이다. 또한 중요한 정보는 차단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비영국, 비미국 기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 걸프전 당시 세계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군사시설 정조준 폭격장면이 미군당국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된 방영물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이 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라크 군사기지만 포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들이 얼마나 미군의 포격에 희생됐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십자사의 조사로는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시민 15~2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김창룡, 「신문의 2001년 미국테러사건보도와 문제점에 관한 연구」,  http://www.jabo.co.kr/68th_media_3.htm  에서

 


  1978년 이란에서 미국과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던 팔레비 왕정이 민중혁명에 의해 붕괴된다. 이란 팔레비 왕조의 제2대 국왕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석유 국유화와 왕권 제한을 추진하던 모사데그 총리와 대립하다가 1953년 로마로 망명했으나 망명 3일 뒤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귀국한다. 그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공포정치와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으며 급격한 서구화(백색혁명)을 추진한다. 중동 지역은 세계 석유 수요의 60% 이상을 공급하는 현대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중동의 급격한 변혁을 원치 않았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립을 원한 아랍 민중의 이해를 배신하고 그들의 파이프라인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보수 왕정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해왔다. 이란에서의 민중혁명은 미국이 과소 평가해 온 아랍 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던 보수왕정을 통해 저유가 시대의 호황을 누리던 세계 경제는 급전직하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걸프만 일대의 왕정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주의는 이란 회교 정권을 제거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일으킨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라크에 무기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전쟁이 이들 국가에 남겨준 것은 막대한 사상자와 전쟁 부채였다. 이 전쟁을 가리켜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슬람 내부의 전쟁,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이라크의 전쟁으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전쟁의 원인을 오도한 것이다.

  실제 이라크의 종교 분포는 시아파가 55%,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로 되어있다. 다만 이라크의 지배 권력인 바트당의 기반이 수니파였고, 급격한 도시화로 농촌에 뿌리를 둔 대다수 시아파 농민들의 삶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에서도 이슬람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불어오자 이런 내적 긴장을 외부로 발산한 것이다. 8년간의 소모전이 끝난 뒤에 이란과 이라크에 남은 것은 폐허였지만 민중의 의지를 토대로 수립된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호메이니의 사후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은 석유 자원을 탐낸 서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을 부추겨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의 패배로 독립한 이들 국가들은 다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호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보호국, 독립국을 오가게 된다. 쿠웨이트 역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개전 5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장악한다.

  한동안 미국은 이런 이라크의 영토 확장욕을 비밀리에 부추겼으나17)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UN을 통해 신속하게 이라크 제재를 결의하고 이라크의 패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에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아랍 국가까지 포함된 33개국의 다국적군을 편성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1백 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지상작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걸프전은 베트남전 이후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미국이 앞으로 추진할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TV 수상기를 통해 안방까지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방영된 결과 반전여론이 조성돼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고, 걸프전 전기간을 통해 언론 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했다. 또한 이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 15만 명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쿠웨이트의 사바 왕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위축돼 걸프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재산피해는 750억 달러, 전쟁 전 1,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자산은 550억달러로 감소했고, 계속되는 다국적군의 주둔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돼 1997년까지 경제성장률은 1%였다. GDP의 12.8%인 35억 달러를 첨단 무기 구입 등 국방예산에 쏟아부으며 전력강화에 힘쓰고 있다. 그들이 구입하는 무기의 대부분이 걸프전을 통해 놀라운 성능을 입증한 미국제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오일달러는 계속해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지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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